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유적도시 (6)
제이드의 놀람에 흑발의 여인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난 제자 같은 건 두지 않았다만? 소년.”
그녀의 말에 당황하던 제이드는 눈을 껌벅껌벅 깜박이더니 정신을 차리고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제 스승님과 많이 닮으셔서 순간 착각했습니다.”
긴 흑발에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신비한 분위기는 닮았지만, 자연스럽게 흘리는 기세는 정반대였다.
서늘하지만 부드러운 예카트리체의 기운과는 달리, 눈앞의 여인은 시리도록 날카로운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얼핏 보면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른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나와 닮았다라, 살면서 누군가가 나와 닮았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 말이로군.”
그녀의 말에 제이드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지금껏 스승님과 닮은 분은 처음 뵙습니다.”
흑발의 여인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방금 전까지 제이드가 쥐고 있던 검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이 검을 양보해 줄 수 있겠나? 소년.”
스승과 닮은 그녀를 보자 마검의 존재를 잠시 깜박했던 제이드는 진지해졌다.
“그 검은 너무 위험합니다.”
방심했다지만 당대 겨울나무의 현자인 제이드의 육신을 침범했던 마검이다.
그런 검을 함부로 타인의 손에 넘길 순 없었다.
마검의 정체를 알아내고 최대한 정확한 방법으로 소멸시켜야 했다.
그도 아니라면 위험도에 따라 적법한 봉인을 하든지 말이다.
제이드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옳은 말이다. 허나 그렇기에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넘길 수 없다.”
제이드는 흑발의 여인의 말에서 구도자에게서나 느낄 법한 경건함을 느꼈다.
직감은 그녀가 마검을 나쁜 일에 사용하지 않을 거라 말하고 있었지만, 단순히 직감을 믿기엔 저 마검은 너무나 위험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과 같군요. 그런 위험한 물건을 정체도 모르는 분께 섣불리 넘길 순 없습니다.”
제이드의 말에 그녀는 미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서 제이드는 기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그럼 내 정체를 알면 되는 건가?”
“적어도 믿을 만한 분인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알아야겠습니다.”
세상을 수호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사계의 현자 중 한 사람으로서 당연한 권리였다.
제이드의 주장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느닷없이 옷 앞섶 단추를 풀었다.
“이 마검을 소년이 사용할 건 아니란 말이군.”
“아니…!”
갑작스러운 행동에 제이드는 얼굴을 붉히며 당황했다.
흑발의 여인은 어린 소년다운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검을 뽑아 역수로 들었다.
“나는 마검을 발견하면 이렇게 처리한다.”
마검을 든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마검을 자신의 가슴에 꽂아 넣었다.
그 모습에 제이드는 경악했다.
심장을 관통해야 할 마검이 그녀의 가슴에 닿자마자 닿은 부분부터 분해되며 소멸했다.
“설마… 포식하신 겁니까?”
“눈썰미가 뛰어나군, 소년.”
눈앞의 여인은 마법이 아닌 특수한 방법으로 마검을 잡아먹은 것이었다.
그 증거로 마검이 닿은 가슴 정중앙에서부터 검은 악의와 살기가 맥동하는 혈관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미쳤습니까?! 그랬다가는 몸이…!”
제이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몸으로 퍼져나가던 마검의 악의가 잠잠해지기 시작하더니, 언제 발악했냐는 듯이 맥동하는 듯한 검은 혈관이 사라지며 새하얀 피부로 돌아왔다.
“이로써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마검은 사라지고 그 업은 내가 짊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닌 듯 담담하게 풀었던 단추를 잠갔다.
“너무 위험한 방식입니다!”
“하지만 빠르고 정확하지.”
“지금은 마검의 힘을 제압한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마검을 포식하면 언젠가 그 힘에 역으로 잡아먹혀 죽고 말 겁니다!”
“그게 내가 진리를 구하는 길(求道)이다, 소년.”
담담한 목소리에는 소름 끼치는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너와는 인연과 운명이 느껴지는군. 소년, 이름이 어떻게 되지?”
그녀의 물음에 제이드는 잠시 멈칫하다 대답했다.
“제이드입니다. 제이드 하이트필.”
제이드의 이름을 들은 그녀의 눈에는 이채가 감돌았다.
“그렇군. 역시 외면한다 하더라도 결국 운명은 교차하는 법인가.”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낡은 문을 열고 나가며 미소 지었다.
“내 이름은 아나스타샤 하이트필, 사람들은 날 검마(劍魔)라 부르지. 가까운 시기 연(連)이 닿는다면 또 보도록 하세, 제이드 소년.”
아나스타샤의 인사에 제이드는 급하게 뒤따라 나왔다.
천하십검(天下十劍) 중 한 사람인 검마(劍魔) 아나스타샤 하이트필은 그 잠깐 사이에 증발한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제이드는 뜨거운 햇볕에 일렁이는 아지랑이 사이로 보이는 신기루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 * *
나는 유적 내부 지도를 살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지도는 소설의 부록에 있던 지도를 내가 그린 게 아니라 어스름 상회에서 ‘선물’ 받은 지도였다.
이 지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제작 ‘시기’였다.
도시 중앙에 자리 잡은 ‘별자리의 미궁’은 유적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부를 바꾸는 하나의 거대한 마법 현상이기도 했다.
소설 속에 나온 미궁의 법칙으로 부록의 지도와 지금 내 손에 있는 지도를 대조해서 내가 원하는 물건의 위치를 계산해 낼 거다.
“참 알뜰하십니다.”
수십 개의 포장된 케이크와 쿠키가 담긴 상자를 열심히 내 식자재 창고에 집어넣던 야드가 혀를 내둘렀다.
“그럼, 알뜰해야 잘살지.”
이 지도는 주기적으로 제작되는 만큼 돈 주고 샀으면 꽤 비쌌을 텐데, 부지점장이 연결해 주는 허가증을 지닌 조직과 ‘협상’하는 조건으로 ‘선물’ 받은 물건이다.
야드가 아공간에 집어넣는 디저트도 함께 받았다.
“쥴리아 씨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모양입니다만.”
야드의 지적에 나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우량 고객인 내게 기쁜 마음으로 선물해 준 게 분명하다니까.”
뭐, 방을 나가면서 이를 악물긴 했지만 차가운 음료를 마셔서 이가 시렸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잇몸 관리가 중요하다니까.
야드가 식자재 창고에 디저트를 다 넣자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식자재 창고의 끈을 풀고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었다.
식자재 창고의 자루 끈으로 원을 만들면 아공간과 연결된 입구를 만드는 게 가능했다.
“뭐, 도련님이 우량 고객인 건 맞죠.”
야드는 내가 사준 코등이가 없고 손잡이 끝에 고리가 달린 얇은 단검 50자루가 담긴 공간 확장 벨트를 허리에 차며 웃었다.
내가 사준 단검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나저나 금세 날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게 익숙해진 듯 능숙하게 이름이 아니라 호칭을 바꿔 불렀다.
“난쟁이제(製) 고리 단검을 이렇게나 많이 사주는데 도련님이 우량 고객이 아니면 누가 우량 고객이겠습니까?”
난쟁이제라고 해봐야 수염도 땋지 못한 어린 녀석이 만든 물건이었다.
단검이 난쟁이제라서 산 게 아니라 거기에 각인된 마법 때문에 샀다.
단검에 걸려 있는 마법은 천공 도시의 유명 학파의 대마법사의 마법식이었다.
벨트가 있는데 내가 미쳤다고 어린 난쟁이의 연습작을 돈 주고 사겠나.
나중에 아바스엘에게 저 단검에 각인된 마법들을 분석시켜야지.
마도구를 제작하는 마법사는 성능은 유지하되 자신의 비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숨겨서 제작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각인사로 활동해 온 아바스엘이라면 각기 다른 마법이 걸린 견본이 50개나 있으니 충분히 비전을 뽑아낼 수 있을 거다.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대마법사의 비전을 돈 주고 얻을 수 있다면 수지맞는 장사다.
“자, 그럼 볼일도 끝냈으니 가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야드도 따라 나섰다. 어스름 상회를 벗어나 얼굴에 덧씌운 은하의 환영을 풀자 야드도 천변가면을 벗었다.
“바로 부지점장이 알선해 준다는 곳으로 가는 겁니까?”
“아니, 그쪽도 상대에게 말을 꺼낼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내일 가야지.”
어스름 상회가 연결해 준다고 한 곳은 일곱 교단 중 바다 교단이었다.
어스름 상회의 정보에 따르면 바다 교단의 발굴단은 모두 바로 며칠 전에 갑자기 유적에서 나와 대기 중이라 했다.
덕분에 도시에 있는 일곱 교단의 허가증 2개가 바다 교단의 것이었다.
부지점장도 그것 때문에 바다 교단을 교섭의 대상으로 잡은 듯했다.
“유안 군, 아무리 여유가 있다고 해도 대여가 어려울 것 같은데, 끼어 가는 걸로 가닥을 잡을 겁니까?”
야드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허가증 하나로 유적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최대 스무 명이야.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우리 일행인 일곱 명 모두 데려가 주진 않겠지.”
그리고 그런 짐 덩어리들과 함께 움직이는 건 사양이었다.
게다가 유적 초반 보안 지역을 지날 때 허가증의 보호를 받으려면 허가증과 너무 떨어져선 안 됐다.
들어가고 초반 지역만 벗어난다고 끝이 아니라 유적에서 나올 때도 생각해야 했다.
“그건 그렇죠. 어스름 상회에서 밑밥을 잘 깔아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을까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당연히 어스름 상회에서 떠벌리기 전에 숨어들어서 훔쳐 와야지.”
내 대답에 야드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예?”
“왜 그래? 이제 와서 순진한 척하는 거야? 그렇게 대놓고 수작 부리려는데 굳이 장단 맞춰줄 필요는 없잖아.”
어스름 상회가 다리를 놔주겠다는 행동의 이면에는 내가 허가증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은근슬쩍 허가증을 소유한 다른 조직들에게 알리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어스름 상회의 규칙엔 고객의 정보를 팔지 말라는 규칙 따위는 없었다.
다만 고객의 등급에 따라 그 고객의 가격을 높여 ‘팔라는 규칙’은 있었다.
즉, 규칙이 존재하는 한 누군가가 내 정보를 사지 않으면 내 정보를 누군가에게 넘기거나 흘릴 수도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동시에 내 정보를 팔 때는 'VIP’에 걸맞은 가격을 받아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어스름 상회의 규칙은 상회 주인 어스름 여왕이 피로 써 내린 규칙으로, 어길 시 죽는 것만 못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부지점장은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라는 규칙의 허점을 이용해 은근슬쩍 내 정보를 흘릴 수작인 거다.
그렇다면 그 수작을 이용해 줄 수밖에 없지 않겠나.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훔쳐내는 데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어스름 상회에서 유안 군이 허가증을 원한다며 바다 교단에 접근하면 의심을 살 수밖에 없을 텐데요.”
그 의문에 나는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아니, 결국 허가증이 도난당한다면 어스름 상회는 최선을 다해 날 변호해 줄 거야. 결국 훔치는 데 사용된 정보를 자신들이 팔아치웠으니 공범이 되는 걸 테니까.”
공범이 되는 순간 바하나드 지부는 허가증을 소유한 모든 조직에게 괴멸하게 될 터였다.
물론 의심 정도는 받겠지.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어스름 상회는 내 이름과 얼굴도 모르는데?
기껏해야 어스름 상회가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내가 사고판 거래 내역과 적어도 성인 남성 둘과 여성 하나, 어린아이 하나와 함께한다는 것뿐이다.
처음 어스름 상회의 조르딕의 동생인 양아치 지부장과 만났을 때 인원 정도나 알고 있겠지.
“자자, 어스름 상회가 부지런히 움직이기 전에 선수 쳐야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