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유적도시 (5)
내 물음에 야드와 부지점장은 놀라서 날 바라봤다.
“…도, 련님. 설마 제가 생각하는 방법은 아니죠?”
야드는 날 이름이 아니라 어색하게 도련님이라 부르며 물었다. 그의 시선에 나는 싱긋 웃었다.
“아니니까 걱정 마.”
물론 아닌 게 아닐 수도 있었다.
내 미소에 야드는 살짝 불신이 담긴 눈으로 날 바라봤지만 침묵했다.
“어스름 상회에서 대여가 불가능하다면 허가증을 지닌 다른 곳에서 빌려야지.”
내 말에 부지점장은 심호흡을 하며 물었다.
“…혹시 그 ‘빌린다’는 게 허락을 구하지 않는 형태의 대여는 아니겠죠?”
그냥 대놓고 훔칠 생각이 아니냐고 묻지?
고객을 가리지 않고, 판매한 상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든 관여하지 않는 게 어스름 상회의 불문율이었으나, 눈앞의 여자는 선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말없이 노려보는 내 시선에 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사과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했습니다. 이 도시에는 저희 어스름 상회도 무시할 수 없는 탐험단과 조직들도 있기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정확히는 ‘어스름 상회’가 아니라 ‘바하나드 지부’겠지. 지부가 완전히 개박살 나는 수준이라면 모를까, 고작 지부 하나를 위해 상회 전체가 움직이진 않는다.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니 한 번만 넘어가 드리죠.”
싸늘하게 경고한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여가 안 된다고 해도 끼어들어 갈 수 있도록 협상이라도 해봐야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근거리 통신 마도구로 지시를 내리며 테이블 위로 카탈로그를 펼치며 웃어 보였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카탈로그라도 살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좋은 상품들이 많이 있답니다.”
“좋습니다. 한번 살펴보죠.”
카탈로그를 살피는 사이 디저트 가게의 웨이트리스가 고급스러운 과자와 차를 가져왔다.
나는 간식을 먹으며 카탈로그 페이지를 대충 넘기던 중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검은색 카탈로그, 희귀나 고급도 아닌 일반 상품 중에 작은 브로치가 눈에 띄었다. 일곱 개의 작은 열매가 나 있는 나뭇가지 위에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붉은 새 모양.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 이걸 보고 싶네요.”
나는 브로치 외에도 등급을 막론하고 다른 물건들을 보여달라고 했다.
내 부탁에 부지점장은 알겠다며 통신 마도구로 어딘가에 연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트리스가 내가 지목한 물건들을 가져왔다.
아무래도 정보를 취합해 정리하는 것보다 창고에서 물건 꺼내 오는 게 더 빠른 건 당연하겠지.
부지점장은 내가 고른 물건 중 가장 비싼 마도구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객님께선 안목이 좋으십니다. 이 천칭은 ‘거짓의 심판’이라는 마도구로, 거짓말을 하는 상대에게 사용하면….”
나는 그녀의 설명을 한 귀로 흘리며 브로치를 살폈다.
이거 역시 ‘불사조의 정장(晶杖)’인거 같은데?
불사조의 정장은 아퀼라의 마도서와 동급의 마법 지팡이로, 일곱 가지 마법이 내장되어 있는 보물이었다.
물론 아무런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그저 비슷하게 생긴 브로치일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브로치를 손에 들자 불의 정령인 비암이 좋아 죽으려 하는 걸로 보아 진품인 듯했다.
“모양이 예쁘군요. 어디서 산 겁니까? 혹시 만든 장인을 소개받을 수 있습니까?”
나는 모른 척 브로치에 대해 물었고 부지점장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저희도 그 브로치를 만든 장인에 대한 정보는 모르겠습니다. 관심이 가신다면 한번 알아볼까요?”
부지점장은 오늘 호구를 제대로 물어볼 심산인지 물었다.
“아니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화염계 마법사 중 최고봉이라 손꼽히는 염해(炎海)의 대마녀가 가장 애지중지하던 고대의 보물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보물이 두 개나 있을 리 없을 텐데.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얼마가 되었든 무조건 사야 된다.
화염계 마법 지팡이 중 이것과 맞먹는 건 언데드가 된 태양의 현자의 지팡이 정도밖에 없다.
초열의 마도사라 불리는 아바스엘에게 좋은 선물이 될 듯했다.
내게는 이미 아퀼라의 마도서가 있으니 마법 지팡이는 필요 없다.
심지어 아퀼라의 마도서는 속성이나 특정 마법에 국한되지 않고 최적의 성능을 발휘해서 내겐 더 좋았다.
“이것들 모두 사죠.”
나는 브로치와 천칭을 비롯해 자잘한 마도구와 마법서를 구매하고 바로 10만 듀플짜리 대금화 14장으로 값을 치렀다.
“감사합니다.”
대금의 절반가량은 천칭 값이고, ‘불사조의 정장’으로 추정되는 브로치는 고작해야 2천 듀플 정도에 불과했다.
이게 마법 지팡이가 맞는다면 금화 몇 개가 아니라 대영지를 살 수 있는 돈을 지불해도 얻지 못할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나는 아공간에 쓸어 담으며 카탈로그에 집중했다. 보물이 더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집중하며 기억과 대조하고 있는 사이 마침내 내가 원래 방문한 목적인 정보가 도착했다.
“정보의 경우 선불일 수밖에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부지점장의 말에 나는 금화 자루를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꽤 두툼한 서류를 확인한 나는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과연 어스름 상회도 몸 사릴 만하네.”
허가증을 소유하고 있는 집단의 면면이 대단했다.
국가에서 제작한 유적 출입 허가증은 총 50개.
개중 20개는 왕실 산하 고고학 발굴단과 시정부가 여분으로 가지고 있고, 나머지 30개가 자격을 증명한 민간 사업체에 풀려 있다.
어스름 상회에서 6개, 마탑에서 5개, 일곱 교단에서 각각 2개씩, 아이젤 탐험단에서 2개, 위즐 백작가에서 3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곱 교단은 동맹을 맺고 있으니 하나의 집단으로 봐야했다.
즉 유적 안에선 총 여섯 개 집단, 아니. 어스름 상회에서 3개를 장기 대여 중이라 했으니, 최대 아홉 개의 크고 작은 집단이 유물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지금 도시에 있는 건 마탑 1개, 일곱 교단 4개, 위즐 백작가 1개인가.”
어스름 상회 것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모두 유적 안에 있는 건가, 아니면 자기 고객들이라고 숨겨주고 있는 건가.
알아보고 일부러 숨긴 거라면 괘씸죄를 적용해야지.
굳이 주인 있는 허가증이 아니라 뒤탈이 덜한 시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주인 없는 여분의 허가증도 있지 않느냐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 여분의 허가증의 보관 장소가 문제였다.
“시정부가 머리 좀 썼군요. 유적 출입 허가증을 유적 내부에 보관할 줄이야.”
야드는 시정부의 재기 발랄한 대처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입구부터 유적 초입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금고 입구나 마찬가지니까.”
여분의 허가증을 훔치는 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어렵겠다.
“어디가 그나마 만만하려나.”
내가 미소 지으며 중얼거리자 부지부장은 불안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저,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다리를 놓아 드릴까요?”
“돈 받고 말입니까?”
내 물음에 부지점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VIP를 위한 서비스로 이 정도는 당연히 무료로 해드려야죠!”
웃기는 소리 하고 있다.
그저 내가 훔쳐서 일을 벌이는 걸 막고 싶을 뿐이면서.
이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이라 할 수 있는 허가증을 도난당한다면 당연히 이런 세세한 정보를 취급하는 어스름 상회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내가 들킨 뒤, 정보를 어스름 상회에서 샀다고 실토했다가는 시정부를 포함한 이 도시의 모든 집단이 이 도시에서 어스름 상회를 지워 버리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다.
그럼 어스름 여왕이 참 좋아하겠군. 이 지부의 지부장과 부지부장을 박제해서 부하들 앞에서 두고두고 기념할 정도로 좋아하겠어.
“글쎄, 하는 걸 봐서?”
내가 싱긋 웃자 부지점장은 불길함을 느꼈는지 흠칫 떨었다.
* * *
유적 도시의 시장은 꽤나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다른 도시의 시장과 가게마다 달리 기묘한 장식과 조각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연식이 있는 골동품 같았다.
파는 물건도 연원을 알 수 없는 유물과 같은 물건이란 점이 그 분위기를 더했다.
“와아! 제이드 오빠! 저거 보세요!”
“하하, 천천히 갑시다. 유안도 느긋하게 둘러보라 하지 않았습니까.”
실루아는 신기한 듯 가게 사이를 지나다니며 기웃거렸다. 그러다 미세하게나마 마력을 띠는 물건을 발견하면 실루아가 집어 들었다.
“제이드 오빠! 이거 사줘요!”
“그게 마음에 듭니까?”
제이드도 미소 지으면서 실루아가 든 물건을 훑었다.
“하지만 과소비하는 건 좋지 않은데요.”
“히잉~! 기념품으로 가지고 싶어요!”
“아아, 별수 없군요. 얼마인가요?”
제이드는 천연덕스럽게 떼쓰는 동생을 위해 지갑을 여는 마음 약한 오빠를 연기하며 마도구로 추정되는 것들을 구매했다.
괜히 이 도시에서 감정을 하는 기색을 보이며 조금이라도 조바심을 내비치면 상인들은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팔지 않았다.
오랜 세월 바하나드에서 장사한 그들은 그런 물건들이 이따금씩 일확천금을 선사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오빠, 이 가면 웃기지!”
실루아는 어리광을 가장하며 가면을 들어 쓰는 시늉을 했다.
유안에게 물든 건 제이드만이 아니었다.
일행 중 유안에게 가장 많이 배우고 영향을 받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실루아였다.
제이드는 한눈에 가면에 씐 저주를 알아보고는 폐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능청스레 소동화가 담긴 지갑을 열었다.
“하하하하! 그러네요. 사고 싶다는 말이죠? 끄응, 용돈이 허락하려나 모르겠군요.”
“와아! 사랑해요, 오빠!”
시장 거리에는 유적 도시답게 꽤나 쓸 만한 고대 마도구가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 언제 발동될지 모를 알 수 없는 저주가 뒤섞인 물건은 더 많았다.
“…꽤나 위험한 시장이군요.”
제이드는 중얼거리며 실루아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활기차게 돌아다니며 물건을 쓸어 담자 상인들은 실루아에게 호객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꼬마 아가씨! 이거 봐봐! 재미있게 생기지 않았어?”
“아니, 그게 뭐가 재미있나? 꼬마 아가씨! 이건 어때?”
상인들에 둘러싸인 실루아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시장을 둘러보던 제이드는 미묘한 느낌을 감지했다.
시장 대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뒷골목, 오래된 돌계단을 내려가자 눈에 띄지 않은 작은 무기상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본 제이드는 이곳이 유안이 한번 들러봐야 한다 말했던 숨겨진 곳 중 하나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술통으로 사용하는 오크통에 먼지 낀 낡은 검들만 가득 담겨 있을 뿐, 자리를 지키는 주인도 없었다.
제이드는 가게 주인을 찾는 것도 잊고 자신의 감각이 시키는 대로 오크통에서 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검을 들기 전만 해도 느껴졌던 미묘한 감각이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검에서 형용할 수 없는 악의(惡意)와 살기(殺氣)가 범람하듯 제이드의 몸을 지배하려 들었다.
제이드는 마력을 끌어 올려 정체 모를 마검(魔劍)에 대항하려 했다.
“미안하다, 소년.”
그러나 가냘픈 손이 제이드의 손에 들린 마검을 채 가니 마검과의 연결이 쉽사리 끊어졌다.
“이런 가게는 먼저 잡은 이가 임자라는 걸 알지만, 이 검을 양보해 줄 수 있겠나?”
자신의 감각을 희롱하듯 배후를 잡은 목소리에 제이드는 화들짝 놀라 뒤돌아섰다.
자신의 손에서 마검을 낚아챈 정갈한 흑발의 미녀를 본 제이드는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스승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