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유적도시 (12)
내가 왕자 유안의 몸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나는 왕궁 곳곳에 숨겨진 보물들을 손에 넣기 위해 움직였다.
내 옷 안에 숨어 있는 바람의 정령인 나비나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아퀼라의 마도서, 달랑타의 식자재 창고 등 꽤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대지의 여신과 엮일 만한 건 왕궁 내부에 있는 대지 교단의 왕궁 성당이었다.
성당의 신상 발받침 부분에 숨겨져 있던 ‘달리아나의 로사리오’를 확인하기 위해 신상 앞에서 기도하는 척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부디 무사히 성유물을 털어먹을 수 있게 해주십쇼. 그럼 제가 차기 성자를 제대로 키워 드리겠습니다. 차기 성자에게 로사리오는 못 줘도 성인의 지팡이든, 화신의 유해든, 잊혀진 성소든 얻는 걸 최대한 도와줄 테니까 좀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당신이 믿는 신, 너무 양심이 없는데?”
결국 달리아나의 성유물은 내가 아까운 마석까지 사용하며 직접 털어먹었다.
대지의 여신이 도와준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날 부려 먹으려 하다니.
내 신성 모독적인 발언이 계속되자 데일호르그는 이를 악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프레시아는 그에 대응하기 위해 빈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아공간에서 언제든 검을 꺼내 뽑을 준비를 했다.
분위기가 급격히 험악해지는 와중에도 대지 교단의 성녀 소피아는 싱글벙글 미소 지었다.
“이야~! 정말 다행이에요. 제 직감을 믿긴 했지만, 정말로 당신이 신탁의 ‘운명의 밖을 걷는 자’라는 확신은 없었거든요.”
그녀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지금은 확신한다는 말인가?”
“검증 방법이 있다고 말했잖아요. 사실 제가 받은 신탁에는 뒷부분이 있어요.”
뒷부분이 있다고?
확실히 신탁이 짧은 느낌은 있었다.
아무리 신이 현세에 간섭하는 데 제약이 있고 신화의 잔재가 소모된다고 하더라도, 신탁을 내리는 건 지상에 경고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다.
그런 만큼 지나치게 짧거나 꼬아버려 해석이 잘못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 분량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는 부탁을 듣거든 분개하며 나를 모독할지어다. 허나 밑이 어두웠음을 알고 고마움을 아리라.”
이어지는 신탁에 나는 피식 웃었다.
“본인도 자기가 양심 없는 부탁을 했다는 건 알고 있네.”
내 말에 데일호르그가 분개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아저씨! 진정하세요! 모두 신탁대로니까 화내실 것 없어요!”
소피아는 그런 늙은 성기사를 진정시켰다.
나는 그런 두 사람에게서 신경을 끄고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밑이 어두웠다?
그리고 내가 고맙다고 생각하게 될 거라고?
신탁의 시제(時制) 표현이 과거형이라는 건 이미 일어난 사건을 의미할 거다.
그리고 ‘약속’의 주체는 나와 대지의 여신, 그리고… 성녀인가?
아니, 지난 사건에 대해 내가 고맙다고 느끼게 된다면 약속의 주체에 소피아는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대지의 여신이 날 위해 현세의 무언가에 간섭했고, 그건 ‘약속’을 나눈 시간이나 공간 또는 행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을 거다.
그렇지 않다면 ‘약속’을 들먹일 이유가 없을 테니까.
가능성 있는 건 왕궁 성당인가.
그러고 보면 달리아나의 로사리오가 피난처를 유지하는 핵의 역할을 했었고, 핵을 빼내면서 여신상이 무너져 버렸다.
여신상이 무너질 정도면 피난처에도 크게 영향이 갔을 가능성이 있다.
피난처나 여신상에 내가 놓친 게 있었나?
그래서 대지의 여신은 그 놓친 게 망가지거나 하지 않게 여신상의 무너짐에 간섭했고?
다른 곳도 아니고 신의 영역인 성당인 데다 성녀 달리아나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던 곳이니 간섭하는 것은 가능할 거다.
그저 추측에 불과했지만 만약 그렇다면 대지의 여신이 이렇게 뻔뻔히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당시의 난 마법도 사용할 수 없었고, 정령을 다루는 것도 미숙했으니까 놓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으음… 모르겠네.”
“뭐가요?”
소피아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었다.
“대지의 여신이 내게 사기를 치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고마워할 일을 했는지 말이야.”
“이자가 감히!”
늙은 성기사는 분노하며 습관처럼 손을 허리춤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그의 검은 성녀의 손에 있었다.
“데일호르그 경! 지금 신탁을 집행하는 중입니다! 어찌 이리 무도하십니까!”
소피아가 테이블을 내려치며 호통쳤다.
그녀가 신성력을 내뿜으며 데일호르그의 살기를 제압하자 늙은 성기사가 주춤했다.
동시에 그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지금 신탁은 정식적으로 교황과 교황청의 제단을 통해 내려온 게 아닌 것 같았다.
하기야, 정식적으로 신탁이 내려왔으면 성녀와 일기당천 단둘만 이곳에 왔을 리 없다.
비밀을 요하는 내용이었어도 정체를 숨긴 고위 사제가 열 명은 왔겠지.
그러니 데일호르그는 소피아가 말한 신탁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는 와중에 내가 신성 모독적 발언을 계속하니 분노할 수밖에.
억울할 만했다.
내 알 바는 아니었지만.
“신탁에 대해선 알겠어. 내가 신을 모독할 거라고 한 걸 보면 아마 대지의 여신도 내 성격을 알고 있단 말이니 사기 치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예 의심이 가신 건 아니지만 말이다.
대지의 여신도 내게 사기 쳤다가 뒤늦게 들통났을 경우 내가 어떤 짓을 벌일지 정도는 알고 있을 거다.
일곱 교단에, 특히 대지 교단을 재기 불능으로 만들 피해를 입히는 것쯤은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 여파로 작은 나라 한두 곳 정도는 망하겠지만.
“뭐, 좋아. 어차피 그 약속은 여건이 되면 지킬 생각이었으니 신탁대로 하지.”
내 말에 소피아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감사 인사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한 약속이 뭔지는 알고 감사하다고 하는 거야?”
“아니요. 그저 신의 뜻이 이루어졌으니 제 숙제는 다 끝낸 셈이잖아요?”
“아닌데? 네 숙제는 이제부터 시작인데?”
“예?”
당황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대지의 여신이 널 많이 사랑하나 봐. 굳이 신탁까지 내린 걸 보면 말이야.”
“무슨 말인가요?”
신탁에서 말한 약속의 ‘주체’가 나와 대지의 여신이라면 약속의 ‘객체’는 엄밀히 말해서 대지 교단의 ‘성녀’가 아니다.
나는 분명 ‘차기 성자’가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다.
성녀가 아니라 성자다.
소설대로라면 대지 교단의 성녀, 소피아는 자신의 초직감 때문에 양자택일의 미래를 직감하고, 스스로를 희생하여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
내가 일행으로 스카우트하려던 사제는 성녀의 죽음과 동시에 새롭게 성흔을 물려받을 차기 성자가 되는 꼬맹이였다.
나는 소피아의 물음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신탁의 대상이 내가 맞는다면, 내가 한 약속의 대상은 네가 아니라 네 다음 세대였어. 하지만 대지의 여신은 굳이 다음 세대가 탄생하기 전인 지금, 네게 신탁까지 내려가며 나와 널 만나게 했지.”
“그 말은 즉, 풍요로운 대지께선 제가 그 약속을 대신 하시길 바라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긍정에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한 교단의 성자나 성녀는 단 한 명뿐. 그녀가 살아 있는 한 다음 세대란 존재할 수 없다.
즉, 그녀는 죽음을 선고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의 신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확신했다.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면 적어도 소설처럼 죽진 않을 테니까.
물론 내 여행이 안전하다는 건 아니었지만.
“내 해석으로는 그렇다는 거지, 아닐 수도 있어. 굳이 네가 아니어도 나는 약속을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
“제 선택에 달렸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나로서는 그녀든 그녀 다음으로 성흔을 물려받을 꼬맹이든 상관없었다.
그나저나 성녀 소피아가 죽지 않는다면 그 꼬맹이는 성자가 될 순 없겠군.
“…혹시 그 약속을 제가 이행한다면 제가 당신과 함께 움직여야 하나요?”
역시 감이 좋다.
“성녀님!?”
소피아의 물음에 데일호르그가 놀라서 소리쳤다.
성녀는 늙은 성기사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연히 나를 응시했다.
그 깊은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신탁을 핑계로 무슨 목적이 있어서 내게 접근한 게 아닌가 경계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와 함께 여정을 떠나야 하지.”
“그렇군요.”
“미리 말해두는데 내 여행은 위험할 거고, 때로는 비겁해져야 할 거야. 또, 눈앞의 불의에 시선을 돌리고 침묵하거나 악행을 해야 할지도 몰라. 단언하는데, 나는 정의를 추구하지 않아.”
내 경고에 소피아는 잠시 침묵하더니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했습니다.”
“성녀님!”
소피아의 말에 데일호르그는 놀라서 그녀를 만류했다.
“갑자기 오늘 처음 보는 남자를 따라가시겠다니요! 안 될 말씀이십니다!”
늙은 성기사의 다급한 외침에 성녀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 존경하는 어머니이시자 저의 주인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는 게 풍요로운 대지의 과분한 사랑을 받는 딸이자 종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의무잖아요?”
“그것도 그냥 그럴 거다라고 직감으로 때려 맞히는 거잖습니까!”
그의 외침에 소피아는 키득거렸다.
“좀 더 고상하게 성녀로서 ‘운명을 느꼈다’고 표현하자고요.”
확고한 대답에 데일호르그는 골치가 아픈지 머리를 싸매었다.
“…교황 성하께는 뭐라 말씀하시려고요?”
“그거야 아저씨가 고민해야죠.”
“예?!”
소피아는 골치 아픈 일을 모두 늙은 성기사에게 떠넘기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같이 여행하는 동료가 되었는데 아직 이름도 모르네요. 다시 인사드리겠어요, 소피아입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아 악수하며 대답했다.
“유안이다. 지금까지 다소 무례하고 신성 모독적이었던 말은 사과할게.”
내 사과에 소피아는 싱긋 웃으며 괜찮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이쪽은 내 호위 기사.”
“프레시아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프레시아는 내가 소피아를 일행으로 받아들이자 완전히 경계를 풀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머! 잘 부탁드려요! 프레시아 경과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나와 프레시아, 그리고 소피아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본 데일호르그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지 손으로 머리를 짚은 채 비틀거렸다.
“이건 악몽이야. 난 몰라, 이걸 어떻게 해야 하냐고….”
반쯤 현실 도피를 하기 시작한 데일호르그를 무시하고 소피아에게 말했다.
“성녀로서 대접은 기대하지 마. 내 동료가 된다면 그냥 사제인 소피아일 뿐이니까.”
내 말에 소피아는 오히려 기뻐했다.
“저야말로 원하는 바에요.”
그러고 보면 성자와 성녀는 추기경들이 선출하는 교황과 달리 신이 직접 고르다 보니 직위에 갇혀 갑갑해한다고 했었나?
허영심이 많거나 선민사상이라도 있었다면 어려서부터 받아오는 시선을 오히려 즐기거나 할 텐데, 신이 아무나 뽑는 건 아닌지 대체로 소탈한 편이었다.
물론 대체로 그렇다는 거고 아닌 경우도 꽤 있었지만 말이다.
“자, 그럼 동료 소개는 천천히 하기로 하고, 일단 도움부터 받아볼까? 대지 교단에 유적으로 들어가는 허가증 하나 있었지?”
여분의 허가증이 있으면 여차할 때 일행을 둘로 나누어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다.
게다가 알리바이 공작을 하기 딱이었다.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소피아는 악동처럼 따라 웃었다.
“물론이죠.”
성녀와는 생각보다 잘 맞을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