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유적도시 (8)
나는 놀라서 정령 권총을 꺼내 그녀에게 겨누었다.
“어?”
열심히 신전에서 모아둔 보물을 자루에 쓸어 담고 있던 여자도 금고 문이 열리자 놀라며 짧은 마법 지팡이를 내게 겨눴다.
나나 먼저 잠입한 도둑은 서로 누구냐고 묻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눈앞의 도둑을 훑으며 말했다.
“선객이 있을 줄은 몰랐네.”
당연히 나비의 힘으로 음역대를 바꿔 내 목소리는 아니었다.
“나야말로 후객이 올 줄은 몰랐거든.”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는 듣기 편한 미성이었다.
두건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푸른빛이 감도는 짙은 남색 머리카락.
머리카락에 푸른빛이 감도는 건 전형적인 성자와 성녀의 특성이었다.
현 일곱 교단의 성녀는 총 세 명.
태양 교단, 바다 교단, 대지 교단이었다.
“대지 교단의 성녀가 바다 교단의 비밀 금고에는 무슨 일이지?”
세 명의 성녀 중 남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는 대지 교단의 성녀, 소피아뿐이었다.
눈앞의 여자가 성녀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떠올린 사람은 바다 교단의 성녀였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은 푸른빛이 짙게 감도는 금색이었다.
게다가 바다 교단의 성녀라면 ‘대외적으로는’ 온화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몰래 자기네 교단 비밀 금고를 털 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눈웃음치며 뻔뻔히 묻는 게 딱 대지 교단의 성녀였다.
그런데 소피아가 장난스러운 성격인 건 맞아도 이렇게 다른 교단을 털 녀석은 아니었을 텐데?
나는 정령권총을 아래로 내리며 물었다.
“바다 교단의 대주교가 뭔가 착복하거나 불법을 저질렀나?”
내 추측에 소피아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으흥, 너도 정의의 도둑이 되러 온 거야?”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내며 부정하지 않는 걸 보면 내 추측이 맞는 모양이었다.
“글쎄? 내가 정의와는 연이 없는 사람이라.”
“정의와 연이 없다라…. 내가 보기에는 마냥 그렇지만도 않은데?”
그녀의 푸르른 벽안(碧眼)이 반짝이며 날 꿰뚫어 보듯 응시했다.
그러고 보면 대지 교단의 성녀는 초직감을 가지고 있었지.
그녀가 내게서 뭘 봤는지는 모르지만 초직감도 그리 믿을 만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뭐가 되었든 그녀에게서 딱히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좋게 봐주니 고맙네. 그런 의미에서 각자 볼일이나 보고 못 본 척 넘어가는 게 어때?”
소피아가 지금 이 도시에 왜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일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그녀가 뭘 하든 나와는 상관없다.
“여기서 소동을 일으켜 봤자 서로 득 볼 게 없다는 말이지?”
성녀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더 나아가자면, 소동을 일으켰을 때 누가 더 손해를 볼지 생각해 보란 말이었어.”
신전과 연이 없는 도둑과 타 교단의 성녀.
최악의 경우 나야 그냥 도망치면 그만이었지만, 다소 특징적인 외모와 신성력 탓에 들키기 쉬운 소피아는 소동이 일어나면 망신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음, 협박받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확실히 내가 더 손해긴 하겠네.”
“인정하는 걸 보면 대지 교단의 성녀라는 건 더 부정하지 않는 건가?”
내 물음에 소피아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계속해서 부정하는 것도 날 사랑해 주시는 신께 못 할 짓을 하는 거잖아? 그리고 이미 확신하고 있는 사람에게 부정해 봤자 의미가 없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자신의 자루에 유적지에서 발굴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다시 담기 시작했다.
저 자루, 아공간 마도구인가?
전체를 읽을 순 없지만 각인된 술식을 보면 크기 조절도 되는 형태군.
상호 충돌하는 공간계 마법을 중첩해 걸다니, 제작자가 보통 마법사가 아니었다. 신화시대의 유물인가?
나는 금고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지나쳐 금고 끝에 액자에 걸려 보관되어 있는 허가증으로 다가갔다.
어스름 상회의 정보대로 이 금고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액자에 걸린 허가증은 두 개.
두 개의 허가증을 모두 가져가느냐, 아니면 하나만 가져가느냐 살짝 고민이 됐다.
둘 다 극명하게 장단점이 갈리는 만큼 선뜻 행동하기 힘들었다.
두 개 다 가져간다면 분명 바다 교단은 눈을 붉히며 날 찾기 위해 모든 수를 동원할 거다.
어지간해서 허가증을 이렇게 놀리지 않은 걸 생각하면 바다 교단이 허가증 두 개를 모두 유적에서 빼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다.
그런 만큼 난리가 나겠지.
반면 하나만 가져간다면 소동이 벌어지긴 하겠지만, 어지간해서 바다 교단 내부에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문제시 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미 유적에 들어간 다음이 되겠지.
하지만 두 개 다 가져갔을 때의 이득도 있다.
허가증이 두 개나 있으면 여차할 때 일행을 나누어 움직일 수 있을 뿐더러, 바다 교단이 허가증을 모두 유적에서 빼낸 ‘목적’을 지연시키는 게 가능했다.
바다 교단에서 허가증을 유적에서 모두 꺼낸 목적은 아마….
“저기?”
뒤에서 들려오는 소피아의 목소리에 나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뭘 고민하는지 모르겠지만 빨리 선택하는 게 좋을걸?”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에 나는 바로 허가증 ‘하나’와 주변에 보이는 성수를 쓸어 담고 금고에서 튀어나왔다.
“당겨!”
내 외침에 환풍 통로에서 대기하고 있던 야드가 밧줄을 당겨 날 끌어올렸다.
나비의 힘으로 몸을 위로 밀어낸 나는 재빠르게 환풍구로 들어갔다.
“휘유~! 그쪽으로 온 거구나?”
소피아의 여유로운 목소리에 나는 피식 웃었다.
“여기서 있던 일은 서로 잊기로 하지.”
내 말에 복면을 쓴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말로 원하는 바야.”
나는 그녀를 뒤로 하고 최대한 빨리 기어나갔다.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서두르는 날 보며 야드는 당황했다.
“최대한 금고에서 떨어져야 해. 대성당의 높은 사람이 귀중품 보관소로 오는 중이야.”
소피아의 말은 허투로 넘기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재수 없는 일이 터진다.
그녀의 초직감은 거의 예지 수준이었다.
그런데 소피아는 왜 내게 경고를 해준 거지?
모르겠다. 일단 대성당을 빨리 벗어나야겠다.
* * *
“인사도 없이 매정하네.”
대지 교단의 성녀 소피아는 뒤도 안 돌아보고 빠르게 사라지는 유안과 야드를 보며 피식 웃었다.
바다 교단 바하나드 대성당의 보물들을 빼돌린 그녀도 경보 마법이 비껴 나간 타일을 밟고 귀중품 보관소를 나왔다.
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소피아는 길을 잃은 척 적당히 복도를 거닐었다.
그러던 중 인자한 인상의 노(老) 사제가 알록달록한 깃털의 앵무새 수인과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금발의 소녀를 데리고 어딘가로 가는 것을 발견했다.
보아하니 세 사람은 귀중품 보관소로 향하고 있었다.
조금만 늦장 부렸으면 바로 앞에서 마주칠 뻔했다.
소피아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멜리!”
소피아의 외침에 바다 교단의 성녀, 아멜리는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소피아!”
소피아를 본 아멜리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종종걸음으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이게 얼마 만이야! 너무 오랜만이다!”
“그러니까! 기지배, 연락 좀 하지!”
두 성녀는 오래 사귄 막역지우처럼 얼싸안았다.
그 탓에 대성당의 최고 관리자인 대주교는 대지의 성녀가 왜 여기에 있냐고 따져 묻지 못했다.
“얘는! 항상 연락해도 싸돌아다닌 게 누구인데!”
아멜리의 장난 어린 힐난에 소피아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오호호호! 나야 직감대로 움직이잖아.”
“바하나드에 온 것도 직감?”
“뭐, 그렇지.”
소피아의 손을 마주잡은 아멜리는 싱긋 웃으며 대주교에게 말했다.
“잠시 대지 교단의 성녀님과 대화를 나누고 와도 괜찮죠?”
“예? 아… 예, 편히 대화 나누십시오. 아멜리 성녀님.”
대주교는 살짝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소피아와 아멜리는 그런 대주교의 불편한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의 팔짱을 끼고 다시 위로 올라갔다.
“여긴 혼자 온 거야?”
아멜리의 물음에 소피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데일호르그 경과 함께 왔어.”
“검성(劍聖)의 스승이신 일기당천(一騎當千)?”
교도칠성(敎道七聖) 중 한 사람이자 천하십검의 한 사람인 검성의 스승, 일기당천 데일호르그는 일곱 교단을 가리지 않고 두루 존경받는 초인이었다.
“앗! 아저씨한테는 내가 이곳에 왔다는 건 비밀로 해줘.”
마치 엄한 할아버지에게 혼날 것을 무서워하는 철부지 손녀딸 같았다.
“후후후, 여전히 사고뭉치인 모양이구나.”
에일리는 당황하는 소피아를 보며 편안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잉셈 대주교님이 무슨 부정이라도 저질렀어?”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소피아는 당황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춤에 찬 자루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건넸다.
“귀중품 보관소 대형 금고 안에 숨겨진 금고가 하나 더 있더라. 거기서 찾았어.”
소피아의 말에 아멜리는 어떻게 침입하고 금고를 열었느냐 묻지 않았다.
소피아의 육감을 초월한 직감은 때때로 신의 가호와 같은 기적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모든 경보와 방위 마법을 피하고 금고 비밀번호를 눌렀다는 결과 값을 도출해 내는 건 오랜 친구인 그녀에게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다.
차분히 서류를 살펴본 아멜리는 미간을 좁히며 대주교의 실태에 분노했다.
“그저 문서만 가져오진 않았지?”
“당연하지. 지금 줄까?”
소피아가 허리춤의 자루에 손을 넣는 시늉을 하자 아멜리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지금은 네가 물증을 가지고 있는 게 안전할 거야. 그렇지?”
만약 그 물증이 아멜리의 손에 들어와도 문제가 없었다면 소피아는 서류와 함께 물증까지 넘겼을 터였다.
“나야 모르지. 남들은 언제나 내 직감을 신봉하지만, 사실 난 내 직감을 그리 믿지 않아서.”
소피아는 쓰게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과정을 모르고 자신의 의지 없이 그저 좋은 결과만을 위해 움직인다면 그게 꼭두각시 인형과 다를 바가 어디 있겠는가.
주변 어른들은 모두 신의 인도라며 그녀를 부러워하고 동경했지만, 정작 그녀는 마냥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의 직감이 얼마나 불완전한 힘인지는 그녀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소피아의 말에 에밀리는 말없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영감님이 찾기 전에 가봐야겠네. 몸조심해, 에밀리. 왠지 감이 안 좋아.”
그녀의 경고에 에밀리는 무시하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에밀리가 이 도시에 온 이유는 아르카나의 일원으로서 유적에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유적에 들어갈 그녀에게 소피아의 경고는 무시할 수 없었다.
“무엇을 조심하면 좋을까?”
에밀리의 물음에 소피아는 잠시 눈을 감고 머리를 비웠다. 그러고는 생각나는 대로 읊었다.
“유적, 그리고 도둑…?”
도둑이라고 말한 순간 소피아는 방금 전 거짓된 얼굴을 한 소년이 떠올랐다.
그가 도둑은 맞았지만, 그에게서 불길한 직감은 전혀 느끼지 못했기에 의아했다.
“알겠어. 조심할게.”
에밀리의 대답에 소피아는 생각을 털어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나 가볼게. 당분간 이 도시에 있을 생각이니까 또 보자.”
“그래, 또 보자.”
두 교단의 성녀는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