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유적도시 (11)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대지 교단의 성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도믿걸은 너무 낡은 방식 아닌가.”
“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소피아는 눈을 껌벅거리며 날 바라봤다.
“아니, 혼잣말이야. 꽤나 고급스러운 원단을 사용한 사제복인 걸 보면 높은 위치의 사제님인 거 같은데 내게 무슨 볼일이지?”
혹시 어제 바다 교단의 금고를 털어서 그런가?
그건 서로 모른 척 넘어가기로 합의한 거 아니었나?
아니, 그 전에 내 얼굴은 모를 텐데.
내 물음에 소피아는 악동 같은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말씀드렸잖아요, 인상이 좋아서 좋은 말씀 드리고 싶다고.”
좋은 말씀이라니, 굉장히 사이비 같은 말이었다.
그 미소에 나는 그녀의 의중을 추리했다.
일견 장난스러워 보이지만, 초직감을 지닌 그녀가 하는 말에는 때때로 뼈가 담겨 있었다.
정작 본인은 그 말속에 담긴 뼈를 모르고 그냥 말할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무시할 순 없었다.
“필요 없다면?”
“끄응,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오히려 이렇게 접근하는데 경계하지 말라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어깨를 으쓱인 소피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배시시 웃으며 주머니에서 진한 신성력이 담긴 성수를 꺼냈다.
한눈에 봐도 돈 주고 구할 수 없는 최상급 성수였다.
“잠깐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이걸 드릴게요.”
더욱 수상해지는데.
“좋아.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하지만 수상하다고 거절하기엔 너무 귀한 물건이었다.
이 아가씨 거래 좀 할 줄 아는구만.
어제 바다 교단의 금고에 있던 성수를 나중에 확인해 보니 9할이 중급이었고, 1할이 상급이었다.
대성당치고는 상급의 비율이 낮았지만, 대성당의 우두머리인 대주교가 부패한 것치고는 높은 비율이라 할 수 있었다.
성수 자체는 많이 쓸어 담았어도 귀한 정도를 따지면 도믿걸, 아니 소피아의 손에 들린 성수 한 병이 조금 더 값나갔다.
“그런데 저 뒤에 숨어 있는 분은 보호자이신가?”
“응? 누가 숨어 있나요?”
천연덕스러운 되물음에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 여자, 일류다.
몸짓, 시선 처리, 하다못해 분위기까지 이렇게 자연스러운 거짓말쟁이는 오랜만이다.
그야말로 타고난 사기꾼이었다.
“그렇다면 스토커인가 보군.”
내가 씨익 웃으며 눈짓하자 프레시아는 차분히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길모퉁이에서 허리에 검을 찬 노인이 한숨을 내쉬며 나왔다.
“스토커는 아니라네. 몰래 숨어서 미안하게 됐군.”
심장을 보호하는 수준의 작은 흉갑뿐이었지만, 신성력이 빛나는 게 보통 갑옷이 아니었다.
신성력도 누가 축복을 건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갑옷에 부여하는 형태였다.
탄탄하게 단련된 육신을 지닌 늙은 성기사가 대지의 성녀를 지킨다면, 저 노인이 그 유명한 일기당천(一騎當千) 데일호르그인가.
“아니! 아저씨, 거기서 나오시면 어떻게 해요!”
소피아의 힐난에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옆에 있는 프레시아에게 눈길을 줬다.
“장애물이 있으면 아가씨를 못 지킵니다.”
늙은 성기사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소피아는 놀라서 프레시아를 바라봤다.
“그 정도로 강하다고요?”
“그 정도로 강합니다. 아니, 사실 지금도 위험한 것 같습니다.”
늙은 성기사와 프레시아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도련님, 물러나세요.”
나는 프레시아의 말대로 한 걸음 크게 물러나며 그녀의 뒤로 숨었다.
“앗! 레이디의 뒤로 숨다니!”
소피아의 놀리는 듯한 말에 나는 코웃음 치며 넘겼다.
“난 레이디의 말을 잘 듣는 신사거든. 그보다 대화를 나누자며? 혹시 네가 말한 대화가 검이 부딪치고 피가 흐르는 그런 대화를 말한 건가?”
내 지적에 소피아는 별수 없다는 듯이 늙은 성기사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나도 그에 맞춰 프레시아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어깨를 짚었다.
나와 소피아의 신호에 프레시아와 늙은 성기사는 서로 시선을 맞추더니 검을 뽑을 자세를 풀고 거리를 벌렸다.
그새 각자가 지키는 대상을 지킬 수 있으면서도 상대방이 지키는 대상을 공격하기에는 애매한 위치를 암묵적으로 합의한 모양이었다.
“어… 원래 계획은 근처 카페에 가서 차라도 한잔 마시며 느긋하게 이야기하는 건데 분위기가 조금 그러네요. 살벌한 분위기를 풀 방법이 있을까요?”
소피아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숨어 있던 게 잘못이지. 분위기를 풀려면 어느 한쪽이 양보해야 가능할걸.”
“그래요? 그럼 제가 양보하죠. 아저씨! 죄송하지만 잠시 검을 제게 맡겨 주시겠어요?”
소피아의 시원시원한 대응에 그녀의 호위인 늙은 성기사가 당황했다.
“아가씨!”
“괜찮아요. 절 믿고 검을 주세요.”
소피아의 강경한 말에도 데일호르그는 갈등하며 침묵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프레시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북방에 있었을 때만 해도 그녀가 진심으로 투기를 흘려야 초인이란 걸 눈치챘는데, 이제는 자세를 잡고 기도만 살짝 드러내도 초인이 긴장하는 걸 보니 프레시아가 성장한 게 느껴졌다.
보다 완숙해지고 한층 더 초인에 가까워졌기 때문이겠지.
그나저나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대충 대화를 짧게 끝내고 성수나 챙겨 가려 했는데, 성녀가 이렇게 나온다면 말이 다르다.
맨얼굴로 처음 보는 내게 무슨 말이 하고 싶길래 이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프레시아에게 손을 뻗었다.
“너도 검을 내게 줘.”
내 요구에 프레시아는 잠시 망설이더니, 내 시선 끝을 확인하고는 순순히 내게 다가와 자신의 애검인 칠성검을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프레시아는 순순히 검을 포기했지만, 그녀의 아공간 팔찌 속에는 여분의 철검과 창백한 부패가 있다.
내가 신호만 주면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붙어 있어서인지 이제 척하면 척이다.
프레시아도 모른 척 빈 양손을 들어 보였다.
일단 소피아가 적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소피아는 아르카나의 넘버즈 간부인 바다의 성녀와 친분이 두터웠다.
“이게 믿음이란 거다.”
내가 놀리듯 한 말에 소피아는 살짝 분한 듯 뒤를 돌아봤다.
“…아저씨.”
그녀의 간절한 시선에 움찔한 늙은 성기사는 헛기침을 하며 성녀에게 검을 건넸다.
검이 없어도 프레시아와 데일호르그, 둘 다 인간을 초월한 인간 병기인 건 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맨손이라면 나나 소피아도 충분히 대항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도망치는 것쯤은 가능했다.
두 호위의 무장이 해제되자 살벌한 긴장감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럼 요 근처 찻집에서 이야기나 잠깐 할까요?”
소피아가 앞장서서 인적 드문 찻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찻집에는 사람이 없다 못해 가게 주인도 없었다.
“아, 찻집 주인분께서 마침 대지 교단의 신도여서 잠시 빌렸어요.”
소피아는 자연스럽게 찻집 주인이 준비해 뒀을 찻잎을 우려 인원수대로 찻잔에 따라줬다.
느긋하게 차향을 음미한 그녀는 들고 있던 검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장갑을 벗으며 성호를 그었다.
“대지의 축복이 있기를, 풍요로운 대지의 과분한 사랑을 받은 딸, 소피아라고 합니다.”
과분한 사랑, 성흔(聖痕:Stigmata)을 받은 성직자들이 스스로를 낮춰 표현하는 수식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대지 교단의 상징인 일곱 갈래의 뿌리와 한 줄기의 나무가 새겨져 있었다.
성흔이 있는 사제는 한 교단에 많아야 세 명 정도뿐이다.
그야말로 신이 인정한 1등급 도장이었다.
일곱 교단의 성당이 모여 있는 거리라면 성흔에서 흐르는 신성력을 가려줄 수 있으니 거리낌 없이 장갑을 벗은 건가.
“대지의 축복이 있기를. 그래서 대지 교단의 성녀가 나 같은 촌부에게 무슨 볼일이지?”
소피아가 스스로 성녀임을 밝혔음에도 내가 반말을 유지하자 늙은 성기사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것처럼 유쾌하게 웃었다.
“촌부라니요. 너무 겸손하시네요. 제 직감으로는 당신도 보통 강한 게 아닌 것 같은데요.”
“그리 믿을 만한 직감은 아닌 것 같네.”
누구보고 강하다는 거야? 이렇게 빌빌거리는 몸뚱이가 안 보이나?
내 진심 어린 말에 소피아는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봐요. 뭐,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하시는 것 같으니 바로 본론을 말할게요. 얼마 전, 풍요로운 대지께서 제게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신탁? 신이 신탁을 내리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다.
신화에 따르면, 태양신의 아들을 참칭한 ‘목자와 투쟁의 신’이 일곱 신이 내린 일곱 가지 과업을 완수하면서 신화시대의 끝을 고했다.
‘신화’란 신들의 이야기였으니, 신화가 끝난다는 건 더 이상 신들이 이 땅에 이야기를 만들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말은 더 이상 세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지상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해도 세상일이란 게 그렇듯, 편법이 존재했다.
신화시대가 실재했던 만큼 이 땅에 그 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었고, 그 유적에는 신화의 잔재가 서려 있었다.
신들은 그 잔재를 통해 현세와 실낱같은 소통 창구를 만들었으니, 그게 바로 ‘신탁’이었다.
당연히 얼마 남지 않은 잔재를 소모하는 만큼, 신화가 끝난 지 오래된 현재는 신이 직접적으로 말을 건네는 신탁 또한 상당한 리스크를 짊어지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신탁은 휴대전화가 보급되기 전처럼 삐삐 치듯, 극히 짧은 말을 전하거나 현세에 끼칠 영향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기 마련이었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바하나드의 유적인 별자리의 미궁 또한 신화시대의 유적이다.
아무리 대도시라지만 이런 구석진 촌구석에 일곱 교단이 대성당을 지은 이유도 신화시대의 유적 근처에서는 신의 힘을 더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탁의 내용은 ‘이른 시기, 풍요가 깃든 남서쪽으로 가 운명의 밖을 걷는 자에게 약속을 지킬 것을 부탁하라.’였습니다.”
신탁답게 굉장히 모호했다.
위치야 신탁을 받은 시점을 기준으로 한 걸 테니 넘어간다 해도, 운명의 밖을 걷는 자? 약속?
뭔 개소리야?
“그 신탁을 받고 내게 말을 걸었다는 건 내가 ‘운명의 밖을 걷는 자’라고? 그걸 어떻게 아는데?”
내 물음에 소피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했어요.”
“전통적인 방법?”
“예, 고대부터 사용된 유구한 전통인 대충 감으로 때려 맞히는 거죠. 옛날부터 다 그랬어요. 그러다 잘못 해석해서 X되기도 하고 그러긴 했지만요.”
화끈한 표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다소 신성 모독적인 소피아의 말에 데일호르그는 이마를 짚었다.
소피아는 늙은 성기사를 보며 볼멘소리를 했다.
“왜 그래요? 감으로 찍어 맞히는 거 맞잖아요.”
“아니, 본질적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나름 해석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해석이요? 풍요가 깃든 땅은 대체로 신화시대의 잔재가 깃든 곳이라는 거? 그것도 결국 때려 맞히는 거잖아요. 기록 보니까 대성당일 수도 있고, 성자가 태어난 곳일 수도 있고, 유적이 아니라 유물일 때도 있더만요.”
그녀의 말에 늙은 성기사는 침묵했다.
“아, 물론 아무나 대대로 직감을 때려 맞히는 건 아니고 전문으로 찍어 맞히는 직책이 있긴 했죠. 해석 신관이라고, 이번 세대엔 제가 짬 당했거든요.”
“크흠! ‘계승했다’라는 좋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계승이나 짬 당하는 거나 거기서 거기죠.”
나는 툴툴거리는 소피아에게 물었다.
“그래서 내가 신탁의 대상이라고 생각한 건 순전히 그쪽의 감이라는 거지?”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증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요. 그래서 대지의 여신께 약속 같은 걸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신에게 약속? 나 같은 무신론자가 무슨…
“…아.”
갑자기 불현듯 스쳐 가는 기억이 떠올랐다.
“짐작 가시는 게 있으신가요?”
성녀의 물음에 나는 인상을 구겼다.
“아니! 신 주제에 너무 양아치잖아!”
내 신성 모독적인 외침에 데일호르그는 분노했고, 소피아는 환하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