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악의 갈림길에서 (5)
프로스트와 아이오마이어의 검은 서로의 목을 취하기 위해 격렬하게 움직였다.
검현류(劍賢流) 비기(秘技)
사분참마검(四紛斬馬劍)
찬영견검(燦英牽劍) 오의(悟意)
금환광영견검(金環廣影牽劍)
일식(日蝕)
실체를 지닌 네 개의 분신으로 달려드는 아이오마이어의 검에 프로스트는 황금빛 검환(劍環)으로 응수했다.
콰과과광-!
다시 한번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치며 땅이 뒤엎어졌다.
흩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녹빛 검강과 황금빛 검강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음에도 두 사람은 서로 어딜 공격할지 아는 것처럼 검을 휘둘렀다.
마치 사전에 정해둔 것처럼 움직이는 둘은 한바탕의 춤을 추는 듯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대결을 멈춘 건 두 사람을 가둔 결계를 뚫고 들어온 한 발의 화살이었다.
콰앙-!
“으음…!”
검과 화살이 부딪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와 충격에 아이오마이어는 신음성을 흘렸다.
안경을 쓰고, 짙은 다크서클에 머리 손질이 전혀 안 되어 있는 사내가 결계 안으로 들어오며 프로스트에게 말했다.
“난 11사도 도노반이다. 저자를 죽이는 건 내가 마저 할 테니 넌 아들에게 가봐라.”
스스로 11사도라 소개한 도노반의 말에 프로스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 이제야 왔지?”
아무리 초인이라 해도 사흘 동안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인 그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지금 타이밍은 악의가 느껴졌다.
프로스트는 일부러라는 생각에 이를 갈았다.
더 일찍 올 수 있었음에도 혹시 그가 의식에 변수가 되지 못하도록 힘을 빼도록 유도한 게 분명했다.
그 물음에 도노반은 피식 웃었다.
“싫은가? 그럼 계속 싸우든지. 지금 가야 의식 전에 마지막 인사라도 할 수 있을걸?”
비웃음 섞인 목소리에도 프로스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혹시 겔스토 아이오마이어의 움직임을 가장 잘 예측할 수 있는 게 너였기에 맡긴 거라는 허울 좋은 소리를 기대한 건가?”
으드득!
프로스트는 이를 갈면서도 뒤돌아 도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의식이 진행되면 당분간 버밀리온은 깊은 잠에 빠져들 테고, 깨어나도 한동안은 저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만 할 터였다.
“미안하다. 가봐야겠다.”
사과를 하며 떠나는 프로스트를 보며 아이오마이어는 그런 그를 차마 잡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프로스트가 완전히 자리를 떠나자 도노반은 데스 나이트들을 소환하며 키득거렸다.
“지금부터는 내가 놀아주도록 하지. 아, 넌 그냥 피하기만 하면 돼.”
도노반이 활시위를 당기자 흑마력이 짙게 응축되며 화살이 만들어졌다.
전방의 데스 나이트들은 각각 흑마력 검강과 검기를 만들어냈다.
체력이 바닥난 아이오마이어는 안주머니에서 환약을 꺼내 씹어 먹으며 외쳤다.
“덤비…!”
콰앙-!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 멀리서 파랗다 못해 하얗기까지 한 화염의 창이 날아와 데스 나이트와 도노반을 맞혔다.
“아아악! 뭐, 뭐야! 신성력이 담겼어?!”
도노반의 앞을 지키던 데스나이트 다섯 위가 그대로 소멸했고, 다른 다섯 위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도노반도 왼팔이 관통당하며 그대로 팔이 절단되어 버렸다.
멀리서 마법을 날린 아바스엘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어디 보자, 성수의 힘을 추출한 마법으로 적당히 한 방 먹였으면 바로 자리를 떠나 다음 위치로 향할 것. 정말이지, 주군은 이런 상황은 어떻게 예측하시는 건지.”
그렇게 중얼거린 아바스엘은 바로 도망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던 아이오마이어는 다시없을 기회에 살기를 내뿜으며 도노반에게 달려들었다.
* * *
나는 반중력 마법이 걸린 나무판자를 타고 빠르게 도시 거리를 미끄러지듯 질주했다.
꽤 넓은 나무판자라 내 뒤에 사람 하나는 탈 수 있었는데, 버밀리온은 용케 중심을 잘 잡았다.
이 허약한 몸은 나비가 고정시켜 줘야 했는데.
“뭔가 신기한 기분이야. 이런 마도구 안 파나?”
“아마 안 팔걸? 나야 대충 공중에 뜨게만 만들고 바람의 힘으로 조종하는 건데 운전이 가능하게 만들려면 복잡해지거든.”
얼마나 복잡하냐면 제대로 조종할 수 있게 하려면 적어도 마차 크기는 되어야 했다.
문제는 그렇게 크게 만들면 마력 효율이 전혀 안 나온다는 점이다.
지금 내가 그렇다.
이 얇은 판때기로는 중력을 거스르고 두 사람의 무게를 들어 올리는 데 몇 배는 마력이 더 들었다.
버밀리온이 타니 앞뒤로 무게 중심이 맞아서 역으로 바람으로 밀어내기도 힘들어졌다.
혼자 탈 땐 몸을 앞으로 실어 뒤로 나무판자가 기울면 앞으로 밀어내는 면적이 넓어서 편했는데.
“야, 내려.”
“왜? 내가 많이 무거워서?”
“아니.”
물론 그 이유도 있었지만 의식의 중심지에 거의 다 도착한 판국에 그런 걸 따지기엔 늦은 감이 있었다.
내가 내리라고 한 이유는.
“싸울 준비 해.”
건물 사이에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 ‘도시 사람’들 때문이었다.
“검은 검집에 넣어두고 싸워야겠다.”
우리 앞을 막아서는 이들은 명백히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멍한 눈으로 검과 창을 들고 있었다.
대부분 일반 시민이었지만 중간중간 영주성을 지키는 병사와 기사도 보였다.
“기사씩이나 되서 빠져가지곤.”
허약한 나도 잘만 흑마력에 대항하는데, 기사 주제에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하기야, 이 영지의 기사는 영주와 같은 놈들이니 정신력이 있을 리 있나.
질 좋은 갑옷을 입고 있는 놈들은 다쳐도 죄책감 따윈 없을 놈들뿐이었다.
“기분 더러운 수를 쓰는군.”
버밀리온은 검집이 뽑히지 않게 고정쇠로 검을 고정하며 바로잡았다.
그는 타락한 기사들은 몰라도 일반 시민들을 농락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때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배불뚝이 하나가 인파 속을 뚫고 우리 앞에 섰다.
인상착의로 보면 이 영지의 영주인가?
야드의 조사 내용에 첫날 영주성에 들락거리던 깡패가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영주의 정신을 제압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을 것 같았다.
두 눈에 초점을 잃고 입에서 침을 흘리던 배불뚝이 사내는 갑자기 고개가 격렬하게 꺾이더니 똑바로 된 발음으로 말을 걸어왔다.
-어서 오세요. 버밀리온 님, 그리고 초대하지 않은 방해꾼 씨. 저는 새벽별 교단의 6사도, 어기스트림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군요.
말하는 건 배불뚝이 사내였지만, 그 의지는 다른 놈의 것이었다.
6사도 어기스트림, 정신계 흑마법의 달인인 슈프림 메이지급의 대마법사였다.
새벽별 교단에서도 슈프림 메이지급은 많지 않다.
마법사의 비율이 높은 사도들 중에서도 슈프림 메이지는 단 넷뿐이었고, 대주교급까지 포함해도 열 명이 간신히 넘는다.
-그런데 이리 제 발로 오실 거였으면 저희의 정중한 초대에 응해주시지 그랬습니까?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대답했다.
“어디가 정중한 초대야? 느그 교단은 도시를 썩은 내 나는 흑마력으로 뒤집어 놓고 개짓거리를 하는 게 정중한 거냐?”
뭐, 놈들치고는 정중한 초대는 맞았다.
기본적으로 새벽별 교단의 초대는 역겨운 방식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그런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이것 참, 너무한 평가군요. 방해꾼 씨, 당신이 버밀리온 님의 친구분이라고 해도 참는 데 한계가 있답니다.
“특기 전력인 ‘죽은 별 여단’의 병력까지 보낸 주제에 뭘 참았다는 거지?”
죽은 별 여단은 새벽별 교단의 언데드 부대를 부르는 명칭이었다.
명칭이 여단이지만 소속된 언데드는 그렇게까지 많지 않다.
그저 인형처럼 부려지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의지를 가진 언데드가 되려면 죽은 몸뿐만 아니라 혼백까지 필요했다.
하지만 저 악마 숭배자들 중에는 악마와 계약하지 않은 놈이 드물었다.
살아 있는 동안 악마의 힘을 빌려오는 대가로 죽은 후의 영혼을 저당 잡혔으니, 언데드가 될 수 있는 놈이 적을 수밖에.
-오, 죽은 별 여단에 대해 아십니까? 저희 교단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딱히? 그래서, 그 잘난 6사도란 놈이 굳이 이렇게 막아서는 이유는?”
어기스트림에게 있어서 이유야 어쨌든 버밀리온이 의식의 중심지로 들어오는 건 반길 일이었다.
내 물음에 배불뚝이에 빙의한 어기스트림은 유쾌하게 웃었다.
-으하하하하! 별것 아닙니다. 저는 버밀리온 님의 귀하디귀한 몸이 더 이상 상하길 원치 않습니다.
배불뚝이의 시선 끝에 버밀리온의 손이 닿았다.
버밀리온의 손은 약간이지만 눈에 보일 정도로 썩어 있었다.
-그러니!
무기를 든 기사 하나다 검을 뽑더니 평범한 주민의 목을 겨누었다.
-선량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게 협조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방해꾼은 꺼지시고 버밀리온 님만 저를 따라오시죠.
그 말에 버밀리온이 대답하기도 전에 손가락을 튕기며 먼저 대답했다.
쩡-! 째쟁쟁!
“거절하지.”
손가락을 튕기는 동시에 기사가 든 검이 반 토막이 나서 검신이 땅에 떨어졌다.
비암의 힘으로 열을 가하고 람의 힘으로 급속도로 식힌 결과물이었다.
-무슨…!
우르르르… 번쩍!
동시에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쳐 배불뚝이의 머리에 직격했다.
…콰아앙!
번쩍임보다 반 박자 늦게 천둥소리가 전신을 두들겼다.
지근거리에서 떨어진 벼락이라 피부로 따끔거리는 미세한 정전기가 느껴졌다.
배불뚝이의 몸에서 흑마력이 흩어지며 어기스트림의 정신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아니, 몸이 죽어버린 거구나. 어차피 쓰레기라 힘 조절을 안 했더니 죽어버릴 줄은 몰랐다.
“하하핫! 방심하니까 그렇지.”
제 아무리 본신의 능력이 슈프림 메이지라고 해도 육신이 별 볼 일 없는 데다 리소스를 대부분 의식 준비에 집중하고 있으니 이런 기습에 당하는 거다.
-크윽! 감히!
어기스트림은 금방 다른 몸으로 의식을 옮겼다.
그래도 갑자기 빙의체가 죽어서 연결이 끊기는 건 잘 돌아가던 컴퓨터의 CPU를 갑자기 뽑는 것처럼 충격이 컸을 텐데 용케 금방 수습했다.
곧 죽어도 사도는 사도인가 보구만.
-이렇게 나오신다면 더 즐겁게 해드리죠. 버밀리온 님, 당신이 자초한 겁니다. 그러게 친구를 잘 사귀셨어야죠!
어기스트림은 도시 사람들을 조종해 달려들게 시켰다.
병사나 기사는 창과 검을, 일반 주민들은 삽이나 곡괭이, 하다못해 짧은 식칼까지 들고 있었다.
“유안, 어떻게 할 거야?”
버밀리온은 긴장하며 검을 들었다.
마력을 사용하자니 조종당할 뿐인 일반인들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반항도 못하고 그냥 잡힐 순 없었다.
“뭐, 지금까지는 예상한 대로니까 너는 네 몸만 지키고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 세상에 온 지도 벌써 몇 개월이다.
고작해야 조종당하는 일반인들을 상대할 정도의 힘은 갖추고 있었다.
앞으로 나선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죽이지 않고 제압만 하려면 몸에 부담 가서 싫은데.”
“캬아아아!”
“으어어어!”
나는 전신에 연공법으로 마력을 퍼트려 신체를 강화하며 식칼로 찌르는 사람들을 가볍게 피했다.
정령비전오의(精靈秘傳悟意) 빙의술(憑衣術)
대상, 누니 - 비뢰신(飛雷身) 1단계
파지직-!
내 몸에 누니가 깃들며 스파크가 튀었다.
동시에 세상이 살짝 느리게 흐르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가 궤적이 아니라 물방울의 형태로 보이며 내게 휘둘러지는 검이 천천히 움직인다.
나는 전신에 전류를 흘려 느려진 세상에서 평소처럼 움직이기 위해 근육을 자극했다.
너무 빠르게 움직여선 지금의 내 몸은 감당할 수 없다.
차분하고 느릿하게 걷듯 검을 피하고 병사로 보이는 사내의 목을 살짝 건드렸다.
파지직!
그리고는 옆의 기사를, 아줌마를, 농부를, 목수를 건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후우-!”
어기스트림의 조종을 받는 모든 이들을 건들고 지나치고 깊게 숨을 내뱉자 느려졌던 세상이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지지직-지직-지지-직!
내가 지나온 길을 따라 번개가 훑고 지나갔다.
“캬아아…!”
“어흐으으…!”
조종당하던 모든 사람들이 경련을 일으키며 땅에 쓰러졌다.
“아이고, 몸이야. 내일은 근육통으로 고생하겠네.”
최대한 느릿하게 움직였는데도 전신에 탈력감이 장난 아니었다.
그나마 연공법으로 내 몸을 강화해 둬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당장 쓰러졌을지도 모르겠다.
“우와… 순간 엄청 빠르게 움직였는데 어떻게 한 거야?”
버밀리온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으며 정령 권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슉! 슉!
푹! 캉-!
버밀리온의 등 뒤를 덮치려던 어기스트림의 빙의체는 이마가 관통되어 땅에 쓰러졌다.
그리고 어느새 그 뒤로 달려오던 프로스트는 검으로 내 총알을 쳐냈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마시죠. 프로스트 웨이븐 경.”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