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166화 (166/214)

제166화. 유적도시 (4)

“이곳도 오랜만이군.”

후드 망토를 깊게 눌러쓴 앵무새 수인, 필리드라이온 로툴러스는 저 멀리 보이는 도시 중앙의 거대한 고대 건축물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의 미소에 그의 옆을 나란히 걷던 짙은 푸른빛이 감도는 금발의 소녀가 물었다.

“바하나드에 오셨던 적이 있었나요?”

그녀의 물음에 로툴러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예전에 고고학자들에게 고용돼서 그들을 호위한 적이 있었지. 꽤 벌이가 쏠쏠했어.”

“어머, 그래서 이번에 제 호위 역이 되신 거군요.”

소녀의 물음에 로툴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물론 나는 반쯤 길잡이일 뿐이고, 실제로 아멜리 공을 호위하는 건 공의 성기사들이지만.”

로툴러스는 그렇게 말하며 뒤따라오는 신성력이 옅게 흐르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을 흘끔 바라봤다.

“호호, 그래도 로툴러스 님의 실력은 믿고 있어요. 무려 그 이름을 대륙 전역에 떨치시는 ‘오색의 용병왕’이시잖아요.”

로툴러스는 나라 없는 아홉 왕, 무국구왕(無國九王) 중 하나인 용병들의 왕이었다.

“하하하하. 용병왕이라니, 듣기만 좋은 허명일 뿐이야. 용병들의 생리를 알면 용병에게 왕이란 호칭 따윈 붙일 수 없을 텐데 말이야.”

용병들은 돈에 자신들의 무력을 판매하는 이들이었다.

일종의 장사인 만큼 신용을 중히 여기지만 누구나 될 수 있기에 파락호와 다르지 않은 이들 또한 넘쳐났다.

돈을 위해서라면 어제의 동료와 창칼을 마주 대며 서로 죽이려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업계였다.

“겸손하시네요. 저는 용병 업계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그래도 들려오는 소문 정도는 알고 있어요. 로툴러스 님의 용병단은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들을 이룩한 걸로 유명한 걸요.”

스스로가 허명이라 말했지만 로툴러스가 지닌 위명과 그에 따른 존중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를 단장으로 모시는 오색의 용병단의 단원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용병들이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로툴러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용병업계를 휘어잡고 정말로 왕처럼 군림할 수 있다는 것쯤은 아멜리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칭찬에 로툴러스는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게 어디 나 혼자 이룬 건가? 나 대신 용병단을 운영하는 부단장과 단원들이 열심히 한 거지. 난 무식해서 조직을 운영할 깜냥도 안 되고 말이야.”

로툴러스의 겸손에 아멜리는 싱긋 웃었다. 그가 정말로 왕처럼 군림하고자 했다면 자유분방한 용병들에게 지금과 같은 존중과 존경을 받지 못했으리라.

“오히려 그런 점이 로툴러스 님이야말로 왕이라 불릴 만하다고 생각해요.”

“어흠! 이런 낯간지러운 말은 그만하고 도시에 들어가 쉬지. 잡스러운 준비는 광대 녀석이 다 한다고 했으니, 일을 시작하기 전까진 느긋하게 기다리자고.”

부끄러워하는 로툴러스가 걸음을 재촉하자 아멜리는 키득거리며 뒤따랐다.

“같이 가요.”

* * *

“유적에 들어간다라, 유안 군은 어떻게 유적으로 들어갈 생각입니까?”

야드의 물음에 나는 마지막 빵 조각을 먹고 블랜디를 섞은 홍차로 입가심을 하며 대답했다.

“합법적인 방법과 불법적인 방법, 두 가지 모두 생각해 봤어.”

합법적인 루트는 유적 관리소에 인가를 받고 정식으로 출입하는 방법 밖에 없다. 반면 불법적인 루트는 꽤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합법적인 방법은 하루 이틀 만에 가능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제이드의 지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유적이 중요하다 보니 관리가 빡빡하게 굴긴 할 거야.”

나는 내 왕족 신분패와 달랑타가 준 위즐 백작가의 손님패를 만졌다.

사실 합법적인 방법 중에서 권력으로 찍어 누르는 게 있기에 시간은 얼마든지 단축할 수 있긴 했다.

다만 공식적으로 나는 실종 상태고 블란츠바그 후작가나 위즐 백작가의 이름을 팔아먹기에는 부담이 크다.

“그럼 밤중에 몰래 들어가나요?”

길버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마지막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어.”

이 세계는 온갖 마법과 신비가 판치는 곳이다.

당연히 관리소도 경비의 눈을 피해 몰래 들어가려는 도굴꾼들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다.

위험한 유적 내부에 존재하는 안전 구역을 왕실 마법사와 병사들이 점거해 출입 허가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녀석들은 안전 구역을 이용하지 못하게 막아둔 상태다.

게다가 발굴이 완료된 길목 중간중간에 벽을 설치해 둬서 허가증이 없으면 크게 우회하거나 아예 막히는 경우도 있었다.

귀찮지만 유적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려면 허가증은 어떻게든 구해놔야 했다.

“오빠, 벽을 쳐놨어도 저희라면 어지간해선 뚫고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안전 구역도 불침번을 서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실루아의 의견에 프레시아와 제이드, 길버트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견에 야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 유적지는 귀한 것들이 많이 발굴돼서 그렇게 허술하게 두진 않을 겁니다.”

그 말에 아바스엘도 동의했다.

“저 안에 설치한 벽과 방위 마법은 마탑의 대마법사들은 물론, 마도팔현의 현자들도 손을 보탰단다. 특히 방위 기술은 만병의 현자와 선생님께서 크게 손을 댄 걸로 알고 있다.”

게오르와 제이올린이 손을 댔다라. 그 둘은 굵직한 일에 안 끼는 곳이 없었다. 하기야 그러니 그런 명성을 쌓은 거겠지만.

“침입자 대비책은 유적 초입 지역을 지나면 없겠지만, 허가증이 없으면 그 초입 지역을 지나가는 동안 지옥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겠네.”

내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허가증을 가지고 들어가는 게 속 편하겠습니다.”

“도련님께선 어떻게 허가증을 얻으실 생각이신가요?”

프레시아는 내가 반드시 허가증을 손에 넣을 거라고 확신하는 듯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해 봤다.

“돈으로 살 수 있으면 사야겠지.”

돈으로 허가증을 구매하는 건 불법적인 일이었다.

돈으로 살 방법은 대충 두 가지 정도 있다.

그래도 돈으로 살 수 없을 때도 생각해 둬야겠군.

“일단 허가증을 구하는 건 내가 해볼 테니 인원을 나눠서 유적지에 들어갈 준비부터 하자. 아바스엘은 마탑 바하나드 지부에서 유적 탐사에 필요한 마도구와 마석을 구매해 줘. 필수적으로 사야할 건 알려줄게.”

“알겠습니다.”

“실루아와 제이드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유적지에서 나온 것들이나 마력이 깃든 물건이 보이면 사 오고. 꽤 많이 숨겨져 있을 거야.”

이왕 유적 도시에 왔으면 구할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구해야지. 소설에서 언급된 곳을 일러주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버트와 프레시아는 야영 장비와 발굴 장비, 그리고 보존 식량을 넉넉히 사 와.”

호레이즌에게 여러 상황에 대해 배운 프레시아라면 나보다 확실히 물자를 구해 올 거다. 길버트는 프레시아에게 배우라고 같이 보냈다.

아공간 팔찌는 너무 대놓고 사용하기엔 너무 비싼 물건이라 짐꾼이 하나쯤 필요하기도 했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는….”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야드와 함께 허가증을 얻으러 움직일 거야.”

내 대답에 길버트는 야드에게 말했다.

“일이 터지면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하하, 든든하군요.”

“그럼요! 저는 도련님의 호위 기사인걸요!”

아니, 다들 너무하지 않아? 마치 내가 사고 칠 거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물론 아예 안 칠 생각은 아니었지만.

* * *

내가 지시한 대로 다들 여관을 나서자 나는 야드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허가증을 사신다고 하셨는데 어디서 살 수 있는지 아십니까?”

야드의 물음에 나는 어스름 상회의 임시 VIP 카드를 꺼냈다.

“어스름 상회라고 알아?”

“알고 있습니다. 어스름 여왕의 암거래 상단이죠? 저도 이따금씩 이용하곤 했는데 이곳에 지부가 있습니까?”

불법적인 거래를 하는 어스름 상회가 보통 어떤 식으로 자신들의 지부를 고객들에게 알리는지 궁금했지만, 하찮은 궁금증은 넘어가기로 했다.

“당연하지. 대도시에는 거진 다 있을걸? 그리고 이곳만큼 발굴품을 구하기 쉬운 곳도 없잖아. 지부 규모가 꽤 클 거야.”

어스름 상회의 바하나드 지부는 등잔 밑이 어둡다고, 유적지를 관리하는 국가 시설 바로 옆에 있었다.

손님으로 북적이는 화려한 고급 디저트 가게가 바로 바하나드 지부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웨이트리스가 미소 지으며 몇 명이냐 물었다.

“여섯 명. 다른 사람들은 나중에 올 겁니다. 아, 한 명은 먹보라 그런데 룸으로 안내해 줄 수 있습니까?”

접촉 키워드는 ‘방문객의 세 배수, 먹보, 룸’이었다.

“네, 룸 말씀이시죠?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자리는 ‘창가가 있는 자리’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니요. ‘조용’했으면 좋겠군요.”

“조용한 자리로 안내드리겠습니다.”

웨이트리스가 안내한 2층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어스름 상회에 방문했습니다.”

마지막 키워드는 혹시 모를 우연을 방지하기 위해 어스름 상회를 언급해야 했다.

내 대답에 천장이 열리며 사다리를 타고 정장 차림의 여자가 내려왔다.

“본 지점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VIP 카드를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내 접촉 키워드가 VIP 전용이었던 건가. 대도시의 지점이라 그런지 나눠서 관리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바로 임시 VIP 카드를 꺼냈고, 카드를 확인한 그녀는 가방에서 네 가지 색상의 카탈로그를 꺼내며 맞은편에 앉았다.

“확인되었습니다. 바하나드의 부지점장, 쥴리아라고 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유적 출입 허가증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내 말에 부지점장 쥴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송구한 말씀이지만 유적 출입 허가증은 상품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 그쪽의 사훈(社訓)아닙니까?”

내 말에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저희 측에서도 ‘재고’가 없는 이상 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최대한 빨리 구한다고 해도 반년 정도는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판매해 드리겠습니다.”

반년이라, 돈을 쏟아 붓는다고 해도 2개월 이상은 걸린단 말이군. 그렇게 기다리고 있을 시간은 없다.

“그렇다면 구매가 아니라 ‘대여’를 하죠.”

어스름 상회에서 허가증을 안 가지고 있을 리 없다.

도시 중앙의 유적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만큼, 거위 주인의 눈을 피해 거위 둥지에 숨어 들어갈 방법 정도는 마련해 뒀을 거다.

내 요구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고객님께선 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확실히 저희 측에 판매용은 없지만 대여용이 없진 않습니다.”

“혓바닥이 길군요.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취향이 아닙니다. 대여용도 모두 품절입니까?”

그녀는 내 추측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희 측에서 확보한 허가증은 총 여섯 개. 그중 세 개는 저희 상회 소속의 발굴단이 유적 안에서 사용 중이고, 다른 세 개는 외부 발굴단에 장기 대여 중 입니다.”

“저는 그리 길게 사용할 게 아닙니다. 상회 소속 발굴단은 언제쯤 나오죠?”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발굴단이 한번 들어갈 때 적어도 반년 정도는 유적 안에 머뭅니다. 일정상으로는 귀환하는 건 4개월 뒤가 되겠군요.”

4개월이라. 그 정도면 합법적인 정규 루트로 허가증을 손에 넣은 다음 유적까지 싹 털어버린 후 도시를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럼 방향을 살짝 틀자.

“그럼 유적 밖에 있고, 이 도시 안에 있는 모든 허가증의 위치는 구매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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