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유적도시 (10)
“…오진 않았구나.”
쾌활한 인상의 미녀를 보자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제이드에게 검마를 마주쳤을 때의 대처법을 미리 가르쳐 줬어야 했는데, 실수했다.
설마 벌써 마주쳤을 줄은 몰랐다.
검선(劍仙) 나유타는 박살 난 문의 파편을 밟으며 외쳤다.
“나와라! 아나스타샤! 이 또라이 년! 나와 승부를 내자!”
누가 누구보고 또라이라고 하는지 모르겠구만.
아나스타샤 하이트필이 검마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듯, 나유타 엘리스필도 검선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하는 꼬라지만 보면 살짝 이해가 안 갈 수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녀의 유쾌한 미소 속에 숨겨진 부드러우면서도 웅장한 기세가 짓누르듯 공간을 장악하자 다들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공격할 듯한 팽팽한 긴장감에 나는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다들 유물들 정리하고, 야드는 밑에 내려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여분의 문과 창문이 있는지 물어봐 줘.”
“알겠습니다.”
내 지시에 긴장하던 일행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나유타를 보며 말했다.
“검마 아나스타샤를 찾는 거라면 번지수 잘못 찾았으니 일단 청소부터 도와주시죠.”
나는 박살 난 현관 벽장에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내 나유타에게 던졌다.
“어? 어어…?”
청소 도구를 받은 나유타는 당황해서 날 바라봤다.
“뭐 합니까? 나무 파편이나 쓸어서 쓰레기통에 넣으세요. 박살 낸 문짝과 창문 값은 나중에 청구서대로 주시고요.”
“…어, 미안.”
내가 빗자루로 창가에 널브러진 유리 쪼가리를 쓸자 나유타도 기세를 줄이고 우물쭈물하며 자신이 박살 낸 문을 치웠다.
문을 박살 내며 거창하게 들어온 것치고는 그리 많이 어질러지지 않아서 치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행히 창밖으로 날아간 창문 유리 파편은 인적 드문 뒤뜰에 떨어져서 다친 사람도 없었다.
“저기….”
“쓰레기통에 안 들어가는 큰 파편은 아예 복도에 내놓으세요.”
“…어, 그래.”
야드의 말을 듣고 올라온 여관 관리인이 상황을 파악하고는 방을 바꿔줘야 하냐고 물어왔다.
나는 굳이 그럴 건 없으니 문과 창문만 달라고 했다.
내 요청에 값비싼 여관답게 금세 문과 창문을 가져와 새로 달아줬다.
원래라면 내쫓겨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귀족 신분증으로 방을 잡으니 적당히 넘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상황이 정리되자 나는 아공간에서 커피 잔과 마법 주전자를 꺼내 물을 끓이며 물었다.
“당신 기감(氣感)에 아직까지 검마가 이곳에 없다는 것쯤은 모를 리 없을 테니 한잔하고 가시죠. 홍차와 커피, 술 중 어느 게 좋습니까?”
“응? 아, …마실 거라면 술이 좋지.”
나도 그렇다.
나는 커피 잔 가득 커피와 설탕, 증류주를 섞은 코레토(corretto)를 따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아, 고마워.”
코레토를 본 나유타는 살짝 놀란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커피에 증류주를 섞어 마시는 건 그녀의 고향에서 주로 마시는 방법으로, 듀플리온 왕국에서는 생소한 방법이었다.
자리에 앉아 따뜻한 술을 홀짝이던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내 눈치를 봤다.
“그… 미안하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깽판 쳐서.”
나유타는 자신이 헛다리짚은 걸 깨달았는지 민망해했다.
그녀의 사과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알면 됐습니다.”
자기소개나 갑자기 문짝을 부순 것에 대한 변명보다도 사과가 먼저였다.
검선 나유타는 검마와 관련되면 흥분해서 앞뒤 재지 못하는 경향이 강해서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그저 민폐를 잘 끼칠 뿐이다.
그래도 검선치고 문짝 하나에 창문 하나면 그렇게 큰 사고를 친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오늘 밤엔 어디서 자야 할지 고민은 안 해도 되니까.
내가 담담히 와인을 홀짝이자 나유타는 내게 관심이 가는지 날 보며 물었다.
“그런데 소년, 날 알아? 보통 내가 흥분해서 난입하면 누구냐고 묻거나 경계하던데 반응이 무던하네.”
말하는 걸 보아하니 검마 때문에 흥분해서 난입한 게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하기야 검선과 검마의 관계는 유명했으니까.
“세상에 검마를 찾으며 난동 부리는 사람이 둘이나 있지 않다면 당신 정체는 하나뿐이겠죠.”
내 대답에 나유타는 부끄러운지 헛기침을 했다.
“크흠! 소년의 예상대로 난 세간에서 검선이라 불리는 검잡이, 나유타 엘리스필이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문을 부순 건 다시 한번 사과하마. 딱히 숨어든 범죄 조직 같은 건 아닌 듯싶으니.”
검선은 마치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나와 내 일행들을 살폈다.
검선은 검마를 쫓고, 검마는 마검을 쫓고, 마검은 십중팔구는 범죄 조직이나 암중세력에 있다.
때문에 검선이 이렇게 난입하면 보통 피바다가 되기 마련이었으니, 그런 경험들이 그녀를 더욱 과격하게 만든 거겠지.
그녀의 사과에 나는 피식 웃었다.
“미안하시면 나중에 제 호위 기사들에게 지도 대련이라도 해 주시든가요.”
내 능청스러운 대답에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가 된다면.”
그러고는 정리를 마친 제이드를 흘끔 보며 말했다.
“소년도 알고 있다시피 나는 아나스타샤를 쫒고 있다. 마검의 잔영이 남아 있던 그 가게에서 같이 있던 녀석의 흔적을 쫓아오게 되었는데, 검마가 어디로 향했는지 아는 바가 있나?”
나유타의 물음에 내가 대신 대답했다.
“방금 쳐들어왔을 때 바닥에 유물들이 널브러져 있었죠? 저는 이 도시에서 쓸 만해 보이는 유물을 사 모았습니다. 그러던 중 저 친구가 마검을 발견하고 처분하기 위해 구매하려는 걸 검마가 가로채 처분했다고 하더군요. 그뿐입니다.”
제이드에게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대충 정황으로 그럴듯하게 지어낸 내 설명에 검선은 날 지그시 바라봤다.
“음, 보통 거짓말을 하면 어지간해서 알겠는데, 소년은 전혀 모르겠네? 보통 이 경우는 평생을 거짓말을 하고 살아왔을 정도로 능통하거나, 거짓말과 아예 인연이 없거나 둘 중 하나인데.”
“어느 쪽 같나요?”
내 장난스러운 눈웃음에 검선은 재미있다는 듯이 호쾌하게 웃었다.
“아하하하하! 적어도 후자는 아닌 것 같군.”
그때 제이드가 나서서 말했다.
“거짓말 아닙니다. 검마께서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마검을 포식하고 바로 사라져 버려서 말이죠.”
“음, 저 소년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알겠군. 평생 정직하게 살아온 느낌이야. 최근에는 약간 아닌 것 같지만.”
나유타의 말에 제이드는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아직 뜨거운 코레토를 단숨에 들이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소년?”
“유안입니다.”
내 이름을 들은 나유타는 창문을 열고 창틀에 발을 올리며 인사했다.
“왠지 멀지 않은 시기에 또 볼 것 같군. 나중에 보자, 유안 소년.”
창밖으로 뛰어내린 검선은 지평 사이로 숨어드는 노을처럼 사라졌다.
테이블 위에는 언제 놓았는지 모를 돈 주머니가 놓여져 있었다.
“두둑하게도 놓고 갔네.”
주머니에는 금화가 가득 담겨 있었다.
* * *
“하암~!”
늦은 아침, 나는 하품하고 침대 위에서 버둥거리며 기지개를 켰다.
어제 지도와 천문도해서를 잡고 씨름하다가 아바스엘이 사 온 것들로 점토 놀이 좀 하다 보니 자는 게 늦어졌다.
마른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리고 거실로 나가자 검을 손질하고 있던 프레시아가 날 반겼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어, 프레시아도 잘 잤어?”
어제 심부름 탓에 저녁 늦게 돌아온 프레시아는 선검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아쉬워했다.
천하십검과 검을 맞댈 수 있는 얼마 없는 기회를 놓쳤으니 아쉬워할 만했다.
검 손질을 마친 프레시아는 내 몫의 아침 식사로 샌드위치가 담긴 종이 상자를 건넸다.
조식으로 나온 건가?
“다들 어디 갔어?”
“길버트와 야드 씨는 아침 훈련 겸 뛰러 갔고, 실루아랑 제이드, 아바스엘 씨는 어제처럼 유물을 사러 갔습니다. 도시 북서쪽에 암시장 성격을 띠는 유물 시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
소설에선 제이드가 들르지 않던 곳이지만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루도스의 돋보기도 있으니 좋은 물건을 건져 왔으면 좋겠네.
나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어제 프레시아와 길버트가 사 온 물품들을 확인했다.
야삽과 곡괭이, 정글도, 밧줄, 고정 핀 같은 야전 물품부터 육포, 쉽 비스킷, 말린 과일 등 비상식량까지 거실이 가득 찰 정도였다.
“아공간 팔찌를 하나 더 줄 걸 그랬지?”
프레시아에게 준 팔찌의 아공간 크기는 고작해야 고시원 방 하나 크기였다.
아공간에 욱여넣었어도 양손 가득 들고 올 수밖에 없을 정도의 분량이었다.
이 정도면 물자 부족으로 유적을 나와야 하는 일은 없겠다.
얼추 탐사 준비는 끝난 것 같다.
“아닙니다. 물건을 잔뜩 샀는데 아무것도 안 들고 다니기엔 조금 눈에 띄지 않았겠습니까.”
“뭐, 그건 그렇지.”
품질이 좋아 보이는 걸 보면 프레시아에게 심부름을 시키길 잘했다.
“그러고 보니 어때? 깨달음은 얻은 것 같아?”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잡힐 듯 말 듯 아리송합니다. 그래도 어떤 식으로 마음을 검에 담아야 하는지는 알 것 같아요.”
버밀리온이 초인으로 발돋움하고 검에 심상을 담던 모습은 프레시아에게 많은 영감을 준 모양이었다.
다만 경지의 벽 너머가 눈앞에 아른거려서인지 살짝 조바심을 느끼는 듯했다.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호레이즌 경이라면 너무 빠르다고 투덜거릴지도?”
초인의 벽을 넘는 순간을 돕지 못했다고 괜히 날 원망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내가 웃으며 프레시아의 머리를 헝클어트리자 프레시아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계를 보니 슬슬 외출할 시간이 되었다.
프레시아가 따라나설 준비를 하며 물었다.
“어스름 상회에 가시는 건가요?”
어제 저녁 식사 시간 때 유적 출입 허가증을 어떻게 얻었는지 설명했기에 바로 어스름 상회의 이름이 나왔다.
“소개받기로 한 약속 시간에 맞춰 나가야 날 의심하더라도 뭐라 못 하잖아.”
아마 지금쯤 어스름 상회에서도 바다 교단의 금고가 털렸다는 사실을 알고 날 의심 중일 거다.
내가 약속한 시간에 장소로 오지 않는다면 그 의심은 확신으로 바뀔 터였다.
하지만 당당히 나간다면 VIP인 내게 뭐라 따지지 못하겠지.
따지면서 위해를 가하려 한다면 당당히 VIP 카드에 달린 ‘고객 불편 신고용’ 연락 마법을 사용할 거다.
처음 받을 때는 몰랐는데, VIP 카드에는 꽤 많은 기능이 내장되어 있었다.
내 대답에 프레시아는 역시 도련님이라며 키득거렸다.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까 바다 교단도 한번 살펴보고 가자.”
“알겠습니다.”
나와 프레시아는 여관을 나서서 신전들이 모여 있는 중앙 거리로 향했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 교단의 모습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화로웠다.
설마 아직도 금고가 털렸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나?
아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무리 내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나만 가져왔다지만, 아무런 소동도 일어나지 않는 건 이상했다.
특히 그 금고에는 나보다 먼저 방문한 선객이 있지 않았던가.
내가 잠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활기찬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고개를 돌려 보니 어제의 선객, 푸른빛이 감도는 짙은 남색 머리칼의 귀여운 소녀가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래서 말인데, 좋은 말씀 드리고 싶은데 잠시 시간 괜찮나요?”
대지 교단의 성녀는 수상한 미소를 흘리며 도를 믿느냐고 말을 걸어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