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유적도시 (7)
내가 바다 교단의 바하나드 지부로 향하자 내 뒤를 따르던 야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훔치실 생각이었으면 그냥 부지부장의 부탁을 안 들어줬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럼 이렇게 촉박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말이죠.”
그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었다.
“원래 타임 어택이 재미있는 법이거든.”
“….”
“농담이야. 그렇게 볼 건 없잖아.”
형용할 수 없는 야드의 표정에 나는 살짝 상처받았다.
“유안 군이 말하면 농담 같지 않으니까 자제 부탁드립니다.”
내가 그렇게 터무니없는 소리를 할 사람으로 보인단 말이야?
“그럼 부지부장의 서비스를 받아들인 이유가 있는 겁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긴 한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까 말했듯이 결국 어스름 상회는 우리를 보호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점이지.”
내 범행이 들통 나면 X되는 건 내가 아니라 어스름 상회 바하나드 지부다.
정확히는 지부장과 부지부장이 여왕의 박제 컬렉션에 포함되게 된다는 점에서 목숨 걸고 날 숨겨줄 거다.
아니면 직접 날 죽여 입을 막으려 들거나.
살인 멸구는 실패 시 리스크가 너무 크니, 어지간해선 시도하지 않을 것 같지만, 대비는 해둬야지.
“그럼 미리 말해서 도움을… 아니, 그럼 그쪽에서 무조건 방해했겠군요.”
“당연하지. 오히려 날 죽여서라도 못 하게 만들었을걸? 서비스를 받아들인 건 방해하지 못하도록 방심시키기 위해서기도 했어.”
“유적 지도와 각종 선물에 물건 가격까지 할인받고 말이죠?”
야드의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에 나는 싱긋 웃었다.
“어스름 상회에는 여왕부터 말단까지 황금처럼 여기는 격언이 하나 있어.”
“격언 말입니까?”
“그래, 격언. 바로 ‘속은 놈이 잘못이다’.”
어스름 상회는 거대한 양아치 집단이었다.
VIP 대상이나 비싼 물건은 구매자를 섣불리 건드리면 귀찮은 일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서 사기는 ‘잘’ 치지 않았다.
하지만 낮은 등급의 고객이나 자신들에게 물건을 파는 이들의 등은 그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서 치는 놈들이다.
내 말에 야드는 유쾌하게 웃었다.
“아하하하! 정말이지, 유안 군은 그날 제게 거래를 제안했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군요.”
수도에서 자반의 정보를 미끼로 마법을 잃은 아바스엘을 떠넘겼을 때를 말하는 건가.
“생각해 보면 그때로부터 고작해야 반년 남짓 지났을 뿐이잖아. 사람이 바뀌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지.”
“그것도 그렇군요.”
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데 아무리 부지점장의 서비스를 받겠다고 했지만, 어스름 상회에서 저희 뒤를 캐지 않겠습니까?”
“어, 캐겠지. 안 그래도 우리 나올 때 미행을 붙이던데?”
내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야드는 놀랐다.
“이렇게 제 얼굴로 돌아다녀도 되는 겁니까?”
“따돌렸으니까 괜찮아. 지금쯤 은하가 만든 환영을 열심히 쫓고 있을걸?”
바다 교단의 바하나드 대성당 근처까지 온 나는 야드의 천변가면을 썼다.
“유안 군에게 그 가면이 필요합니까?”
정령술로 하는 변장은 천변가면보다 훨씬 뛰어났으니 타당한 의문이었다.
“신성력을 제대로 타고난 놈들은 이따금씩 거짓된 것을 꿰뚫어 보기도 하거든. 그런 놈들을 상대하게 될 때는 아예 얼굴을 가리는 게 좋아.”
그런 특수한 능력을 가지려면 최소 대주교급, 혹은 성자와 성녀 정도는 돼야 했다.
물론 예외도 있긴 했다.
“과연, 그렇군요. 예전에 서커스 공연할 때 한 사제님에게 환영 마술이 안 통했던 게 그래서였나 봅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야드도 날 따라 천변가면을 다시 착용했다. 그러고는 조금 떨어진 대성당을 본 야드가 물었다.
“신성력 결계가 처져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뚫고 침입할 생각이십니까?”
나는 나비와 은하를 대성당으로 보냈다.
견고한 흑마법 결계도 드나들던 정령인 만큼 몰래 대성당 안으로 숨어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공기가 통하고 빛이 닿는 곳이라면 내 눈으로 본 것처럼 확인할 수 있었다.
“대단한 결계는 아니야. 그저 경보 수준이라 약한 부분만 찾으면 침입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아.”
경비를 마법으로 대체하면 어지간해서 물리적인 경비가 허술한 경향이 있는데, 저 대성당이 딱 그 꼴이었다.
“그런데 다른 일행분들을 부르실 생각은 없습니까?”
“소란을 일으킬 거라면 모를까, 몰래 갔다 오는 거라면 우리 둘이면 충분해.”
저렇게 신성력이 가득한 공간에서 섣불리 마법을 사용하면 오히려 이질감 때문에 들킬 위험이 높았다.
그러니 제이드와 아바스엘, 실루아는 도움이 안 된다.
셋 다 그렇게 몸을 잘 쓰는 편도 아니고 말이다.
프레시아는 버밀리온의 각성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는지 이따금씩 마력이 불안정하게 흔들렸고, 길버트는 은밀한 일을 하기에는 어설펐다.
나는 빛의 정령인 은하의 힘으로 우리의 모습을 감추고 바람의 정령인 나비의 힘으로 소리를 지웠다.
정령술이 좋은 점은 어떠한 마력의 형태든 비슷하게 따라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 어떠한 마력이라도 결국 ‘자연’에 존재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이쪽이야, 따라와.”
신도들을 위해 개방된 대문을 지나 대성당을 둘러싼 담벼락을 따라 뒤뜰로 가자 신전에서 잡일을 하는 사용인들을 위한 뒷문이 나왔다.
“대놓고 문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왜? 굴뚝으로라도 들어갈 줄 알았어?”
“예, 뭐. 몰래 잠입할 때는 보통 그렇지 않습니까?”
야드의 의문에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거야 평범한 저택이라면 그렇지만 여긴 경비 마법이 깔려 있잖아. 이런 경비 마법은 낮에 출입구 쪽 경보를 꺼두기 마련이거든.”
번질나게 드나들 텐데 그때마다 경비 마법이 작동해 경보를 울려대면 경비원들도 고생이고, 신도들도 놀라기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정문으로 들어가기에는 신도들을 맞이하기 위한 사제들과 경비들이 너무 많았다.
이 정도로 규모가 큰 대성당이라면 정문 쪽에 신성력이 높은 사람이 한두 명쯤 있기 마련이라 피해 가는 게 좋다.
“이런 데 몰래 들어갈 때는 가장 방심하고 있는 곳을 찔러야 하는 법이야.”
뒷문과 연결된 부엌에는 성당에서 신도들과 빈민들에게 제공한 식사가 끝난 설거지 거리가 가득 쌓여 있었다.
성당에 고용된 사용인들이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나와 야드는 그들 사이를 지나 복도로 나아갔다.
후문 근처에 위치한 사제들의 세탁물을 쌓아둔 세탁실 앞에 도착한 나는 슬쩍 문을 열고 내부를 살폈다.
한창 신도들과 함께 예배를 볼 시간이라 세탁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온 나는 다림판이 놓여진 테이블 위로 올라가 천장 구석에 있는 환풍구의 뚜껑을 뜯어냈다.
“읏차!”
그동안 프레시아의 지옥 훈련을 받아온 덕분인지, 생각보다 수월하게 철봉 하듯 환풍 통로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야드도 뒤따라 들어오며 뚜껑을 다시 닫았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군요.”
야드의 말대로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은 환풍 통로는 굉장히 어두웠다.
“은하야.”
내 부름에 은하는 우리 주변을 밝혔다.
오래된 대성당이라 그런지, 통로는 견고한 석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최남단 도시인 바하나드도 아슬아슬하게나마 마법 현상인 장마 권역에 해당할 텐데, 무른 지반임에도 나무를 섞는 형식의 개조를 하지 않은 걸 보면 건물 일대가 신성력으로 보호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럽습니다.”
야드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나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나중에 정령과 계약할 수 있는지 확인해 줄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야드, 너라면 하나쯤은 계약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정말입니까?!”
내 말에 야드는 기대 어린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아바스엘처럼 화염계 마법사면서 불의 정령인 비암에게 미움받는 사람이라면 가망이 없긴 했다.
하지만 계약자도 아닌데 은하에게 부탁을 해서 원하는 결과를 낸 적이 있는 야드라면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아, 그리고 제이드도 가능은 하겠군. 소설 속에서 나비와 계약했으니까.
나는 응용 포복을 하며 빠르게 석조 환풍 통로를 지나갔다.
오른쪽, 직진, 한 층 위로, 뒤로, 오른쪽, 직진, 세 층 아래로, 다시 직진, 직진, 왼쪽, 직진….
“여기군.”
한참을 움직인 끝에 목적지인 대성당 지하 2층에 위치한 ‘귀중품 보관소’에 도착했다.
환풍 뚜껑 틈새로 보이는 내부는 아무도 없는지 어두컴컴했는데, 은하의 힘으로 방문 틈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을 이용해 내부를 선명히 볼 수 있었다.
바닥에 촘촘하게 경보 마법이 깔려있고, 벽에는 화살이 튀어나오도록 함정이 설치되었군.
금고도 다중 잠금 마법 금고인가?
캉!
나는 환풍구 뚜껑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밧줄로 묶고 발로 차 열었다.
그러고는 뚜껑에 단 밧줄을 풀고 내 허리에 묶었다.
몸을 숨기고 소리를 차단하는 수준이라면 모를까, 몸을 허공에 띄울 정도로 마력을 많이 사용하면 대성당의 감지 마법에 걸릴 위험이 있었다.
내가 대마법사 수준으로 마법에 능했다면 감출 수 있었겠지만, 지금 내 수준으로는 무리다.
“단단히 잡고 있다가 밧줄을 당기라고 신호하면 당겼다 풀어.”
밧줄의 길이를 가늠해 야드에게 쥐여주었다.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쇼.”
나는 레펠(rappel)을 타듯 밧줄을 잡고 천천히 내려갔다.
이러니까 군대에 있을 때가 생각나네. 진급에 미친 중대장이 연대장과 여단장에게 잘 보이겠다고 별의별 훈련을 다 시켰었는데.
힘들긴 하지만 역시 근력이 많이 좋아진 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평범한 소년 정도는 될 듯했다.
“읏차차!”
몸에 반동을 준 나는 경보 마법이 걸려 있지 않은 바닥 타일을 밟았다.
가까이서 보니 경보 마법은 해제할 수 있어 보였다.
하지만 다시 원상 복구하려면 신성력이 필요해서 그냥 두기로 했다.
이런 데서 아까운 성수를 사용할 순 없지.
“하나, 둘, 당겨!”
내가 앞으로 뛰며 외치자 야드가 밧줄을 당겨 내 몸을 높이 띄웠다.
나는 벽면을 밟아 방향을 틀어 금고 근처로 향하며 풀라고 외쳤다.
“좋아. 아주 좋아.”
함정도 경보도 울리지 않고 무사히 대형 금고 앞에 도착했다.
“열 수 있겠습니까? 저도 내려갈까요?”
“아니, 댁도 내려오면 내가 어떻게 올라가라고?”
일곱 겹에 이르는 견고한 마법 금고였지만 게오르 영감의 연구 일지가 담겨 있던 서랍에 걸린 보안 마법이 더 어려웠다.
마치 벽같이 거대한 금고 문을 한번 쓸어 만지며 내부의 마력선을 느꼈다.
나는 그 마력선에 내 마력을 살짝 흘려 흐름을 조정했다.
“여기서 비틀고.”
철컥!
“여기서 당기고.”
철컥!
“다시 놓았다가 여기서 밀고.”
철컥!
“그리고, 끙차! 여기를 비틀면!”
팔이 아슬아슬하게 닿는 곳에 손을 대니 ‘철컥!’ 소리가 울렸다.
그르르르-.
그러자 금고 문이 위로 밀리며 벽과 벽이 쓸리는 소리가 났다.
금고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곳에 손을 전혀 대지 않았음에도 금고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환풍구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야드가 감탄했다.
“와오, 대단합니다.”
“그렇지?”
나는 웃으며 금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안에는 검은 복면을 쓴 웬 여자가 열심히 보물을 쓸어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