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유적도시 (9)
바다 교단의 바하나드 대성당에서 나온 나와 야드는 숨을 고르며 대성당의 기색을 살폈다.
기척을 죽이며 예의 주시하기를 몇 분, 소란이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정령을 보내 내부를 살펴볼까 고민해 봤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일으키느니 이대로 철수하는 게 나았다.
“성공하신 겁니까?”
야드의 물음에 나는 가면을 벗으며 싱긋 웃었다.
“짜잔!”
내가 아공간에서 꺼낸 유적 출입 허가증에 야드도 가면을 벗으며 긴장이 풀린 듯 웃었다.
“하하하. 정말이지, 유안 군의 담력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총본산에 위치한 교황청도 아니고 고작 성당 하나 몰래 다녀오는 게 뭐가 힘들다고.”
허가증 두 개를 다 훔칠까 고민하다가 일단 하나만 가지고 나왔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바다 교단이 운영하는 발굴단을 유적에서 빼낸 이유가 아르카나와 관련이 있을 거다.
‘아르카나 02, 여교황’이 바다 교단의 성녀 에밀리였으니까.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지금 시점의 정보는 거의 없는 데다 내가 워낙 벌여놓은 것들이 많아 소설대로 흐를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만약 내 예상대로 에밀리가 이 도시에 왔다면 허가증을 모두 가져오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르카나의 유적 입장을 막거나 늦출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하나를 놓고 오면 놓고 오는 대로 이용해 먹을 수 있단 말이지.
“어디 촌구석 교회도 아니고 무려 일곱 교단 중 하나의 대성당을 털어놓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유안 군뿐일 겁니다.”
그렇게 안 보였는데 내심 굉장히 떨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의외라며 바라보자 야드는 식은땀을 닦으며 웃었다.
“당연히 긴장하죠. 걸리면 이 얼굴로 이 대륙에서 발붙이고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말한 야드는 날 무슨 아다만티움으로 신경이 만들어진 사람 보듯 바라봤다.
하기야, 일곱 교단의 성세는 전 대륙을 아우른다.
신성 권력이 일곱 개로 나뉜 덕분에 몇몇 국가를 제외하곤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중세 암흑기는 없었다.
그래도 한데 묶이고 때때로 힘을 합치는 만큼 그 힘은 국경을 초월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즐기는 것처럼 보였는데?”
내 말에 야드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사실 재미있기는 했습니다.”
이 녀석도 상당한 배짱에 괴짜였다.
“제가 살면서 언제 바다 교단을 털어 보겠습니까? 그 유명한 도둑들의 정점이라는 괴도(怪盜)도 아니고.”
호사가들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두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쌍벽이괴(雙壁二怪) 중 한 사람인 괴도 말인가?
그러고 보면 괴도도 등장만 하고 결국 정체가 안 밝혀진 엑스트라였다.
의심 가는 캐릭터는 몇 명 있긴 했지만, 뭐 하는 녀석이었으려나?
“점점 유안 군을 따라오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어렸을 때 꿈이 이런 모험을 하는 탐험가였거든요.”
“서커스단이 아니라?”
“그 당시엔 서커스단은 제 집이라는 인식이 강했거든요. 머리가 조금 커지면서 바뀌었죠.”
그건 의외였다.
야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 문을 열자 시원한 공기가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겨울의 잔향에 제이드가 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셨습니까? 가셨던 일은 잘 마치셨습니까?”
제이드는 실루아와 아바스엘과 함께 스위트룸 거실 바닥에 사 온 유물을 늘어놓고 있었다.
프레시아와 길버트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두 사람에게는 심부름을 많이 시키긴 했으니 시간이 오래 걸릴 만도 했다.
“어, 운이 좋아서 허가증을 얻었어.”
내 대답에 야드는 장난스레 이죽거렸다.
“얻었죠. 그렇고말고요.”
나는 야드를 따라 낄낄 웃으며 유물들을 살펴봤다.
“그런데 많이 사 왔네?”
거실 바닥이 부족해서 안방에도 유물을 깔아 놨다.
“하하하, 조금이라도 마력이 느껴지는 유물이라면 전부 사 왔습니다. 사다 보니 나중 가서는 실루아가 귀족가 아가씨처럼 여겨지지 뭡니까.”
그 정도로 돈을 뿌리고 왔으면 그렇게 여겨질 만했다.
“감정은 잘되어 가?”
“지금은 저 상자에 분류만 하고 있었습니다. 저 상자에는 저주가 담긴 것, 이 상자에는 모르겠는 것, 그리고 그 상자에는 저주가 안 걸려 있는 것을 넣고 있습니다.”
시장에 돌아다니는 유물에 담긴 저주라고 해봤자 면역력을 약간 약화시킨다거나, 탈모를 가속화하거나, 악성 무좀에 걸리게 하는 등의 잡스러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잡스러운 저주도 써먹을 데는 무궁무진했다.
아니면 용광로에 녹이듯 저주를 한데 모아 강력한 저주를 만들어내도 되고 말이다.
나는 제이드가 가리키는 내 발치의 상자를 뒤적여 봤다.
어스름 상회에서 종결급 마법 지팡이인 불사조의 정장을 얻은 것처럼 쓸 만한 게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오! 찾았다, 아루도스의 돋보기!”
잡다한 물건 사이로 먼지 낀 외눈 안경을 발견했다.
제이드에게 외양을 그려서까지 설명하며 발견하면 꼭 사 오라고 말한 물건 중 하나였다.
소설에서 구하던 시기와 달라 못 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주인공의 운빨을 믿은 보람이 있다.
이걸로 유적 안에서 발굴하기 편해지겠다.
“아, 그 안경. 사 오래서 사 왔는데 좋은 물건인가요?”
“아루도스의 돋보기?!”
아루도스의 돋보기를 모르는 제이드와 달리 허리를 두드리며 열심히 저주받은 유물들을 상자에 넣던 아바스엘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역시 마탑의 대마법사 출신답게 아루도스의 돋보기를 알고 있었다.
아바스엘은 외눈 안경의 먼지를 털어내며 조심스럽게 마력을 주입했다.
한참동안 마력을 주입하자 안경테 사이로 희미하게 마법식이 떠올랐다.
그 술식을 본 아바스엘은 흥분했다.
“아루도스의 돋보기가 맞습니다! 세상에! 이게 있는 줄 알았으면 분류하겠다고 그 고생을 안 하는 거였는데!”
아바스엘의 반응에 제이드와 실루아는 분류하던 손을 멈추고 관심을 보였다.
“아루도스의 돋보기가 뭐예요?”
실루아의 물음에 아바스엘은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아루도스의 돋보기를 작동시켜 실루아의 눈에 씌워줬다.
“와아! 술식이 훤히 보여요! 이거면 정말로 애써가며 분류 작업을 안 해도 됐겠어요!”
“그렇지? 아루도스의 돋보기는 신화시대 말엽, 아루도스라는 대마법사가 만든 물건으로 숨겨진 마법 술식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유물이란다. 천공 도시에서도 다섯 개밖에 없는 귀한 유물인데 이런 데서 굴러다니다니.”
저 외눈 안경 하나만으로 바닥에 널린 쓰잘데기 없는 골동품 값의 수십 배를 번 셈이었다.
“주군, 그런데 외형도 살짝 찌그러지고 오랫동안 마력도 고갈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알아보신 겁니까?”
“책에서 봤어. 여기 안경테에 마법 술식 일부가 밖으로 나와 있잖아. 그 술식이 같더라고.”
거짓말은 아니다. 소설 끝 부록에서 봤으니까.
“대단하십니다. 저는 예전에 직접 보고 사용도 해 봤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아바스엘의 감탄에 나는 손을 내젓고는 불사조의 정장을 꺼내 건넸다.
“그 안경으로 이걸 한번 봐줘.”
내 부탁에 아바스엘은 작은 브로치를 받아들고 열심히 살펴봤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건! 대단합니다! 어떻게 이런 술식이!”
아바스엘의 반응을 보아하니 가짜는 아닌 듯했다.
“화염계 마법 지팡이 맞지?”
“예! 맞습니다. 주군께선 어떻게 이런 귀물을 발견하셨습니까?”
“어스름 상회에서 그냥 브로치로 팔더라고. 원래 네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보다 좋은 물건이야?”
“이를 말씀이십니까! 그냥 좋은 수준이 아닙니다!”
흥분한 아바스엘은 불사조의 정장에 극양(極陽)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어지간한 마력 밀도로는 낼 수 없는 초고열에 시원했던 방 안이 사우나처럼 뜨거워졌다.
“아차!”
아바스엘은 방으로 퍼진 자신의 마력을 회수하려 했다. 나는 미소 지으며 손을 들어 말렸다.
“비암.”
불의 정령인 비암이 내 옷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잉여 열기를 잡아먹었다.
뜨거워졌던 방이 다시 정상적인 온도까지 떨어졌다.
그걸 본 아바스엘은 거리낌 없이 브로치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여파를 생각 못 했습니다.”
사과하는 아바스엘의 손에는 브로치가 아닌 긴 나뭇가지처럼 생긴 마법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마법 지팡이의 끝에는 자그마한 붉은 새가 살아 있는 것처럼 부리로 몸단장을 하며 앉아 있었다.
저 새는 살아 있는 생명체는 아니었지만, 지팡이 주인의 의사에 따라 노래하며 마법을 사용했다.
“그럴 수도 있지. 마음에 들면 가져.”
“그래도 괜찮습니까?! …아, 하지만 이 정도 마법 지팡이면 주군께서 불의 정령을 다룰 때 유용하실 겁니다.”
아바스엘의 말에 비암이 꼬리로 내 등을 탁탁 치며 동의했다.
어지간히 불사조의 정장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니, 나는 나중에 노리는 물건이 있으니까 괜찮아.”
리즈벳이 남긴 마법 지팡이가 분명 있을 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아퀼라의 마도서가 있으니 괜찮다.
“그리고 여러 속성의 정령과 함께하면서 한 속성에 치우치는 것도 안 좋거든.”
“흠흠! 그렇군요.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바스엘은 아닌 척했지만 좋아하는 걸 숨기지 못하며 불사조의 정장을 다시 브로치로 바꿔 가슴에 달았다.
비암은 그 모습에 분노하며 꼬리로 내 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나중에 비암에게 불의 마석이라도 하나 구해 줘야겠구만.
나는 상자 속에서 내가 사 오라 한 물건들이 있는지 확인하며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 마탑에서 사 온 것들은 어디 있어?”
“주군 방에 놓아 두었습니다. 하명하신 대로 점성술에서 사용하는 천문도해서(天文道解敍)랑 규조토, 흑연을 사 오긴 했는데, 유적을 발굴하는데 필요한 겁니까?”
아바스엘의 의문에 나는 웃으며 침대 위에 놓여 있는 천문도해서를 살폈다.
“그럼, 필요하지.”
천문도해서는 별자리 미궁의 법칙을 계산하는 데 필요했다.
그저 별자리와 천체의 움직임을 기록한 물건이라 점성술 학파의 비전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변화하는 유적 속에서 내가 원하는 물건의 위치를 계산하기에는 충분했다.
천문도해서를 읽던 중 아루도스의 돋보기를 쓰고 마저 분류를 하던 제이드가 내게 말했다.
“유안,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말입니다.”
“뭔데?”
나는 책장을 넘기며 대답했고, 제이드는 상자 안에 유물들을 넣으며 물었다.
“혹시 검마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습니까?”
“천하십검의 검마? 어지간한 건 알지. 검마는 갑자기 왜?”
검마(劍魔)는 호사가들이 일컫길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검객(天下十劍) 중 하나이자 일그러진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네 명의 마인(魔人)인 천관사마(舛觀四魔) 중 한 사람이었다.
“별일 아니긴 한데, 시장에서 유물들을 구매하다가 마주쳤거든요.”
“그래? 검마를 만났… 뭐?”
제이드가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듯 말한 탓에 그냥 넘길 뻔했다.
“검마를 만났다고? 어쩌다가?”
내가 놀라서 되묻자 제이드는 내 반응을 예상치 못했는지 놀란 눈으로 대답했다.
“시장 거리 뒷골목에 있는 낡은 무구점에서 마검을 발견했는데, 거기서 만났습니다.”
“설마 검마가 그 자리에서 마검을 처분했어?”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이드의 대답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흔적은? 지우고 왔….”
쾅-! 와장창!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살 난 문짝이 날아가며 창문을 깨트렸다.
“이리 오너라! X년아!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냐!”
괄괄한 목소리의 여자가 검을 어깨에 걸쳐 메고 사납게 외쳤다.
그녀는 검마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나타난다는 천하십검 중 한 사람, 검선(劍仙) 나유타 엘리스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