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155화 (155/214)

제155화. 악의 갈림길에서 (2)

수천 개의 녹빛의 검격이 하늘을 뒤덮었다.

검의 장대비라 불러도 과장이 없는 공격에 프로스트는 거친 숨을 한번 토해낸 다음 감각을 끌어올렸다.

저 무수히 많은 검격 중 반절 이상은 마법으로 만든 환영이다.

보이는 모든 것을 믿었다가는 체력이 버티지 못함을 경험적으로 알았다.

그는 눈이 아닌 초인으로서의 육감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검을 휘둘렀다.

찬란한 황금같이 샛노란 검강이 검에 서린 순간, 프로스트의 검이 수백 개의 잔상을 남기며 휘둘러졌다.

콰과과과-!!

검강과 검강이 맞부딪치며 연쇄적인 마력 폭풍을 일으켰다.

수많은 녹빛의 검격이 폭풍에 휘말려 사라졌지만, 몇 개는 지워지지 않고 프로스트에게 닿았다.

그러나 프로스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호흡을 골랐고, 검격은 그대로 그의 몸을 관통했다.

“역시 부단장이야. 정확히 실체를 지닌 검강만 쳐냈어.”

검격은 언제 프로스트를 난도질 했냐는 듯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녹빛 머리의 사내의 감탄에 프로스트는 나지막이 말했다.

“부단장이 아니라 말했잖나, 아이오마이어.”

“그래, 그랬었지. 웨이븐.”

쓰게 웃은 아이오마이어는 자신들이 서있는 황무지를 둘러봤다.

“삭막한 풍경이야. 이곳에 사는 생명들에게 미안한 짓을 해버렸어.”

이곳은 처음에는 작은 동물들이 살던 나무들이 우거진 숲이었다.

그러나 두 초인의 전투로 모든 생명이 가루가 되어버렸다.

아마 둘을 가둔 결계가 아니었다면 그 여파는 진작 도시까지 미쳤을 터였다.

“이 결계 안에서 너와 싸운 지도 사흘 정도 지났나?”

아이오마이어의 물음에 웨이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 썩은 내 나는 놈이 의식을 시작하는 걸 냄새 맡고 다시 도시로 돌아왔을 때가 그쯤이었으니, 그렇겠지.”

웨이븐의 대답에 아이오마이어는 유쾌하게 웃었다.

“아하하하! 워낙 썩은 내가 진동해야 말이지. 저 멀리서도 느껴지니 얼마나 고약한 냄새란 말인가? 놈에게 좀 씻으라고 전해주게.”

사실 그의 능력으로 의식의 시작을 알아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언제 의식이 시작될 것이란 예언을 듣고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래, 필히 전해줌세.”

이렇게 웃으며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새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한 두 사람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길을 내어주게, 웨이븐.”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건 자네도 알지 않나, 아이오마이어. 이 정도 규모의 의식을 위해 막대한 생명력을 준비해야만 한다는 걸 짐작하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저 도시에서 흑마법으로 인한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거대한 흑마술 의식을 치르는 데는 막대한 생명력이 요구되지만, 한 영지의 영도쯤 되는 도시에선 그렇게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럼에도 생명력 갈취로 인한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건 아주 오랜 시간 조금씩 채취해 왔다는 의미였다.

“그건….”

“은밀함을 위해서란 말은 하지 말게. 저 성격 급한 흑마법사들에게 있어서 은밀함이란 최대한 빨리 의식을 치르고 도망치는 것이니.”

흑마력은 뇌를 건드려 각종 성격 장애를 일으킨다.

그런 이들에게 인내란 지극히 참기 힘든 고행이었다.

이토록 오래 의식을 준비했다는 건 프로스트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새벽별 교단은 그의 아들인 버밀리온을 탐냈고, 프로스트는 그들의 손에서 아들을 충분히 지켜낼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직접 지켜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실력이나 인맥으로 새벽별 교단의 손을 피할 집단에 들어가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기에 새벽별 교단의 흑마법사들은 죽을 것 같은 인내를 하며 때를 기다린 것이다.

“영혼에 진 얼룩은 지워지지 않아. 그리 세탁한다 한들 나는 아무런 잘못 없는 사람들을 희생해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악인이야.”

“내가 보기에는 아직 자네 정도면 하얀 영혼을 지니고 있어. 제발!”

“늦었다고 하지 않았나!”

프로스트는 다시 검을 높이 들어 기수식을 취하며 달려들 준비를 했다.

그런 오랜 친우를 본 아이오마이어는 이를 악물었다.

“네가 하려는 일을 버밀리온이 진정 원할 것 같나? 언제나 정의를 위해 검을 들겠다고, 프로스트 웨이븐 같은 기사가 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아이 아닌가!”

“살아야! 살아야 그런 기사도 될 수 있다!”

“악마에게 희롱당하며 사는 게 사는 거란 말이냐! 웨이븐!”

“…내 아들이라면 이겨낼 거다.”

프로스트의 대답에 아이오마이어는 한탄하며 검을 바로잡았다.

“그렇다면 널 죽여서라도 막겠다.”

“그래, 그게 내가 존경하고 따랐던 단장이지.”

두 초인은 서로를 향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 * *

건물을 뛰어넘어 이곳으로 달려오는 새벽별 교단의 흑마법사들을 보며 버밀리온이 물었다.

“아버지가 저놈들을 불렀다는 게 무슨 말이지?”

살기 어린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향하는 모습은 꽤나 무서웠다.

과연 미래의 검악(劍惡), 금세기 최악의 악당의 자질다운 살기였다.

아버지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 건가?

나는 손을 들어 버밀리온을 경계하는 프레시아를 막으며 대답했다.

“무슨 말이긴, 사실 그대로의 말이지. 부맥증의 치료 방법은 현시점에서 한 가지 방법밖에 없거든.”

“…그게 뭐지?”

“고위 악마와 직계약 한 흑마술사가 육체 개조 의식을 벌이는 것.”

악마와의 계약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대가를 지불하고 일시적으로 악마를 부리는 가계약, 그리고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 잡히고 그 대가로 힘을 받는 직계약이 있다.

세세하게 따지면 종마 계약, 강신 계약 등 종류가 많았지만 모두 가계약과 직계약의 하위 범주였다.

“그것도 단순한 육체 개조가 아니라 흑마법사, 혹은 흑기사들이라면 꿈처럼 여기는 ‘강마지체(降魔之體)’로 만들어주는 의식이야. 강마지체는 절맥이나 부맥밖에 될 수 없거든.”

강마지체가 기사가 된다면 전설의 ‘헬 나이트’가 될 수 있고, 마법사가 된다면 ‘헬 소서러’가 될 수 있다.

정확히는 절맥증이나 부맥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마력을 다루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게 된다.

이 도시를 뒤덮은 의식은 그 재능을 흑마력을 다루는 데 특화되도록 만들어주고, 육신의 상태를 고정시켜 주는 마법이었다.

어쩐지 지금의 버밀리온이 약간 앳돼 보일 뿐, 평범해 보이더니 강마의 의식 때문이었나 보다.

“그러면 살 수 있다고?”

그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살 수 있지. 그걸 산다고 표현할 수 있다면 말이야.”

소설 속의 헬 소서러는 반쯤 새벽별 교단의 1사도에게 종속된 존재였다.

1사도가 헬 소서러를 다루는 데 각별하다 못해 유난스럽게 주의를 기울이던 걸 떠올려 보면, 아마 헬 나이트가 된 버밀리온이 자체적으로 종속을 풀고 탈주했던 모양이었다.

과연 검악 버밀리온이 강한 이유가 있었다.

“강마지체를 만드는 건 흑마법 의식 중에서도 특별히 손꼽히게 제물을 많이 잡아먹는 의식이지.”

내 말에 버밀리온의 표정이 굳었다.

“부맥증은 의식이 아니면 살 수 없어. 어때? 그래도 살고 싶어?”

절맥증은 끊어진 맥을 이어주면 살 수 있지만, 부맥증은 어떻게 해도 부패를 막을 방법이 없다.

강마의 의식조차 더 이상 부패를 막을 뿐, 이미 부패한 것을 되돌릴 순 없었다.

프로스트가 버밀리온이 움직이는 데 그토록 유난을 떤 이유는 신체가 고정되기 전까지 더 부패되는 걸 막기 위해서일 터였다.

내가 설명하던 사이 새벽별 교단의 타는 쓰레기들이 우리 앞에 도착했다.

“버밀리온 님, 그리고 …그 친구분들.”

타는 쓰레기들의 중심에 서 있는 회색 수염의 노령의 흑마법사가 우리를 불렀다.

친구분들이라 부르기 전의 약간의 텀은 그리 듣기 좋은 말은 아닐 것 같군.

휘장에 박힌 별의 숫자로 보아하니 중급 신도 셋에 하급 신도 열넷인가.

“저희는 버밀리온 님을 모시러 온 사람들입니다. 프로스트 경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함께 가시죠.”

그의 말에 나는 코웃음 쳤다.

“하! 거짓말이 서투르군. 삼류야.”

“거짓말이 아니….”

“이 친구 아버지라면 굳이 너희 같은 버러지들을 심부름 보내지 않고 직접 왔을 거다.”

내 사실 적시에 버밀리온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이 심하군요.”

“심하다니? 나는 너희를 높여 불러주고 있다고? 너희 같은 악마 똥 찌꺼기나 받아먹는 새끼들을 버러지라고 부르다니, 버러지가 들으면 얼마나 슬퍼하겠어. 난 그런 슬픔을 감수하고 너희를 친히 높여 불러주는 거니 고개를 조아려 감사해 줬으면 하는데.”

“오우, 좀 치는데?”

버밀리온은 내 언변에 박수를 보냈고, 타는 쓰레기들은 이를 악물었다.

“…순순히 따라오시죠, 버밀리온 님. 지금이라면 저 …이교도들에게 위해를 가하진 않겠습니다.”

친구분들에서 이교도들로 호칭이 바뀌었다.

물론 그 바뀐 호칭도 순화한 표현이리라.

“쯧쯧쯧, 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군. 너희들같이 목 위에 달린 걸 생각하는 데 사용하는 게 아니라 추한 장신구로 사용하는 놈들은 금방 들킬 거란 걸 모르는 건가?”

내 이죽거림에 성질 급한 타는 하급 쓰레기 하나가 소리쳤다.

“그 입 닥쳐! 당장 찢어 죽이고 싶은걸 참고 있는 거니까!”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들려는 걸 그나마 자제라는 걸 아는 노령의 흑마법사가 마법 지팡이로 막아 세웠다.

“저희는 버밀리온 님이 다치는 걸 원치 않습니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시죠.”

저들이 버밀리온에게 저렇게까지 설설 기는 건 버밀리온이 그들의 높은 사람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었다.

강마의 의식을 치룬 버밀리온이라면 바로 새벽별 교단의 최고 직위인 ‘사도’가 될 테니 당연했다.

노령의 흑마법사의 권유에 버밀리온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검을 뽑아들었다.

“거절하겠다. 너희 같은 놈들과 어울릴 생각은 없다.”

버밀리온의 단호한 거절에 노령의 흑마법사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당신같이 위대한 씨앗에게 거칠게 굴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당신께서 자초하신 일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타는 쓰레기들은 검과 마법 지팡이를 뽑아들었다.

“버밀리온 님께는 상처 하나 입히지 마라! 다른 오물 같은 놈들은 죽여도 좋다!”

리더인 노령의 흑마법사의 외침에 타는 쓰레기들은 일제히 덤비려 했다.

딱!

내가 손가락을 튕기기 전까지는.

“커헉!”

“쿨럭!”

“끄르르륵!”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타는 쓰레기들은 피거품을 토하며 일제히 땅에 쓰러졌다.

“커흐으윽!”

피거품을 물며 쓰러진 건 노령의 흑마법사도 마찬가지였다.

내 일행들은 놀라서 날 바라봤다.

“거참, 내가 아무리 만만해 보였어도 그렇지 너무 방심하네.”

내가 한 일은 간단했다. 람의 힘으로 타는 쓰레기들의 폐와 위장에 있는 수분을 폭발시키듯 수증기로 만들었다.

즉, 팽창 한계 용적 이상으로 부피를 늘려 터트린 것뿐이다.

“어, 어떠흑, 게, 그르르륵…!”

그래도 나이를 뒷구멍으로 처먹은 건 아닌지, 다른 놈들과 달리 리더답게 노령의 흑마법사는 저항했다.

그는 자신이 당한 일을 이해하고 경악했다.

그도 그럴 게, 타인의, 정확히는 마력을 단련한 이의 신체 내부에 마법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가능에 가까운 거지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두 가지 전제 조건이 맞으면 상대의 마력 저항 따위는 무시할 수 있었다.

하나는 상대보다 압도적으로 마력 밀도가 높을 것.

나는 아퀼라의 마력회로를 계승한 덕분에 현자 게오르의 최후의 마법에도 간섭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마력 밀도가 높았다.

다른 하나는 상대의 저항을 파훼할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연산 능력.

사실 이건 편법을 사용했다.

굳이 내 연산 능력이 아니어도 해당 원소에 대해서는 숨 쉬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조종하는 정령이라는 존재가 있지 않은 가.

“이제 뒈질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나는 대신 친절하게 즉사하지 않은 타는 쓰레기들의 머리에 총알을 한 발씩 먹여주며 안식을 선물했다.

그리고는 환경을 위해 쓰레기를 유기하지 않고, 비암의 힘으로 소각하며 버밀리온에게 물었다.

“그래서 살고 싶으냐는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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