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유적도시 (3)
브류타를 떠난 지 대략 나흘 쯤 지난 지금, 나는 마차 의자에 몸을 기대 게오르의 연구 일지와 씨름했다.
아무래도 브류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마력량을 늘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내 보험이 먹혀들고 버밀리온이 각성해서 다행이지, 만전 상태로 막대한 흑마력을 다루는 6사도 어기스트림을 상대한다면 지금으로선 답이 없다.
게다가 9사도 아흘레탄 같은 괴물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도련님, 바로 앉으세요. 그렇게 앉으면 허리 아프실 거예요.”
프레시아가 내게 깎은 과일을 입에 물려주며 조언하자 나는 자세를 바로 해 앉았다.
“어, 응. 음, 맛있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다시 조금씩 미끄러지듯 구부정한 자세를 취했다.
마력회로를 개발할 연구 때문에 프레시아의 훈련 시간을 줄이고 제이드와 아바스엘과 머리를 맞대는 시간을 늘렸다.
프레시아는 살짝 시무룩해져서 서운해하는 것 같았지만 내게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엘, 이거 이쪽으로 회선을 떼 오면 어떨 것 같아?”
브류타에서의 일로 흑마법서를 읽던 아바스엘은 책을 덮고 내가 그린 설계도를 살폈다.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다만 여기서 회선을 돌리면 이쪽 인근에 마력 흐름이 부족해질 것 같습니다. 여기서 레이어를 한 층 더 쌓아서 따로 마력을 수급하는 건 어떨까요?”
“으음~ 그럼 여기에서 간섭 현상이 벌어지지 않으려나?”
나와 아바스엘의 대화에 열심히 마력의 밀도를 높이는 수련을 하던 제이드가 슬쩍 끼어들었다.
“간섭 현상이 문제면 사이에 마력 부도체를 끼워 넣죠?”
“아, 그럴까? 하지만 그럼 너무 크기가 커지지 않으려나?”
“제가 전에 스승님과 연구하면서 만들어둔 얇은 마력부도체 판이 있습니다. 이걸 사용해 보죠.”
제이드가 꺼낸 얇은 금속판에 나와 아바스엘, 제이드는 보다 활발하게 토론을 이어갔다.
“슬슬 도시가 보입니다.”
마부석에 앉아서 바람을 쐬고 있던 야드의 목소리에 나는 마차 바닥에 깔았던 설계도면을 접었다.
나흘간 내리 씨름했더니 그래도 설계는 거의 완성 단계였다.
창밖으로 거대한 신화시대의 유적과 그 유적을 둘러싼 거대한 도시가 보였다.
유적도시 바하나드는 유적지를 발굴하기 위해 탐험가들이 모이면서 생긴 도시였다.
도시 중앙의 유적은 발견 된 지 2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빨리 도시로 들어가자. 규모가 있는 대도시라 좋은 여관도 있을 거야.”
내 말에 야드는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푹신한 침대도 좋지만 따뜻한 물로 느긋하게 씻고 싶네요.”
제 아무리 공간 확장 마차와 각종 마법으로 편의성을 챙겼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따뜻한 요리와 편한 잠자리는 아공간에 짐을 가지고 다녀서 마련할 수 있었지만, 목욕까지는 무리였다.
기껏해야 데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다.
예카트리체가 내게 준 오두막이나 실루아의 인형의 숲 같은 경우 이동하면서 원하는 때에 설치하기에는 따져야 할 요소가 너무 많았다. 개선점을 찾아봐야겠군.
“그런데 저 도시도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니겠죠?”
길버트의 물음에 다들 날 바라봤다. 그 시선들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에이, 설마 그러겠어?”
내 대답에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의 무기와 물자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아니, 반응이 너무하네! 저 유적지에서 원하는 것만 챙겨서 냉큼 도망칠 거다.
암, 그렇고말고.
* * *
검푸른 빛이 감도는 남색 머리칼의 소녀는 언덕 아래로 보이는 북적거리는 도시를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저기가 탐험가들의 도시, 바하나드군요?”
소녀의 물음에 그녀의 곁을 지키던 나이 든 성기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이곳에 와버렸군요. 교황 성하께서 아시면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벌써부터 두렵습니다.”
“너무 걱정 마시어요. 교황 성하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랍니다. 그도 그럴 게 무려 신탁이 있었는걸요.”
소녀의 낙천적인 대답에 늙은 성기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만이 들었던 그 신탁 말씀이시군요.”
성기사의 의구심 섞인 말에 소녀는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어라~? 지금 절 의심하시는 걸까요? 이래봬도 전 성녀랍니다?”
고급스러운 장갑을 벗으며 손등에 새겨진 성흔을 내보이자 늙은 성기사는 기겁하며 다시 장갑을 씌웠다.
“뭐 하시는 겁니까! 장갑을 함부로 벗지 않기로 이 늙은이와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오호호호! 잠깐 벗는 것 가지고 설마 문제라도 생기겠어요? 데일호르그 경도 참. 걱정도 많으셔라.”
소녀의 장난기 가득한 물음에 백발이 성성한 성기사, 데일호르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발 주의 좀 해주십시오. 안 그래도 요즘 태양 교단에서 악마 숭배자들의 은신처를 들쑤시고 다녀서 조심하셔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소피아 성녀님.”
그녀가 끼고 있는 장갑은 성흔에서 나오는 신성력을 막아주는 성물(聖物) 중 하나였다.
신에 의해 성흔을 내려 받은 성자와 성녀는 굳이 힘을 발휘하지 않아도 성흔에서 숨 쉬듯 강력한 신성력이 흘렀다.
안전한 신전에 있을 때야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은밀히 외부를 돌아다닐 때는 성흔의 신성력은 위험했다.
“저도 알고 있답니다. 그저 제 직감이 말하기를 문제없다고 하길래 잠깐 벗은 것뿐이에요. 이 장갑, 신성력을 억제하는 만큼 꽤 갑갑하단 말이죠.”
그녀의 말에 데일호르그는 입을 다물었다.
강력한 신성력은 매우 드물게 보유자에게 독특한 이능을 선사했는데, 소피아의 경우는 예지에 가까울 정도의 초직감(超直感)이었다.
신성력과 연관된 이능인 만큼 신성력을 소모할수록 직감이 무뎌졌다.
하지만 지금처럼 완전한 컨디션이라면 그녀의 말을 신뢰할 수 있었다.
“그래도 도시에 들어가거든 주의 부탁드립니다.”
“예, 예, 알겠답니다~”
장난스러운 대답에 늙은 성기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한 소녀와 늙은 성기사는 말을 타고 도시로 들어갔다.
* * *
“아이고, 허리야.”
나는 마차에서 내리며 허리를 부여잡았다.
일행들이 내리자 아바스엘이 마차를 조종하며 도시 중심지에 위치한 큼지막한 여관에 붙어 있는 차고지로 향했다.
“그러니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계속 그렇게 앉으면 허리 아프실 거라고요.”
“아하하, 왠지 모르게 그 자세가 편해서 말이지.”
내가 웃어넘기자 프레시아는 잠시 만져 주겠다며 날 뒤에서 안듯 팔로 내 몸을 고정했다.
“잠시 놀랄 수 있어요.”
으드드득-!
“커억!”
도저히 허리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가 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프레시아가 손을 댄 내 허리에서 순간적으로 마력이 침투하는 게 느껴지자 약간의 통증과 시원함이 전신으로 퍼졌다.
“계속 아프신가요?”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기지개를 켜듯 척추를 늘려봤다.
“아니, 신통하네.”
방금 전까지 느껴졌던 요통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에헴! 저희 가문 비전 마사지술이에요.”
프레시아는 자랑스레 으스댔다.
이런 마법 같은 마사지 기술을 보유 중이라면 좀 더 자랑해도 된다.
“나중에 또 부탁해도 돼?”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싱긋 웃었다.
“너무 자주 하는 것도 좋지 않으니 자세 교정부터 해주세요.”
“하하, 그건 노력해 볼게.”
바른 자세가 중요하긴 했지만, 뭔가에 집중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흐트러진단 말이지.
“유안 군, 방 잡았습니다.”
먼저 내렸던 야드가 여관에서 나오며 내게 열쇠를 건넸다.
“귀족 신분증이 좋긴 하군요. 보통 이렇게 고급 여관에서 7인 이상 머물 수 있는 스위트룸은 잘 안 빌려주는데, 신분증 덕분에 수월하게 빌렸습니다.”
탐험가들의 도시, 바하나드는 왕국 남부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인 만큼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관도 다수 존재했다.
야드가 사용한 신분증은 데미웨이의 협조를 통해 얻은 귀족 신분증이었다.
방계 가신 가문의 것이었지만 그래도 후작가의 인장이 찍혀 있는 만큼 적당히 좋은 방을 잡을 수 있었다.
물론 대귀족들이 머무는 그런 방은 잡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귀족 신분증을 사용했으니 이번엔 철부지 귀족 도련님이 되어볼까.”
마차를 주차하고 망아지 시리즈를 여관의 마구지기에게 인계한 아바스엘이 다시 돌아오며 농담했다.
“하하, 그럼 저는 집사가 되어 보겠습니다.”
“좋지, 엘 집사.”
여관 안으로 들어가자 나름 고급스러운 여관답게 컨시어지(Concierge:호텔 안내인)가 나와 안내했다.
안내를 따라 마법 승강기를 타고 스위트룸이 있는 층까지 올라간 나는 컨시어지에게 팁을 건네며 점심 식사를 방으로 가져와 달라 부탁했다.
1000듀플짜리 소은화 하나를 받은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스위트룸은 꽤나 넓고, 방도 넷에 화장실과 욕실도 별도로 존재했다.
“이렇게 좋은 여관에 머무는 건 처음입니다. 서커스 생활을 하다 보면 항상 천막생활을 했거든요.”
그야 단체 생활을 하면 누구 하나가 과한 특혜를 받는 건 어려웠다.
부단장이라 해도 서커스와 단원들을 사랑하는 만큼 특혜를 줘도 스스로가 거절할 사람이었다.
“고생했겠네.”
내 말에 야드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고생이랄 건 없었습니다. 적어도 유안 군의 여정같이 극적인 경험은 해볼 일은 없었거든요.”
“어흠! 일단 당장 사용할 짐부터 풀고 쉬자. 마차가 아무리 흔들림이 적어도 며칠씩이나 타는 건 힘들잖아.”
내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리자 야드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도 내 여정이 꽤나 고생스러울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바스엘과 마터호른의 잊혀진 신전을 경험하면서 각오는 마쳤기에 한 농담이었다.
각자 방을 나누고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 사이 컨시어지가 점심 식사를 가져왔다.
스위트룸 거실에 음식을 차리고 식사를 시작하는데, 실루아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유안 오빠가 만들어준 게 더 맛있어요.”
나는 실루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싱긋 웃었다.
“하하, 말은 고마운데 사 먹을 수 있을 때는 사 먹을 거야.”
설거지는 내가 안 한다고 하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 거다.
“히잉.”
“그렇게 봐도 안 돼.”
귀족들도 손님으로 받는 여관답게 맛만 좋구만.
내 단호한 말에 왜인지 실루아뿐만 아니라 다들 아쉬워했다.
“주군, 탐험가들의 도시에서는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바스엘의 물음에 다들 식사를 하던 손을 멈추고 내게 집중했다. 그 시선에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유적 건축물을 보며 대답했다.
“글쎄, 이 도시에서 구하고 싶은 물건이 하나 있는데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아마 아직 저 유적지 안에 잠들어 있을 거거든.”
내 말에 일행들은 고개를 돌려 창밖의 유적지를 바라봤다.
신화시대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유적, ‘별자리의 미궁’은 발견된 지 2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만큼 대륙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거대 유적이었다.
저 유적 안에선 아직도 고대의 아티팩트와 오파츠들이 발굴되었다.
이따금씩 대마법사들도 탐내는 강력한 기물(奇物)이 발굴되기도 했다.
“역시 여행의 꽃은 탐험이지.”
약 120여 년 전에는 전쟁의 발단이 될 정도로 중요한 유적이라 국가 차원에서 출입을 통제했기에 우선 들어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