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177화 (177/214)

제177화. 별자리를 거니는 히치하이커 (3)

동행 요청과 함께 호위가 될 사람들을 달라.

언뜻 들으면 굉장히 무례하게 느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대주교와 부지점장이 경악하며 날 바라봤다.

하지만 아멜리는 흥미로움 반, 기대 반으로 날 응시했다.

“네, 네 이노…!”

“나쁘지 않군요.”

부들부들 떨며 격노하려는 대주교의 말을 자른 아멜리는 싱긋 웃었다.

“한 번 말씀드린 듯하지만 손님께선 굉장히 식견이 뛰어나시군요.”

“과찬이십니다. 성녀 성하.”

나는 마치 궁중 예법을 하듯 과장되게 팔을 품 안으로 저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 과장된 인사에 로툴러스도 놀라서 날 바라봤다.

“용병은 몇 자리나 비어 있나요?”

단도직입적인 아멜리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었다.

아닌 척했지만 허가증 하나가 사라져서 준비한 전력의 반도 못 쓰게 되니 초조했던 모양이었다. 몸이 달았군.

“성녀인지는 제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않으십니까?”

“대주교님께서 배려해 줄 만한 젊다 못해 어린 여자 사제가 몇이나 있겠어요. 방금까지 보여주신 식견으로 몰랐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죠.”

역시 눈치챌 줄 알았다.

아마 내가 상석에 앉은 그녀를 지적하지 않고 대주교에게 인사한 시점부터 알아차렸겠지.

그 정도 머리는 돌아가는 여자였다.

“그래서 몇 자리나 비어 있죠?”

“글쎄요, 성녀님께서 몇 자리나 원하시는지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원하는 자리 숫자에 따라 성의를 보여야 할 거다.

역으로 선제시를 걸자 그녀의 선해 보이는 가면이 벗겨지며 악동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소피아랑 절친한 친구인 이유가 있다니까.

“좋습니다. 최고급 성수 10리터를 드리죠. 원하신다면 축성(祝聖)도 해드릴 수 있어요.”

성녀가 가호를 내리며 축복을 빌어준다라.

일곱 신 중 어떤 신을 믿든, 믿는 게 악마만 아니라면 감격의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었다.

“두 자리 내어드리죠.”

하지만 가치 없다.

나 같은 무신론자에게 시간제한 있는 일회용 가호 따위, 장기 보존이 가능한 성수만 못하다.

그러니 성수 5리터당 한 명으로 가격을 매겼다.

“아니, 지금…!”

“최고급 성수 3리터에 상급 성수 40리터를 추가로 드리겠어요. 제가 가진 성수 전부에요.”

아멜리는 흥정하는 나를 향해 화를 내려던 대주교의 말을 자르며 성수를 더 배팅했다.

“한 자리 더 내어 드리겠습니다.”

상급 성수 40리터면 최고급 1리터만 못 했다. 하지만 아량 넓게 반올림하여 한 자리를 더 주기로 했다.

내 말에 아멜리는 고심에 빠졌다.

“사실 이분은….”

“용병왕 필리드라이온 로툴러스 씨겠죠. 성녀님이 중요하다고 할 만한 앵무새 수인 용병이 용병왕 말고 더 있겠습니까? 아니었으면 이런 제안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로툴러스의 이름값을 팔아먹으려던 아멜리의 시도는 입도 제대로 열지 못하고 좌초되었다.

“제 식견은 충분히 증명해 드렸습니다. 유적 내부에서도 충분히 통할 식견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저울에 허가증 자릿값을 올려놓아라.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그녀는 즐거운 듯 웃었다.

“정말 만만치 않으신 분이군요. 혹시 신전에서 일해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글쎄요. 그것도 값에 포함한다면 세 자리는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제 몸값이 비싼지라 제가 꽤 손해 보겠군요.”

앞선 최고급 성수 13리터와 상급 성수 40리터는 날 고용한 값이란 의미였다.

아멜리는 양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항복의 제스처를 취했다.

“제가 욕심이 과했네요. 정정하죠.”

“그렇다면 다시 세 자리는 성녀님의 겁니다.”

나와 아멜리는 동시에 웃었다.

“성물 지정까지는 아니지만 성철(聖鐵)로 만든 검을 두 자루 드리죠.”

“세 자리 더 드리죠. 총 여섯 자리 확보하셨습니다.”

성철은 고위 신관 여럿이 신성력으로 벼린 철로 반영구적으로 신성력을 내뿜는 특성을 지녔다.

강도는 일반적인 강철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성철검으로 검기를 만든다면 축성검기가, 검강을 만든다면 축성검강이 만들어지는 귀물(貴物)이었다.

물론 성물 지정이 안 되어 있다면 브류타에서 프레시아가 초인급 데스 나이트를 일격에 골로 보낸 축성검강 정도의 위력은 나오지 않을 거다.

그건 최고급 성수를 들이부어 만들었기에 나온 위력이었다.

대신 시간이 지나도 휘발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크나큰 장점이었다.

무엇보다 교황이나 차기 교황 후보로 거론되는 추기경급 인사나 간신히 구할 수 있는 게 축성철인 만큼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는 점이 컸다.

“마법 지팡이는 없습니까?”

마법 지팡이로 만들면 당연히 신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그래봤자 마력을 덜 먹는 저위계 마법 정도지만 언데드나 부정한 것들을 상대하는 데 충분했다.

애초에 마법 전투는 어지간해서 간단한 마법으로 승부가 나기 마련이었다.

마탄 한 발에 대가리가 깨지고 배때기에 구멍 나게 생겼는데 복잡한 마법을 사용하는 놈은 정신 상태가 이상한 놈이다.

“성철 마법 지팡이는 아마 여분은 하나 정도 있긴 할 것 같은데….”

눈알을 굴리는 걸 보아하니 지금 가지고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대주교의 부정 축재한 보물들 중에 있나?

그럼 소피아의 손에 있을 테니 나중에 좋아 보이는 것 한두 개 정도는 슬쩍해 둘까.

“하나라면 두 자리 더 드리죠. 총 여덟 자리로 만족하십니까?”

“아니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음, 유물 중에….”

나와 아멜리의 협상은 꽤 길게 이어졌고, 대지 교단의 허가증으로 들어갈 수 있는 20명 중 14명이 바다 교단의 성기사와 전투 사제가 되었다.

그리고 내 주머니도 다시 두둑해졌다.

아주 좋다.

나는 목적한 바를 모두 이루고 대성당을 유유히 떠났다.

* * *

“일단 급한 불은 껐네요.”

아멜리의 말에 로툴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유적지에 들어가려 한 인원은 성녀 아멜리와 용병왕 로툴러스, 아르카나 소속 고고학자 1명, 마법사 3명, 함정 전문가 2명, 감정사 2명, 탐험가 2명, 그리고 바다 교단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성기사 18명과 전투 사제 10명으로 도합 40명이었다.

계획된 인원 중 고고학자, 함정 전문가, 감정사는 아예 비전투 인원이었다.

게다가 유적의 수준으로 보았을 때 마법사 셋과 탐험가 중 하나는 자신의 몸이나 간신히 지킬 수준으로 위험한 상황에선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40명 중 9명이 전력 외인 상황에서 유적에 들어가기도 전에 허가증 하나가 사라졌으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비전투 인원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유적에서 길을 잃지 않고 찾거나 발굴한 유물을 확인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유적은 9명을 지키기 위해 못 해도 그 두 배는 필요할 만큼 위험했다.

“고작 여섯 명으로 끝난 게 다행이군.”

“그러게요. 대신 혹이 여섯 명 더 생기긴 했지만요”

아멜리의 말에 로툴러스는 날개깃으로 부리 아래를 쓸었다.

“아니, 마냥 혹이라고 볼 순 없을걸? 그 이안이라는 녀석의 호위라는 여자 수준을 보면 그 친구의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정말요?”

천하의 용병왕이 인정하는 수준이라니 믿기 어려웠다.

“철저하게 기도(氣度)를 숨기고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숨길 수 있으면 보통 실력은 아니겠지. 다른 넷이 그 호위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오히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인가요?”

로툴러스의 말에 아멜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행이네요. 광대가 물자 준비를 모두 마치면 바로 들어가도 괜찮겠어요.”

* * *

화창하고 따사로운 햇살에 유적 입구를 지키던 병사 둘은 나른한 듯 하품을 했다.

도시 중앙의 유적이 국가 차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기는 했지만 입구를 지키는 데 그리 큰 공을 들이진 않았다.

어차피 허가증이 없이는 안으로 들어가 봤자 바로 방위 마법에 공격당해 죽을 게 뻔했으니 쓸데없는 데 인력과 예산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하암~”

초병들은 더럽게 거치적거리는 창대에 어깨를 기대며 하염없이 교대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유적 입구로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창백한 피부의 미녀가 느긋하게 걸어왔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여성의 등장에 병사들은 급하게 몸단장을 하고는 서로 말을 걸기 위해 아웅다웅했다.

짧은 투덕거림 끝에 선임인 사수가 짬으로 밀어버리고 천천히 걸어오는 여인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유적 출입 목적이십니까?”

당연한 물음에 검마 아나스타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가증을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거 없다.”

“예?”

아나스타샤는 당황해서 되묻는 병사를 지나쳤다.

병사는 인지를 넘어선 그녀의 움직임에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아니! 위험…!”

피슈- 콰과과광-!

입구에 발을 들이자마자 고밀도의 마력 광선이 쏟아졌고 병사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을 거라 생각했던 두 사람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여인을 찾아 두리번댔다.

콰아아- 콰아-!

그들은 곧 유적 깊숙이에서 들려오는 폭발 소리에 아나스타샤가 살아서 유적 안으로 들어갔음을 깨달았다.

“어, 어떡합니까?”

“…나도 몰라, 시부랄.”

병사로 근무한 수년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어차피 허가증 없이 살아나올 가능성은 없을 거라 판단한 두 사람은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몇 시간 뒤 상급자에게 짬 당해 다시 저녁 초병 근무를 서게 된 두 사람은 검선 나유타에 의해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검마는 조용히 들어갔지만, 검선은 앞을 막아선 그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욕 한 바가지 하고 들어갔다는 것뿐이었다.

* * *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프레시아는 자신감을 잃은 듯 시무룩해져서 내게 물었다.

“역시 저보다는 제이드나 아바스엘 씨가 도련님을 보필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바다 교단의 성녀와 협상하는 사이 얼어붙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 듯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아니, 충분히 잘해줬어.”

확실히 제이드나 아바스엘이라면 날 지킬 무력도 충분한 데다 내 말에 추임새를 넣어주며 보조를 해줄 순 있긴 했겠다. 하지만 로툴러스를 설득하기 힘들었을 거다.

로툴러스는 나와 아멜리의 대화에 끼지 않았지만, 대화가 오가는 동안 나와 프레시아를 관조하듯 주시했다.

그 화려한 깃털의 앵무새 수인은 만약 내가 방해가 되겠다 싶었으면 아멜리의 뜻이 어떻든 내 제안을 거절했을 거다.

하지만 프레시아가 내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내 가치 평가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프레시아는 마치 은신술을 사용하듯 철저하게 자신의 기도를 숨겼지만, 자신만의 심상을 정립한 초인에게는 오히려 위화감으로 작용해 역으로 실력을 추측할 수 있었을 거다.

내가 대주교실에서 로툴러스가 나가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던 이유기도 하다.

아무리 초인이어도 천천히 살펴보지 않았다면 위화감을 모른 채 나가버렸을 테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내 언변이 아멜리를 설득하는 과정이었다면, 프레시아는 그 존재만으로 용병왕을 설득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마법사인 제이드나 아바스엘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설명을 듣자 프레시아의 시무룩해졌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그런가요! 아, 다행이다.”

프레시아는 자신이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물론 다음에 이런 일이 있으면 프레시아가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제이드와 움직일 생각이긴 했다. 이건 비밀로 해야지.

여관에 다 도착했을 무렵, 길 건너편에서 익숙한 남색 머리가 늙은이를 데리고 이곳으로 다가왔다.

“약속 시간은 아직 두어 시간 남았는데?”

내 물음에 소피아는 장난스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슬슬 볼일을 끝내고 올 것 같아서요. 시간 낭비할 건 없잖아요?”

신성력을 기반으로 한 초직감인가.

“그래? 그럼 내 동료들을 소개해 줄 테니까 같이 들어가지.”

내 안내에 소피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내 뒤를 따랐다.

나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늙은 성기사의 시선 때문에 뒤통수가 따끔거렸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내일이면 드디어 유적에 들어간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