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유적도시 (1)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중, 가장 먼저 프레시아가 달려왔다.
오열하는 프로스트를 본 프레시아는 걱정하는 얼굴로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았다.
그 모습에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뒤늦게 온 따라온 길버트도 멀리서 상황을 파악했는지 촉촉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보고는 버밀리온을 위해 묵념했다.
내 동료들이 하나둘씩 내게로 돌아왔다.
모두들 멀리서나마 지켜본 사그라진 영웅을 위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오열하던 프로스트는 진정됐는지 잘게 떨면서 비통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널 원망한다.”
그의 슬픔으로 떨리는 목소리에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이해합니다.”
내 대답에 눈물 한 방울을 흘린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네가 없었다면 버밀리온이 이렇게 떠나는 일은 없었겠지.”
“그랬을 겁니다.”
대신 버밀리온이 원하던 삶은 살지 못했을 거다.
교주인 1사도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학살을 자행하다 정신 차린 뒤 좌절하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아버지를 원망했겠지.
그리고 그의 손으로 직접 죽였을 거다.
“그러니… 그러니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의 말에 나는 할 말을 고를 수 없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무슨 마음으로 내게 말하는지 나는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허망한 눈으로 푸른 들판이 되어버린 도시를 둘러보았다.
“매정한 녀석이 남긴 것이 없구나.”
도시가 불타며 모든 것이 사라졌다. 버밀리온이 휘두르던 검마저 그의 마력에 버티지 못하고 소멸했다.
버밀리온이 남긴 것은 오직 프로스트의 가슴에 새긴 검흔(劍痕)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짚으며 한탄했다.
“나는 너무 큰 죄를 지었다. 이 죄를 어찌 짊어져야 맹세를 지킬 수 있을까.”
깊은 고독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술을 꺼내 한 잔 따라 버밀리온이 마지막으로 있던 자리에 놓았다.
“어쩌면 당신의 죄는 당신 생각보단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 도시를 신성력으로 불태우면서 조금씩 생명력을 갈취당했던 이들의 생명력을 다시 채워 넣었으니까요.”
아마 생명력을 갈취당하기 전보다 훨씬 건강해졌을 거다.
무려 고위 귀족도 쉽사리 받지 못하는 신성력 정화와 치료였으니.
물론 그의 죄가 사라지진 않았다.
사람을 때리고 치료해 준다고 때렸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뭐, 어떻게 받아들이든 당신이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지만.”
“…그런가.”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였던가. 후회와 죄책감, 그리고 슬픔과 괴로움이 혼재되어있는 복잡한 마음이 비친 그의 눈은 나를 바라봤다.
“한 가지 부탁해도 괜찮겠나?”
“들어보고요.”
“간단한 부탁이다. 그저 내 아들을 잊지 말아다오.”
그의 부탁에 나는 쓰게 웃었다.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쉬이 잊힐 녀석은 아니지 않습니까.”
버밀리온은 유독 기억에 남을 것 같은 녀석이었다.
내 대답에 그는 메마른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 그건 그렇지. 버밀리온은 그런 녀석이지. 그거면 되었네.”
프로스트는 성치 않은 몸으로 비틀거리며 어딘가로 향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내 물음에 프로스트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대답했다.
“내 맹세를 지킬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렇다면 또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말에 프로스트는 어설프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떠나갔다.
음, 그런데 버밀리온이 죽었으니 1사도는 누가 죽이지?
소설 속에서는 버밀리온이 죽였는데.
“지금 고민해 봤자인가.”
한숨을 내쉰 나는 불타 무너지고 덩굴과 새싹이 자라난 영주성으로 향했다.
다행히 은으로 만든 촛대며 식기는 물론, 금속 갑옷 등 돈으로 쓸 만한 게 꽤 많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엄중히 보관되어 있었던 금고는 불길에도 잘 버텨주었다.
“람아.”
키이이-
내 부름에 람이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수압 커터를 내 손에 만들어냈다.
전기톱이나 마찬가지군.
카가가가가-!
수압 커터에 불똥이 튀며 두부 썰리듯 금고 문이 베어졌다.
“이 정도면 도시 주민들 이주 비용으로는 써먹을 수 있겠네.”
금고 안에는 은화가 가득 쌓여 있었는데, 모두 영주가 그동안 영민들의 고혈을 빨아 부정 축재한 재산이었다.
이곳 영주가 악마 숭배자들과 연관되었으니 이단 심문관들이 오기 전에 이주하는 게 영민들에게 좋을 거다.
일단 새벽별 교단의 의식이 벌어졌던 건 사실이니, 시민들을 상대로 강도 높은 심문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어떤 놈이 올진 몰라도 개중에는 거의 고문에 가까운 방법도 서슴지 않는 놈도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지.
“역시 유안이군요. 분배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야드의 부축을 받고 있던 제이드의 물음에 나는 야드가 조사한 자료를 살폈다.
“프로스트가 가장 신망 있었지만 떠났으니, 어디 보자… 행정관이랑 그나마 신망 있다고 하는 세 사람을 깨워서 알아서들 분배하라고 하자.”
내가 나눠줄 시간 따윈 없었다. 이렇게 금고까지 따주는 것만으로도 내가 할 일은 충분히 했다.
일단 팔기 힘들어 보이는 그림이나 예술품은 수수료로 내가 가져가야지.
신성력을 가득 머금은 녹은 은제 가구도 가공해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으니 가져가고.
“다들 고생했어. 이제 볼일은 다 봤으니 떠나자.”
내 말에 다들 지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멀리서 녹빛 머리의 사내가 우리가 있는 이곳으로 다가왔다.
‘아르카나 11, 정의’ 아이오마이어.
제국에 암약하는 조직, 자유 기사 연맹의 맹주이자 초인에 이른 기사인 동시에 마스터 클래스의 마법사기도 했다.
그가 고작 마스터 메이지인 이유는 그가 익힌 학파의 개파종사(開派宗師)이자 선조가 과거 마도팔현 중 한 사람이라 그렇다.
마스터 이상의 위계인 오노러블은 학파의 마법을 발전시키거나, 마법계에 큰 위업을 증명해야 했는데 그에게는 둘 다 불가능했다.
그의 근본은 마법사가 아닌 자유 기사였고, 현자가 완성한 마법 체계를 발전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위업이었다.
그러고 보면 소설과 달리 아직 한쪽 눈을 잃지 않은 듯 보였다.
혹시 원래 오늘 잃었어야 했나? 모르겠다.
아이오마이어는 우리 중에서 아바스엘을 보고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큰 빚을 졌소. 덕분에 이리 살아남아 새벽별 교단의 사도를 참살할 수 있었소.”
아이오마이어의 인사에 아바스엘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게 고마워할 것은 없소. 모두 다 주군께서 명하신 일이라 행한 것뿐이니.”
아바스엘의 대답에 그의 시선은 내게로 향했다.
“그러하오? 그대에게 진 빚을 다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려. 내 어리석은 벗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는 것을 막아준 것에 감사하오.”
감사 인사를 한 그는 목이 메는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내, 내 가여운 조카가 끝까지 제 신념을 지킬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소.”
아이오마이어의 충혈된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내 손으로 조카를 베지 않게 해주어서… 정말로 고맙소.”
그 말에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한 가지만 정정합시다.”
“무엇을 말이오?”
“당신의 조카는 가엽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고, 검의 끝에 도달해 웃으며 즐거운 인생이었다고 말하는 녀석에게 가엽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내 대답에 아이오마이어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호탕하게 웃었다.
“아하하하하! 그렇구려. 암! 그렇고말고! 내 조카는 가여운 녀석이 아니지! 내가 큰 실수를 했소. 버밀리온은 그런 말을 들어선 안 되는 자랑스러운 영웅이오. 정정해 줘서 고맙구려.”
“친구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도운 것뿐입니다만, 부채감을 느낀다면 빚으로 달아두죠.”
어쩌면 그를 지금 죽여두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
당장 그를 죽이지 말아야 할 여러 이유를 떠올려 보아도 허울뿐이다.
살다 보면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은 날도 있지 않겠는가.
내 말에 아이오마이어는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하하! 당연히 빚으로 달아 두어야지. 내 신념에 반하는 일이 아니라면 언제든 달려와 그 어떠한 부탁이라도 세 번 들어드리리다. 설령 내 목숨을 걸어야 할지라도 기꺼이 응하겠소.”
사도를 상대할 때 도와줘서, 프로스트를 막아줘서, 버밀리온이 신념을 지킬 수 있게 도와줘서.
이렇게 세 가지 빚인가.
그는 내게 연락할 수단을 건넸다.
수단이라고 해봤자 마도구는 아니었고, 아이오마이어의 인장이 찍힌 엽서에 전달 방법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럼 감사히 받도록 하죠.”
적어도 그는 허언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정의를 추구하는 그가 용납하지 못할 짓거리도 자주 하는 게 아르카나인 만큼, 잘만 사용한다면 아르카나에게 치명적인 비수가 되어줄 수 있었다.
“그럼 이만 가봐야겠소. 다친 벗이 걱정되어서 말이오.”
아이오마이어는 가볍게 인사하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지듯 자리를 떠났다.
“우리도 가자. 다들 고생했어.”
내 말에 다들 지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또 밤하늘을 올려다보네? 꼬마 아가씨?”
자반은 붕대를 둘둘 감은 몸으로 ‘아르카나 18, 달’의 은신처에서 나오며 ‘아르카나 10, 수레바퀴’에게 말을 걸었다.
자반이 말을 걸었음에도 소녀는 말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하하하, 대답이 없으면 이 오빠는 슬퍼지는데~?”
여전히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반은 그런 소녀를 보며 느끼한 미소를 짓고는 옆에 앉았다.
“에구구, 나이 차이를 생각해라! 오빠란 말이 나오냐! 라는 반응까지는 기대하진 않았지만 너무 반응이 없네.”
자리에 앉은 자반은 아무렇지 않은 듯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아! 혹시 오빠라고 지칭해도 상관없어서 부정하지 않는 거야? 이야~! 그런 거라면 이 오빠는 좋은데? 사실 말이야, 이 오빠는 이렇게 부상당한 몸으로 혹사를 당하고 있단 말이지. ‘달’도 참 너무하지? 임무에서 전신 복합 골절을 당하고도 그 험지에서 아기 새 양을 업고 아득바득 기어 나왔는데, 잠깐 치료해 주고는 다시 바스타유로 가서 겨울나무의 현자의 동태를 살펴라, 자기가 걸린 저주를 푸는 데 필요한 물건을 구해 와라, 제국에서 온 ‘정의’ 녀석의 편의를 봐줘라, 정말이지 나만 너무 부려 먹는다니까. 그래서….”
“그래서, 뭐죠?”
달의 목소리에 자반은 순간 움찔하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오셨나요? 그래서 뭐긴 뭐겠습니까, 우리 아리따운 여사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죠.”
자반의 윙크에 달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제가 당신을 너무 부려 먹은 감이 없잖아 있긴 하니까요.”
“아하하하! 그게 제가 너무 유능한 탓 아니겠습니까.”
자반의 자화자찬에 달은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도 자반은 유능했다.
아르카나의 정보망을 관리하는 것도, 임무에 필요한 작전을 짜는 것도, 직접 임무에서 활약하는 것도 가능한 만능 인재였다.
다른 간부처럼 초인이나 대마법사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반 같은 만능에 가까운 인재는 구하기 힘들었다.
때문에 원래 그의 후계자로서 길러지던 야드 토슬과 관계가 틀어진 건 아쉬운 일이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가능한 들어드리겠습니다.”
달의 말에 자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설마 또 임무입니까?”
눈치 빠른 그의 물음에 달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직접 참가하는 임무는 아니고, 뒤에서 보조하는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수레바퀴의 예언에 따르면 조금 위험할지도 몰라서요.”
“…그렇다면 뭐. 보상은 천천히 생각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자반은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다시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를 보며 달은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지만 금세 털어냈다.
“또 무엇을 보고 있나요?”
달의 물음에 수레바퀴는 마법으로 허공에 글을 써 내렸다.
-운명이 다시 한번 크게 요동치고 있어요. 예지대로 11사도가 정의에 의해 죽었으나, 검악(劍惡)은 태어나지 못하고 죽었어요. 검악을 인도할 운명인 6사도 또한 검악의 손에 죽었고요.
“뭐라고요?!”
수레바퀴의 말에 달은 이마를 짚었다.
미래의 검악 버밀리온의 죽음은 거대한 사건이었다.
검악은 새벽별 교단의 꼭두각시가 되지만, 결국 교주인 1사도를 죽일 운명을 타고난 이였다.
-지금은 새벽별 교단의 교세가 꺾일 흐름으로 바뀌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다 강성해질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소녀는 글을 쓰던 손을 잠시 멈추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직 운명의 요동침이 계속되어서 제대로 읽었다고 보기 어렵네요.
“…알겠습니다. 정의에게 자세한 보고를 들어야겠군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달의 걱정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하염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에는 폭풍과 같은 어둠이 별의 빛을 휩쓸며 운명을 요동치게 만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