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별자리를 거니는 히치하이커 (2)
불안과 짜증이 섞인 표정의 대주교가 내게 뭐라 말하려 했다.
“자네…!”
“이런, 손님께서 오셨는데 앉으라 권하는 것도 늦었네요. 차와 다과를 내드릴 테니 편히 앉아주세요.”
아멜리가 대주교의 말을 자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대주교가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제가 모신 손님이니 제가 내오겠습니다!”
대주교는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테이블 옆에 준비된 마법 주전자와 찻잎이 담긴 통을 들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성녀가 허가증이 없어진 걸로 한 푸닥거리한 모양이구만.
다른 교단의 성인이라면 모를까, 바다 교단의 성녀는 그 권세가 교황을 능가하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에겐 바다 교단의 성직자의 신성력을 강탈할 능력이 있으니 말이다.
바다의 성녀, 아멜리는 신벌이라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아르카나가 ‘어르신’이라 부르는 녀석에게 받은 힘으로 타인의 신성력을 강탈하는 것이었다.
강탈당한 사제는 더 이상 신성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신성력을 강탈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속한 교단에 한한 능력이었다.
정확히는 타 교단의 신성력을 강탈할 순 있지만, 다른 성질의 신성력을 품어봤자 독으로 작용할뿐더러, 정말로 그 교단의 신에게 신벌을 받을 위험이 있어서 강탈하지 못하는 거였다.
생각해 보면 그녀의 능력은 신벌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강탈의 능력을 사용하고도 바다의 신은 여전히 그녀를 총애하며 성녀로 두고 있으니 말이다.
솔직히 내가 신이어도 그녀를 가만히 둘 것 같았다.
그녀가 신벌이라고 신성력을 빼앗은 사제들은 하나같이 부패했고, 결국에는 아르카나의 힘을 이용해 교단의 이득을 취하고 있었으니까.
아멜리와 아르카나의 관계는 상명하복이 아닌 상호공생에 가까웠다.
“그럼 대화를 나누어 볼까요?”
“그러죠.”
아멜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대주교는 말이 짧은 날 불쾌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잘 마시겠습니다.”
나는 차를 홀짝이며 놀랐다. 대주교씩이나 돼서 이렇게 차를 잘 타다니.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탐욕이나 부릴 줄만 아는 놈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다.
“차가 훌륭하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아멜리에게 묻자 아멜리도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대주교님께서 이렇게 차를 잘 타시는지는 몰랐네요.”
아멜리의 칭찬에 대주교의 안색이 밝아지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렇지요? 제가 차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탑니다.”
소피아가 금고를 터는 걸로 보아 분명 대주교의 비리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털었을 거다.
그럼 분명 그 증거도 이미 소피아의 소꿉친구인 아멜리의 손에 들어갔을 터다.
아멜리는 그리 자비로운 성격이 아니니 어지간해선 아멜리의 ‘자칭’ 신벌을 피하기 어려웠다.
해고를 앞둔 머리숱 적은 중년이 희망을 가지는 모습이 딱하고 안쓰러웠다.
차 맛이 좋은데, 다시는 맛볼 일 없겠군. 지금 음미해 두자.
“그런데 손님께서는 유적지로 들어가는 출입 허가증을 빌리고 싶으시다고요?”
아멜리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차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원래는 쥴리아 씨가 속한 상회의 탐사단의 것을 대여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모두 유적 안에 들어간 모양이라서요.”
상회라는 말에 아멜리와 대주교의 시선이 내 옆에 앉은 부지점장에게 향했다.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부지점장은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자리에 어스름 상회를 모를 만한 사람은 없었지만, 눈알 굴리는 걸 보아하니 아직도 아멜리와 로툴러스가 누구인지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쯧쯧, 승진하기에는 부족한 사람이구만.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데, 친절하게도 허가증의 여유가 되는 곳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신다고 하셔서 이렇게 염치 불고하고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내 부드러운 말에 아멜리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물었다.
“허가증은 왜 필요하신가요?”
당연히 저 안에 있는 미발굴 보물들을 싹 털어버리기 위해서지.
“글쎄요, 왜냐고 물으신다면 그곳에 유적이 있으니까? 철없는 생각이지만 유적도시라 불리는 바하나드에 방문했다면 한 번쯤 내부를 살펴봐야지 않겠습니까.”
가볍게 웃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좋은 보물이나 역사적인 유물을 발견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요.”
나는 철없는 도련님처럼 연기했다.
“어머? 미래의 대탐험가셨군요.”
아멜리는 웃으며 넉살 좋게 말했다. 비꼬는 듯 들릴 수도 있는 말을 그런 기색 없이 말하니 마치 진심처럼 들렸다.
위험한 종교쟁이군.
“그래도 유적은 위험하다고 하던데 대비는 잘해 두었나요?”
“나름 준비한다고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아버지께서 마법사와 기사를 고용해 주시긴 했어도 용병도 구하긴 해야 할 것 같긴 해요.”
나는 용병을 말하면서 로툴러스를 흘긋 바라봤다.
“그러고 보면 신도분을 보고 갑자기 떠올랐는데, 그 유명한 용병왕도 앵무새 수인이라 했었죠.”
내가 슬쩍 찔러보자 로툴러스는 살짝 움찔했다.
“어흠, 그, 앵무새 수인이라고 용병왕이라고, 음, 생각하진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하하하, 당연하죠. 그래도 같은 용병이자 앵무새 수인으로서 자랑스러우시죠?”
로툴러스는 다시 한번 움찔했다.
“내가 용병인 건 어떻게 알았지?”
그의 물음에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다과를 집어 들며 대답했다.
“별건 아닙니다. 발목을 단단히 지탱하는 가죽 장화는 오래 걷는 여행화나 군화로 애용되죠. 거기에 허리에 맨 벨트 왼쪽에 유독 쓸린 자국이 있는데, 쓸린 면적으로 보아 오랫동안 검을 메고 있었던 듯 보이네요. 오른손잡이신가 보죠?”
내가 그의 오른손을 보고는 웃었다.
“검을 오랫동안 쥐셔서 그런지 굳은살이 깊군요. 전투를 생업으로 하시는 모양이십니다.”
“오.”
로툴러스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멜리가 물었다.
“그 정황으로는 용병뿐만 아니라 기사, 병사, 여행가도 충분히 추측 가능하지 않나요? 여행에 호신을 위한 검 한 자루는 필수품이라고 하잖아요.”
그녀의 지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죠. 하지만 윗옷 어깨와 옆구리의 윤곽을 보면 깃털이 눌려 살짝 꺼진 게 보입니다. 넓이로 보아 흉갑으로 보이는데, 여행자가 갑옷까지 입고 다니지는 않죠.”
갑옷을 입고 다니는 놈은 여행이 목적이 아니다. 용병패가 없으면 분명 검문에 걸린다.
“그리고 어깨 눌린 것보다 옆구리가 더 눌린 것으로 보아 철제는 아니고 가벼운 가죽제인 것 같군요.”
무더운 여름이라 옷이 얇아 살짝 비쳐 옆구리 깃털이 눌린 게 보였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앵무새라 그런지 전신이 깃털로 뒤덮여 있었다.
철제 갑옷이라면 끈으로 묶어도 그 무게 때문에 어깨가 더 눌리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기사는 아니군요. 그렇다면 병사 혹은 용병인데, 사제님께서 중요하신 신도라 하셨으니 명망 높으시거나 강한 힘을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병사를 하고 있지는 않겠군요.”
아멜리는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별말씀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제가 보기에는 바다 교단에서는 제게 허가증을 빌려주시지 않을 것 같군요.”
내 말에 아멜리는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손님께서 바다의 신께 간절함을 증명하신다면 충분히 허가증을 빌려드리는 것도 가능할 텐데요.”
여기서 말하는 간절함은 간단히 말해서 ‘기부’였다. 즉, 값만 잘 쳐주면 빌려주겠다는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애초에 허가증이 2개 모두 있어도 안 빌려줄 거였으면서 하나뿐인 허가증을 빌려줄 리 없지 않은가.
“글쎄요, 제 개인의 간절함이 바다 교단의 ‘행사’를 앞서기 힘들다고 보는데요.”
“행사요?”
“여기 쥴리아 씨의 말로는 바다 교단에선 급하게 탐사단을 도시로 불러들였다고 하더군요. 하나도 아니고 두 탐사단 모두 돌아왔다면 대신 들어갈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죠.”
나는 그녀와 앵무새 수인을 번갈아 보며 웃었다.
“마침 이곳에는 대주교님보다 상석에 앉아 계신 성도에서 오신 사제님과 그 사제님이 중요한 신도라 하신 용병분께서 계시니, 누가 들어갈지는 뻔히 보이네요. 탐사단이 정비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귀환한 거라면 제가 아무리 큰 성의를 보인다고 해도 무리일 겁니다.”
내 추론에 아멜리는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대단하시네요.”
“대단할 건 없습니다. 그저 주어진 정보를 짜 맞추다 보면 누구나 알 법한 이야기니까요.”
아멜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부지점장에게 향했다.
부지점장은 저쪽에 보이지 않게 무릎 사이로 손을 넣고 빈손을 움켜쥐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분노하고 있는 게 뻔히 예상되었다.
자연스럽게 내 정보원을 알렸으니 이걸로 어스름 상회는 내가 허가증을 훔친 사실이 들키지 않게 최선을 다해 움직여야 했다.
굳이 이곳까지 온 목적 중 하나를 이뤘다.
“그럼 굳이 왜 약속을 잡고 만나러 오셨나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원래 노리고 있던 건 2장이나 되는 허가증에 몇 자리 얻어 가는 거였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적에게 목줄을 쥐여주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위도 없지 않은가.
“원래라는 건 지금은 다르다는 건가요?”
“예, 자리가 40명이나 되었을 때는 두세 자리 정도야 성의 표현으로 어떻게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을 겁니다.”
아니, 내가 추측하는 아르카나의 목적이 내 목표물과 겹친다면 유적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들은 전력 하나하나가 아쉬울 테니 가능성 따위 없었다.
애초에 내가 허가증을 하나만 훔친 것도 아멜리의 병력을 깎아내기 위해서였다.
두 개 다 잃어버린다면 시정부와 협상해서 발을 잠시 묶어둘 순 있었겠지만 결국 새로이 허가증 두 장을 얻어 유적으로 들어갈 터였다.
하지만 하나가 남는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당장 급하지 않으니 협상이 불가능하거나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자리가 20명이 되었다면 이야기가 다르죠.”
내 말에 아멜리와 대주교의 기세가 일변했다. 대주교는 옳다구나 하며 당장이라도 내게 쏘아붙이려 했지만 아멜리가 살짝 손을 들어 말렸다.
“그 정보도 쥴리아 씨, 어스름 상회에서 얻은 정보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부지점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했다. 쯧쯧, 이럴 때는 여유롭게 웃어야 일류인 것을.
“그렇습니다. 여기 오기 바로 몇 분 전에 들었죠. 그래서 원래 목적을 두 가지로 바꿨습니다.”
“두 가지나요?”
“예, 하나는 저를 의심하고 여러분께 제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주교가 테이블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네놈이 아니면 누가…!”
“대주교님.”
대주교의 고함을 끊는 나지막하고 서늘한 목소리에 대주교는 흠칫 놀라며 아멜리의 눈치를 봤다.
“손님께서 말씀하시잖아요. 신께서 말씀하시길 경청은 곧 인내이자 믿음이라 하셨습니다. 헌데 대주교님께선 인내가 부족해 보이십니다.”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대주교의 사과에도 아멜리는 가볍게 무시하며 내게 계속 이야기하라 권했다.
“대주교님께서 과민하게 반응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유적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 도시 밖에서 왔는데, 하필 허가증이 하나 사라졌으니 의심할 만하죠. 그렇기에 저는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왔습니다.”
“확실히 안 왔다면 이안 씨를 더 의심했을 겁니다. 애초에 훔칠 거였으면 빌려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약속 같은 건 잡지도 않았을 테고요.”
그렇게 말했지만 아멜리의 눈은 아직도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다른 한 가지 목적은 뭐죠?”
그녀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었다.
“사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허가증에 대해 대지 교단과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다행히 그쪽에서는 제 제안이 나쁘지 않았는지 허락해 주더군요.”
내 말에 아멜리는 놀라서 날 바라봤다.
“대지 교단에게서 허가증을 얻으셨다고요?”
믿을 만한 곳에서 이미 허가증을 얻었다는 말에 의심이 사그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말인데, 유적지에서 중간까지라도 함께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녀에게 당당히 제안했다.
“마침 절 호위해 줄 사람들을 구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너 내 버스 기사가 돼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