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그 영웅은 맹세한다 (3)
찬란하고 굳건한 신념이 하나의 심상이 되어 검에 깃드는 광경은 살면서 다시 보기 힘들 광경이었다.
특히 평범한 인간이 탈피하듯 초인이 되는 모습은 번데기가 나비로 우화하는 것보다 경탄스럽고, …아름다웠다.
“버밀리온.”
내 부름에 그는 평소처럼 유쾌하게 웃었다.
“아하하하! 내가 이렇게 신념을 지킬 수 있는 건 네 덕분이야. 너와 만난 건 내게 있어서 세상에 다시없을 기적이었어. 그러니 네가 마음 쓸 것 없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버밀리온은 알고 있었다.
그가 구현한 기적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끌어오는 행위였다.
아무리 재능이 규격을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초인의 경지는 쉽사리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특히 버밀리온처럼 육체적 한계가 뚜렷한 경우라면 더더욱 자신만의 심상을 구축하고 초인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천부적인 재능은 초인의 경지의 입구까지 쉽사리 안내할지라도, 그 너머를 손에 거머쥐는 건 자신이 세운 투쟁의 역사와 끝없는 인내, 그리고 자기 성찰로 자기 자신을 바로 세운 자들뿐이다.
“알고 있었다만, 넌 진짜 멍청이다.”
“아하하하! 너무하네. 우직하다고 말해줄래?”
장난스럽게 웃어넘긴 버밀리온은 서광(曙光)이 비치는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한 그가 미래의 가능성을 끌어당기기 위해 희생한 건 무엇일까?
나로서는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어리석군요. 당신은 고작 이런 곳에서 버릴 수 있을 만큼 목숨이 그렇게 하찮습니까?”
어기스트림의 당혹스러운 물음에 버밀리온은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찮은 목숨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그게 자신의 목숨이라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법이지.”
버밀리온의 대답에 어기스트림은 식은땀을 흘리며 마법 지팡이의 마력을 가다듬었다.
“그저 내게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있었을 뿐.”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던 버밀리온이 단숨에 도약했다.
눈 깜짝할 사이 하늘에 떠 있는 어기스트림에게 도달한 버밀리온은 검을 휘둘렀다.
새벽 별의 사도는 예상한 듯 마력장을 펼쳐 막으려 했으나 그가 펼친 마력장은 황금빛 궤적에 쉽사리 찢어져 흩어졌다.
“크윽!”
그래도 검이 그의 몸에 도달하는 것을 약간 늦춘 덕분에 일격에 죽지 않고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극심한 부상 속에서 신성력을 걸러내 흑마력을 흡수한 것은 좋았지만, 그 결과 흑마법 의식의 공간이 신성력으로 가득 들어찬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신성력을 사용하기 힘든 환경이었다면, 지금은 반대로 흑마력을 사용하기 힘든 환경이 되었다.
“제기랄! 도대체 성수를 얼마나 처바른 거야! 성물을 가져왔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역시 대마법사라 그런지 내가 뭘 사용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어기스트림의 속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분노에 나는 조소를 날렸다.
이번 보험에 10밀리리터만 있어도 다 죽어가는 환자를 살릴 수 있다는 최고급 성수를 150리터나 사용했다.
당장 숨넘어가는 환자 1만 5천 명을 살릴 수 있는 분량을 때려 박았으니, 이 정도 효과가 없었다면 바하무트의 멱살을 붙잡을 일이었다.
사도 하나, 그것도 대규모 의식을 주관할 수 있는 대마법사를 죽이는 데 그 정도 비용이면 나름 저렴하게 먹힌 셈이다.
당장 이 도시의 인구만 해도 수만 명이고, 저놈이 앞으로 죽일 사람들은 적어도 100만 명은 가뿐히 넘을 테니까.
“으아아아아!”
어기스트림은 공포에 떨며 응축한 흑마력으로 만든 번개를 내뿜었다.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다.
신성력이 가득한 공간에서 흑마력으로 공간 이동을 시도하는 건 자살행위였고, 그렇다고 버밀리온에게 등을 보이는 건 죽여달라는 것과 같았다.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저 버밀리온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늦추는 것뿐.
공간 전체를 가득 메운 번개에도 버밀리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적을 베기 위해 다시 한번 허공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미련한 녀석.”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번개의 정령인 누니의 힘으로 어기스트림의 마법에 간섭했다.
“이…! 이 정령사 나부랭이가 끝까지!”
그가 방출한 막대한 마력의 전류가 버밀리온을 빗겨나가자 어기스트림은 내가 간섭할 수 없는 종류의 마법인 강령술로 마법을 바꿨다.
소환된 악령들은 공간에 가득 찬 신성력에 의해 약해지고, 정화되어 사라져 갔지만 그중의 일부는 다른 악령을 잡아 삼켜 신성력을 버티며 버밀리온을 공격했다.
그러나 심상이 담긴 버밀리온의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악령들은 속절없이 소멸해 갔다.
“이, 이럴 순 없어!”
어기스트림은 최대한 흑마력을 흩뿌리며 버밀리온의 접근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정신계 마법.
그저 평소보다 많은 흑마력을 다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성력이 가득한 공간에서 정면으로 초인에 도달한 기사와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전투로 써먹을 수 있는 원소계 마법은 내게, 강령계 마법은 신성력에 의해 막혔다.
“내가 여기서 죽을 순 없다고! 난 여기서 죽을 운명이…!”
“잘 가라, 나의 삶을 희롱할 운명을 타고난 자여.”
버밀리온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검으로 어기스트림을 베었다.
“악참즉천(惡斬卽天)!”
그의 검은 적(敵)을 넘어 하늘까지 베어냈다.
미래의 그가 도달했던 천하십검 검악의 오의(悟意)가 현재의 그의 손에서 구현되었다.
아니, 하늘을 베고 검붉은 궤적을 남긴 희대의 악당의 ‘천참즉악(天斬卽惡)’이 아닌 황금빛 궤적을 남긴 신념을 지킨 영웅의 ‘악참즉천(惡斬卽天)’이다.
지금 버밀리온이 손에 거머쥔 미래는 어쩌면 검악이 아닐지도 몰랐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황금빛 기적에 오늘로 천하십검의 검악은 운명에서 사라졌음을 느꼈다.
“하하하….”
새벽 별의 6사도를 죽인 버밀리온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모든 힘을 잃은 듯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 안 돼…!”
검으로 땅을 짚으며 간신히 버티던 프로스트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던지고 떨어지는 아들에게로 달렸다.
“크윽!”
전신을 두드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프로스트는 달리다 넘어져 땅을 굴렀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진흙투성이가 되어 다시 일어나 달렸다.
깊은 내상으로 피를 토하고 가슴에 입은 자상이 옷을 적셨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구르고, 땅을 기어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아들을 받아냈다.
“아들아, 정신 차리거라…! 버밀리온…!”
버밀리온의 전신은 이미 검게 물들어 있었다.
“…아버지.”
간신히 눈을 뜬 버밀리온의 대답에 프로스트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래, 이 아비 여기 있다! 아프지…? 많이 아프지?”
마치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물건을 대하듯 프로스트는 조심스럽게 아들의 뺨을 어루만졌다.
“하하, 괜찮아요. 신성력 덕분에 아프진 않네요.”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닌지 버밀리온의 얼굴은 평온했다.
“어때? 이 정도면 영웅 같았어?”
버밀리온은 날 보며 바보같이 웃었고 나는 입이 써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뭐? 왜?”
항의하는 듯한 그의 시선에 나는 피식 웃었다.
“영웅 같은 게 아니라 천하에 둘도 없는 대영웅이었다.”
내 대답에 버밀리온은 유쾌하게 웃었다.
“아하하하. 하여간 짓궂다니까.”
그의 웃음은 나른한 듯 힘이 없었다.
프로스트는 그 평온한 나른함에 드리운 죽음을 느꼈는지 자신의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이 아비가 모두 잘못했어. 그러니, 그러니까 떠나지 말아다오! 제발, 제발….”
프로스트의 부탁에 버밀리온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아버지.”
그 대답에 프로스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버지, 그거 알아요?”
버밀리온의 물음에 프로스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엇을 말이냐?”
“제가 처음 검을 쥐었을 때의 감동이요.”
“아아, 알지. 그리 환하게 웃던 얼굴을 보고 이 아비도 처음 검을 잡았을 때 느꼈던 감정이 떠오르더구나.”
프로스트의 대답에 버밀리온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쥔 검으로 아버지께 처음 검술을 배웠을 때도 기억나요?”
“그걸 어떻게 …잊을까. 허리에나 간신히 닿던 녀석이 이렇게 품 안에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컸구나.”
“하하하, 그렇죠? 전 이제 다 큰 거겠죠.”
버밀리온의 말에 프로스트는 입술을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컸지. 그렇고말고.”
“아버지, 고백할 게 있어요. 아버지께선 금지하셨지만 사실 몰래 검을 수련했어요.”
“알고 있다. 이따금씩 몰래 지켜보기도 했단다.”
“그래요? 잘 속였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버지는 못 당하겠네요.”
아들의 어설픈 미소에 프로스트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아들아, 그러는 너는 아느냐? 내가 널 처음 안아본 날의 감동을, 네가 처음 날 아빠라 부른 날의 벅차오름을.”
“….”
“그저 살아만 달라는 이 아비의 소원이 그리도 잘못되었더냐? 너와 밥을 먹고, 떠들며 웃고, 그저 모든 날을 함께하고 싶었을 뿐인데. 내 소원은 고작해야 그것뿐인데…!”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다.
자신의 신념보다 소중했던 아들을 살리고 싶었던 한 아이의 아버지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자 했다.
“그래선 안 되었으니까요.”
그런 아버지를, 아들은 두고 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동경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으니까.
“아버지, 마지막 부탁이 있어요.”
“마지막이라니, 그런 소린 하지 말거라. 무슨 부탁이든 들어줄 테니 제발….”
프로스트의 애원에도 버밀리온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영웅이 되어주세요. 절 대신해서, 제가 동경하는 아버지가 사람들을 구하는 영웅이 되어주세요.”
그의 검게 변한 손은 이제 검을 들 수 없으니, 기적을 만든 그의 삶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으니, 자신의 꿈을 부탁했다.
그 부탁은 지독한 저주와도 같았지만 프로스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마. 영웅이 될 테니,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영웅이 될 테니 제발.”
그는 부질없는 소망으로 간절히 애원했다.
앞으로 펼쳐질 그 어떠한 삶보다도 자신의 아들이 소중했으니.
그 대답에 버밀리온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요, 그렇게 약속해 주시면 돼요. 아버지는 한번 내뱉은 말은 지키는 남자니까. 내가 동경해 온 그런 영웅이니까.”
비록 남은 삶이 상처투성이로 만들 저주가 될지라도 아들의 마지막 소원은 그를 지탱할 축복이었다.
“아! 이렇게 마지막 곁을 지켜줄 아버지와 친구가 있으니 즐거운 삶이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버밀리온의 몸이 황금빛 알갱이로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안 돼!”
프로스트는 품 안에서 사라지는 빛을 움켜쥐기 위해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매정한 황금빛 알갱이는 그의 손 틈 사이로 흘러 하늘로 올라갔다.
초목이 나는 아침 햇살에 비치는 서글프고도 아름다운 광경에 중얼거렸다.
“그냥 한 말이었는데, 정말로 잊지 못할 것 같군.”
그렇게 아버지를 증오하고, 혐오하던 한 악당은 사라지고, 아버지를 동경하고, 사랑하던 영웅은 서광 속으로 흩어졌다.
하늘이 내린 재능의 영웅은 그 재능이 다시 하늘에 닿았고, 끝내 하늘로 올라갔다.
땅에 엎드려 오열하는 한 명의 초라한 아버지만을 남기고.
“으아아아아-!!”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고, 다시 만날 날까지 자랑스러운 영웅이 되겠다고.
하늘로 올라간 영웅에게, 땅에 남은 그 영웅은 맹세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