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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164화 (164/214)

제164화. 유적도시 (2)

다행히 미리 대비를 해둔 덕분에 아바스엘이 마개조한 마차와 실루아의 망아지 시리즈는 흠집 하나 없이 무사했다.

나는 도시 터를 휘감고 있는 신성력을 순도 높은 보석에 그러모았다.

그러고는 행정관에게 이단 심문관이 오기 전에 도시 사람들을 빨리 도망 보내라고 경고하고 마차를 타고 바로 도시 터를 떠났다.

기적을 발휘하고도 잔뜩 남은 아까운 신성력을 버려두고 갈 수 없었다.

신성력이 담긴 보석은 나중에 잘 써먹어야지.

“장마도 이제 슬슬 끝나는군.”

구름 낀 하늘은 틈을 벌리며 햇빛이 땅에 내려앉도록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

남쪽에서 덥고 습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비가 내린 직후라 그런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제이드, 몸은 좀 어때?”

내 물음에 마차 구석에서 명상을 하던 제이드는 한쪽 눈을 뜨며 미소 지었다.

“최고급 성수로 치료해서 그런지, 최상의 컨디션입니다.”

흑마력에 당한 게 문제였지, 상처 자체는 중상이 아니다 보니 회복이 빨랐다.

“아흘레탄을 상대하고 그 정도로 끝났으니 운이 좋았어.”

새벽별 교단의 9사도 아흘레탄은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전투 마법사다.

사전 준비 없이 순수하게 마법 전투만 본다면 세계 최강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녀가 사용하는 마법은 단순한 만큼 연산이 빠르고 간섭하거나 막기 굉장히 까다롭다.

게다가 마력량과 마력 농도는 바하무트나 예카트리체보다 높았다.

“그런 괴물은 정면에서 상대하는 게 아니야.”

비록 환경적 이점을 넘긴 상태였다지만, 완전히 성장한 제이드와 프레시아도 동료들과 함께 덤비고도 고전한 괴물 중의 괴물이다.

그런 괴물은 철저하게 함정에 빠트리고 상극의 힘으로 대항하지 못하게끔 빠르게 짓눌러 죽여야 했다.

“그 여자가 그 정도였습니까? 어쩐지 너무 강하더라.”

야드는 혀를 내둘렀다.

“그러니까 실루아도 그만 기운 내.”

내가 등을 토닥이자 실루아는 우물쭈물했다.

“하지만… 그 많은 마석을 다 쓰고, 중요할 때 유안 오빠를 지원하지 못했는걸요.”

내 계획대로 날 도우러 오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나는 그런 실루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못 올 경우도 상정했었으니까. 오히려 잘했어.”

오히려 망설이지 않고 제대로 판단해 전력을 다해서 아흘레탄을 몰아붙인 걸 높이 평가했다.

날 도울 걸 상정해서 마석을 아꼈다면 역으로 결전 병기인 인형의 성까지 파손됐을 수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마석만 소모하고 끝난 것에 안도해야 할지도 몰랐다.

내 말에 실루아는 다시 기분이 좋아진 듯 헤실헤실 웃었다.

“그리고 이번 일로 소모한 마석과 성수는 다시 구할 수 있으니까.”

다행히 6사도와 11사도의 사체를 내가 온전히 얻을 수 있었다.

두 사도의 수급을 바하무트를 통해 추기경에게 팔아 치운다면 사용한 성수와 마석쯤은 몇 배로 되돌려 받을 수 있다.

아니, 단순히 모가지뿐만 아니라 사도 토벌의 공적까지 그대로 팔아넘긴다면 성수와 마석은 물론,  몇 가지 권리까지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곳간이 비었으면 바로 다시 채워 넣어야지.

프레시아는 데스 나이트와 싸우고, 멀리서 버밀리온의 검에 심상이 깃드는 것까지 본 후로 느낀 게 많은지 명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넌 왜 눈치 보고 있냐?”

내가 길버트에게 묻자 길버트는 머뭇거리다가 죄송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 놓쳤습니다.”

“놓쳐? 뭘?”

“그, 있잖습니까. 저랑 싸운 그 변태 주교라는 놈.”

여장 변태 주교 노르드.

아, 지금은 주교는 아니라고 했던가.

“놓쳤다고? 어떻게?”

신성력으로 가득 차서 도망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을 텐데.

내가 어이가 없어 되묻자 길버트는 뺨을 긁적였다.

“그게, 죽인 줄 알았는데 죽은 척했던 거였습니다. 양팔을 자르고 심장을 찔렀는데, 설마 안 죽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노르드는 도마뱀처럼 재생력이 뛰어나서 팔을 자르는 정도로 제압하는 건 어려웠다.

게다가 심장도 오른쪽에 있어서 왼쪽을 찔러봤자 죽지 않는다.

“아아, 그 정도면 방심할 만하지. 다음에는 그냥 모가지를 썰어버려. 그럼 아마 죽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꼭 목부터 자르겠습니다!”

길버트는 주먹을 움켜쥐며 다짐했다.

“자, 그럼 다음 목적지는 탐험가들의 도시, 바하나드야.”

다음 목적지를 이야기하는데 제이드가 손을 들었다.

“그런데 해주시기로 한 요리는 언제 먹을 수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여관에서 일이 끝나면 각자 원하는 요리를 해주기로 했었지.

“와! 유안 오빠 요리!”

“요리하시는 건가요? 도련님.”

어느새 실루아와 명상하던 프레시아도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으며 반짝이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이며 프라이팬을 꺼냈다.

“한 번에 여러 음식 하는 건 귀찮으니까 순서대로 해줄게.”

내 선언에 다들 순서를 정하기 위해 모여서 가위바위보를 시작했다.

다음 일정보다 요리가 먼저냐?

* * *

“콜록! 콜록!”

새벽별 교단의 9사도 아흘레탄은 잔기침을 하며 입으로 옅게 검은 피를 흘렸다.

폐부 깊숙이 신성력이 침투한 탓에 호흡이 살짝 힘들었지만, 그녀의 심후한 마력이 금세 신성력을 몰아낼 터였다.

오히려 폐에 스며든 화끈거리는 고통이 악마가 선사한 피로감과 나태함을 잠시 잊게 해주어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땅에 작은 원반 패를 내려놓고 마력을 흘려보냈다.

“연결하라. 334, 545, 129, 333, 186.”

마법 주문을 읊듯 내뱉은 숫자와 원반 패가 공명하며 그녀를 어둠으로 뒤덮었다.

어둠 속에서 푸르른 불꽃이 피어오르자 푸른 불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방향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생겼다.

-9사도님이시군요.

말을 건 것은 아흘레탄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네 칸 떨어진 곳에 생긴 그림자였다.

“실례. 갑작스러운 연결에 당황하셨을 것 같군요, 5사도.”

-아닙니다. 다만 정기 연락 시간이 아니라 그런지 연락을 받은 건 저와 7사도님뿐이네요. 사실 듀플리온에 파견 나간 사도님들은 태양 교단과의 일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어서겠지만요.

5사도라 불린 그림자는 어린아이처럼 키득거리면서 벌써 왕국의 새벽별 교단 지부의 3분의 1이 파괴당했고, 절반가량이 제국으로 철수 준비를 마쳤다고 덧붙였다.

그때 5사도가 흠칫 놀라며 어딘가를 바라봤다.

-…어? 1사도님!

5사도의 놀람과 동시에 아흘레탄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네 칸 떨어진 곳에 그림자가 생겼다.

-일이 있어 늦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갑작스러운 연락으로 실례했습니다.”

-6사도와 11사도는?

새벽별 교단의 교주, 1사도의 물음에 아흘레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신의 곁으로 향했습니다.”

아흘레탄의 대답에 과묵한 7사도와 어린 목소리의 5사도의 그림자가 놀라서 요동쳤다.

-과연, 그런가.

1사도만은 담담하게 사실을 받아들였다.

“예상하신 겁니까?”

그들의 계획은 신중했고, 준비는 은밀했다. 어디서 의식 파탄을 예상한 걸까.

아흘레탄의 의문 섞인 물음에 1사도는 담담히 대답했다.

-아니, 11사도의 죽음은 각오한 바였으나 6사도는 아니었다. 예지에 따르면 필히 의식은 성공하고 새로운 11사도로 전설의 헬 나이트가 탄생했어야 했다. 그러나 의식을 시작하기 직전 4사도가 별의 요동침을 감지했다.

4사도는 예지의 힘을 지닌 악마와 계약한 이로, 별을 읽는 자와 달리 후천적 예지자였다.

예지라는 강력한 힘이 자신이 아닌 악마에게 기인한 탓에 한 번 걸러져 예지의 힘 자체는 그리 강하진 않았다.

하지만 대신 주체가 되는 악마의 힘이 개입하면서 여느 예언자들보다 안정적으로 예언이 가능했다.

-6사도가 사망했다면 당연히 강마의식도 파탄 났겠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1사도의 명령에 아흘레탄은 심호흡을 하며 자신이 겪은 상황을 설명했다.

6사도 어기스트림의 요청에 의해 지원 병력으로 브류타에 간 것부터 시작해서, 전투가 벌어졌던 일, 신성력으로 도시가 가득 찬 일 등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가 설명할 수 있던 건 야드, 제이드, 실루아의 공중 병기에 대해서였을 뿐이었다.

어떻게 의식이 파탄 났는지, 어째서 신성력이 도시를 가득 채웠는지는 알지 못했다.

“…실례했습니다. 6사도였으면 마력의 흐름만으로도 대부분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저로서는 알 수 있던 건 이 정도 뿐입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강한 전투 마법사였지만, 마법사로서의 재능은 없다시피 했다.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설명한 그녀는 손뼉을 치며 깜박했던 것을 떠올렸다.

“아! 그 대마법사! 그 젊다 못해 어린 대마법사에게서 사계의 마력을 느꼈습니다.”

-사계의 마력 말인가요?

-그 둔한 눈으로 잘도 알아봤군.

아흘레탄의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5사도와 7사도가 관심을 보였다.

“실례입니다, 7사도. 저도 목숨을 걸고 싸워본 상대의 마력쯤은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그 어린 대마법사가 새로운 가을 낙엽의 현자라는 말씀이신가요?

5사도의 순수한 물음에 아흘레탄은 움찔했다.

-9사도가 사계의 마력을 구분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리고 가을 낙엽은 다른 사계와 달리 아직 후계자를 찾기엔 젊다.

봄꽃의 달랑타, 여름 열매의 드미트리크론, 겨울나무의 예카트리체 모두 한 세기 이상을 살아온 노괴(老怪)들이었지만 현 가을 낙엽의 현자는 반세기도 살지 않은 젊은이였다.

1사도의 확언에 아흘레탄은 의기소침해졌다.

“…실례합니다만, 그 어린 대마법사의 이름은 들었습니다.”

아흘레탄의 말에 세 그림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아샤 스테이폴로입니다! 제가 확실히 들었습니다!”

아흘레탄은 몸을 피하기 전에 제이드에게 이렇게 물었었다.

‘실례지만, 당신의 마력에서 사계의 향취가 느껴집니다! 당신의 이름이 어떻게 되지요?’

그 물음에 제이드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아샤입니다. 아샤 스테이폴로.’

유안에게 완벽히 적응하고 물든 제이드는 거리낌 없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스승 친구의 제자 이름을 팔아넘겼다.

-아샤 스테이폴로. 얼마 전에 탄생했다는 새로운 봄꽃의 현자인가.

1사도의 중얼거림에 5사도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바스타유에 발목이 잡혀 있는 겨울나무의 현자와 아직도 후계자를 찾지 못해 빌빌거리고 있는 여름 열매의 현자일 리는 없으니, 새로운 봄꽃의 현자가 분명하네요.

“예! 맞습니다! 그가 분명 달랑타 위즐의 후계자인 새로운 봄꽃의 현자일 겁니다!”

9사도의 확신에 1사도는 진지하게 말했다.

-봄꽃의 현자, 전대 봄꽃인 달랑타가 도왔겠지만 델레브리온 사태를 벌써 해결하고 브류타까지 온 건가? 무시할 수 없는 남자겠어.

1사도의 진중함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아샤 스테이폴로는 여자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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