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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175화 (175/214)

제175화. 별자리를 거니는 히치하이커 (1)

바다 교단의 대주교실에서 성녀 아멜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허가증이 하나 없는 거죠?”

당장 소란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대성당의 수뇌부는 혼란에 빠졌다. 아멜리가 유적에 들어가기 위해 유적지에서 회수해 온 출입 허가증 중 하나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은은하게 깔리는 분노 어린 신성력에 바하나드 대성당의 대주교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 그제까지만 해도 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대주교의 변명에도 아멜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전에 있었던 건 중요치 않아요. 지금 없다는 게 중요하죠. 도대체 관리를 어떻게 한 거죠? 대주교께선 유적의 중요성에 대해 모르시는 건가요?”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대주교는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신화시대의 끝남과 동시에 그 잔재가 짙게 남은 유적은 굉장히 중요했다.

신화시대의 유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적, 마법적 가치가 높았지만, 일곱 교단의 입장에서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란 점에서 더더욱 귀중했다.

“알고 있는데도 허가증을 도둑맞았단 말이에요?”

아멜리의 추궁에 대주교는 죽을 맛이었다.

허가증과 함께 금고 안에서도 비밀리에 만든 공간에 숨겨놓았던 자신의 비리의 증거가 될 만한 문서와 물증들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혹시 성녀가 먼저 자신의 비리를 알고 선수를 친 게 아닐까?

비리만으로는 확실히 죽이지 못할 것 같아 확인 사살하듯이 허가증까지 숨겨 분실의 죄까지 물으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대주교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사실 성녀는 대주교를 추궁할 만한 직위는 아니었다.

성인(聖人)이라는 위치는 신이 직접 성흔을 내렸기에 교황보다도 고귀했다.

하지만 그게 곧 교단에서의 권력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귀하기 때문에 세상의 풍파로부터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교내(敎內) 정치에서 배제하고 모셔놓기만 했다.

일곱 교단의 성직자들은 신을 숭배하며 신이 내린 힘을 구사했다.

하지만 교단이란 집단은 결국 인간이 쌓아 올린 것이기에 권력을 신과 나누려 하지 않았다.

역대 성인들 또한 교단이 쌓아온 것을 부정하지 않았기에 그 뜻을 존중해 왔다.

그러나 당대 바다 교단의 성녀 아멜리는 달랐다.

필요하다면 정치에 끼어들었고, 사제들의 부정부패를 처단했다.

교단의 권력층인 몇몇 사제들은 전통을 어기는 것에 반발하기도 했으나, 반발하고 나선 고위 사제들에게 성녀가 신의 이름으로 천벌을 내리자 그 뒤로 반발은 사라졌다.

천벌을 받은 사제들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저 평생을 갈고 닦아온 모든 신성력을 잃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제들에게 있어선 끝 모를 공포였다.

신성력을 잃은 사제는 더 이상 사제가 아니다.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던 그들은 모든 것을 잃고 평교도 신분으로 추락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신벌에 모든 사제가 벌벌 떨며 그녀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작금의 성녀는 바다 교단의 교황보다 더한 힘을 지닌, 그야말로 ‘여교황’이나 마찬가지였다.

“후우…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죠.”

아멜리의 차가운 시선에 대주교는 흠칫 떨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대주교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사라진 허가증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유적 안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던 그녀에게 허가증이 필요했다.

하나 남았으니 괜찮지 않으냐 싶을 수 있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하나의 허가증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인원수는 총 20명.

저 위험한 유적지에 들어갈 때 준비한 전력(戰力)의 절반도 운용하지 못하는 건 치명적이었다.

허가증이 사라진 것을 안 아멜리는 처음엔 소피아를 의심했다.

금고에 몰래 들어갔다 나온 건 확실했으니까.

하지만 이내 그 의심을 접었다.

소피아는 허가증을 훔칠 만한 동기도 없을뿐더러, 금고에 보관 중이던 성수가 사라졌다는 걸로 보아 다른 침입자가 있던 게 분명했다.

대지 교단의 신성력을 사용하는 소피아에겐 바다 교단의 신성력은 방해만 될 뿐이었다.

“어떤 것 같나요?”

아멜리가 자신을 따라온 로툴러스에게 묻자 앵무새 수인은 귀중품 보관실을 떠올리며 말했다.

“음, 허가증을 가져간 범인은 못 해도 2인조. 복잡한 환풍 통로의 길을 통해 침입한 걸로 보아서 성당 내부를 잘 아는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겠군.”

실제로 귀중품 보관실 천장의 환풍구에서 밧줄에 강하게 쓸린 자국과 환풍 통로에 쌓였던 먼지가 쓸려나간 흔적이 선명했다.

“마력 반응 경보의 반응 없이 밧줄로 오르내린 걸로 보아 한 명은 근력이 뛰어난 사내, 다른 한 명은 몸이 가벼운 소년 혹은 여인이겠어. 그리고 보안 장치를 건들지 않은 걸로 보아 내려온 범인은 마력 감지에 뛰어나거나 마법에 뛰어난 식견을 지녔겠고.”

은밀하게 숨겨진 보안 마법을 간파하려면 보통 감각으로는 불가능했다.

“그 외에는 잘 모르겠군. 미안하다.”

로툴러스의 사과에 아멜리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 정도만 알아도 큰 수확인걸요. 그렇죠? 대주교님.”

그녀가 대주교를 부르자 늙은 사제는 몇 가닥 없는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바짝 얼었다.

“예…! 그, 그렇습니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실망시키지 마세요.”

“예!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아멜리는 군기 바짝 든 신병처럼 긴장한 대주교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두 개 모두 사라졌다면 시간이 약간 걸리더라도 시정부와 협상해서 임시라도 여분의 허가증을 얻어볼 텐데, 애매하게 하나만 남아서 협상도 못 하게 되었다.

바하나드를 통치하는 도시 정부와 왕실 입장에서 허가증은 도시에 모인 거대 집단을 통제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기에 잘 내어주지 않으려 했다.

설마 노린 건가? 알 수 없다.

하지만 상황이 절묘하다 보니 의심이 가는 건 사실이었다.

“앗!”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는 그때 대주교가 무언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어스름 상회에서 저희 허가증을 대여하고 싶다는 고객이 있다며 한번 만나달라고 했었습니다!”

“…그걸 만나주기로 하셨다고요?”

아멜리의 물음에 대주교는 다시 얼어붙었다.

“진짜 대여해 줄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저 만나만 주면 거절해도 된다고 하길래….”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스름 상회에게서 뇌물을 받아서 만나 주기로는 했지만 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확답을 받았었다.

“그럼 그 고객이란 분들이 수상하군요.”

“예! 그, 그렇습니다! 분명 그 고객이란 녀석이 훔친 게 분명합니다!”

단정 짓는 대주교를 아멜리는 싸늘하게 바라봤다.

마침 허가증이 사라진 시점에 대여를 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수상하긴 했지만, 반드시 범인이라 할 순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대놓고 만나길 희망하는 걸로 봐선 아닐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대주교는 어떻게든 범인을 만들어서라도 사태를 모면해야 했다.

“그 고객이란 분은 언제 만나기로 했죠?”

아멜리의 물음에 시계를 확인한 대주교는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지 놀라며 대답했다.

“이제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그렇게 말하기 무섭게 대성당 소속의 수습 사제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저… 대주교님. 대주교님을 찾아온 손님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대주교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멜리가 대신 대답했다.

“바로 만나겠어요. 이곳으로 안내해 주시겠어요?”

성녀의 부탁에 수습 사제는 황송해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예! 바로 데려오겠습니다!”

어리숙해 보이는 수습 사제는 허둥대며 달렸다.

* * *

“…정말 아니시죠?”

어스름 상회 바하나드 지부 부지점장은 떨리는 불안한 눈으로 내게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나는 일부러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바다 교단의 허가증이 사라졌다는 말도 방금 당신에게 처음 들었다.”

그러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바다 교단의 허가증이 하나 사라졌다면 대여는 더 힘들어지겠군.”

곤란하다는 내 말에 부지점장의 표정은 더욱 혼란스러워 보였다.

역시나 날 의심한 모양이었다.

그래, 더 혼란스러워하고 최선을 다해서 날 보호해! 결국 날 보호하는 수밖에 남은 길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잖아?

나는 속으로 키득거리며 프레시아를 흘끔 바라봤다.

연기를 못하는 프레시아는 아예 천변가면으로 얼굴을 무표정으로 고정한 채 침묵했다.

은하의 눈으로 가면의 환상을 뚫고 보니 프레시아는 혹시라도 내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불안한 듯 안절부절못하며 동요가 그대로 나타났다.

대성당을 털고 나서 당당히 대성당에 들어가는 게 그렇게 불안한가?

그래도 다행히 가면의 힘과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어색함이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다음에 이런 일이 있으면 야드나 제이드랑 움직여야겠다.

“일단 만나보기는 하지.”

내가 앞장서라고 손짓하자 부지점장은 별수 없다는 듯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부지점장은 앞장섰다.

앞장서고도 계속해서 흘끔흘끔 날 보는 게, 여전히 나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두진 못한 모양이었다.

“뭘 봐?”

그래, 내가 훔쳤다! 의심하면 어쩔 건데? 정보를 판 시점부터 공범이 되어 버렸으니 네가 철저하게 내 정보를 숨기는 것 외에 뭘 할 수 있는데?

꼬우면 사방에 알리고 지부와 함께 뒈지든지!

“아, 아닙니다.”

부지점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한 번 와봤다고 익숙해진 바다 교단의 대성당에 들어가자 나는 처음 와보는 것처럼 신기함을 가장하며 두리번거렸다.

대성당을 방문한 신도들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사제들 사이에선 왠지 모를 술렁임이 느껴졌다.

상층부에선 꽤나 소동이 벌어진 모양이구만.

부지점장은 어수룩해 보이는 수습 사제와 잠시 이야기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접견 허락이 떨어졌다.

수습 사제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대주교실로 안내받았다.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수습 사제의 긴장된 외침에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부지점장이 앞서 안으로 들어가고 나와 프레시아는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바다와 같은 청량한 신성력이 감도는 넓은 방 중앙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금발의 아름다운 소녀가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머리숱이 적은 장년의 사제와 알록달록한 깃털의 앵무새 수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르카나 02, 여교황’ 바다 교단의 성녀, 아멜리.

‘아르카나 07, 전차’ 오색의 용병왕, 필리드라이온 로툴러스.

역시 내 예상대로 유적을 탐사하던 바다 교단의 탐사대를 불러들인 이유가 아르카나 때문이었다.

굳이 소피아의 협조로 대지 교단의 허가증을 확보하고도 굳이 살피러 오길 잘했다.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앉으시죠.”

대주교가 있는데도 가장 어려 보이는 소녀가 상석에 앉아서 앉을 것을 권하자 부지점장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녀의 위치와 신상에 대해선 각 교단의 최고 기밀이었으니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쯧쯧, 그렇다고 해도 당황해서 얼 타다니. 부지점장보다는 높게 못 올라가겠구만.

“이렇게 만남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주교님, 그리고….”

내가 일부로 대주교에게 먼저 인사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아멜리와 로툴러스를 흘겨보자 대주교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지금 무스…!”

“아, 약속된 자리에 갑자기 끼어들었네요. 실례가 될까요?”

아멜리는 대주교의 말을 자르며 내게 물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대주교님을 제치고 상석에 앉아 계신 분께서 자리하신다면야 저야 영광이지요.”

내 대응에 아멜리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저는 성도(聖都)에서 온 바다 교단의 사제 아멜리라고 합니다. 이분은 저희 교단의 중요한 신도분이세요.”

로툴러스가 믿는 종교는 달의 여신의 하위신인 전쟁과 공포의 신일 텐데?

칼밥 먹는 용병이 믿는 건 주로 달의 여신의 하위신인 전쟁과 공포의 신이나 대지의 여신의 하위신인 생명과 재생의 신이었다.

어느 쪽이든 칼질할 때나 다쳤을 때 믿기 좋으니 용병에게 인기였다.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중요하신 분이시라면 얼마든지 계셔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없으면 곤란하다.

“저는 ‘이안’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호위지요.”

내 소개에 아멜리는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안 씨.”

그래, 만나서 반갑다. 어디 한번 그 속내를 읽어보자.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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