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악의 갈림길에서 (1)
“쓰읍, 이런 자질구레한 일을 내가 직접 해야 하나?”
영지 일대의 암흑가를 통일한 블랙 맘바 패밀리의 보스, 노르드는 혀를 차며 검은 수정이 가득 담긴 포대를 옮겼다.
그의 불평불만을 들은 검은 옷에 단발을 한 사내, 6사도 어기스트림은 중앙의 단상에 눈을 감고 앉아 흑마력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쓸데없이 입을 열지 말고 일하세요. 상급 신도 노르드 씨. 당신이 아니면 누가 일합니까?”
“거, 저 위에 널린 게 내 부하들인데 이런 단순 노동은 부하들에게 시켜도 되지 않나?”
도시 지하에 마련된 의식 장소에서 노르드는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의 항의에 어기스트림은 혀를 차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쯧쯧쯧, 당신은 세례를 받은 교단원이니 그 수정들의 마력에 버티지만, 당신 부하들은 그 수정에 닿기만 해도 죽어 나자빠진답니다.”
그러고는 그 시체도 당신이 치울 게 아니라면 닥치고 열심히 일하라고 닦달했다.
“댁 부하들은 없수? 전에 보니까 꽤 많은 것 같던데.”
노르드의 물음에 어기스트림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들은 당신 같은 무식쟁이가 아닙니다. 당연히 더 섬세하고, 전문적인 일을 하고 있죠. 예를 들면 당신이 모아둔 제물에게서 생명력을 아주 조금씩 추출해 도시를 뒤덮는 거대한 마법진을 구성하는 일같이 말이죠.”
제물이란 야드가 발견한 술집 지하의 쇠창살 안에 있던 빚을 진 빈민들을 말했다.
그들이 하려는 의식을 시작하기 위한 밑 작업에도 수많은 생명이 필요했다.
중요한 의식인 만큼 이단 심문관들의 예민한 코를 피하기 위해 아주 오래, 아주 조금씩 준비를 해왔고, 또 하는 중이다.
“거, 무식쟁이라 미안하구만. 끄응, 분명 내 부하들 중에서도 세례에 적합한 놈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네에, 있었죠. 당신이 상급 신도가 되겠다고 잡아먹고, 적대 조직 보스를 저주해 죽이겠다고 제물로 쓰고, 저희 교단에 대한 걸 알고 배신하려는 걸 처분하기 전에는 말이죠.”
보통 흑마법사들도 백안시당했지만, 개중에서도 악마 숭배자들은 그 정도를 넘어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블랙 맘바 패밀리 안에서도 외부 세력에 대해 아는 극소수의 간부들도 그저 흑마법사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악마 숭배 교단이란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쇠망치파의 파벌장도 손잡으려고 뒤로 접선했던 흑마법사들이 새벽별 교단인 것을 알았다면 당장이라도 도망쳤을 것이다.
단순히 흑마법사와 악마를 숭배하는 미치광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건 상식이었다.
악마 숭배자임을 알고도 손을 잡은 노르드는 그저 힘을 탐하고, 세력을 늘리는 것에만 관심 있었기에 세간의 인식 따위는 무시했다.
“아하, 그랬나.”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노르드는 훌륭한 새벽별 교단의 교단원이었다.
어기스트림은 그런 그를 흘끔 보며 덧붙이듯 말했다.
“그리고 당신 부하들은 지금 내부 항쟁 중인 것 같더군요. 서로 피 흘리며 싸우던데요?”
“아, 그렇… 뭐?!”
넘겨들을 수 없는 말에 노르드는 놀라서 삽질을 멈추고 어기스트림을 바라봤다.
“그럼 이럴 때가 아니잖아! 말려야지!”
그의 외침에 어기스트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어차피 그들도 제물로 사용할 자원들 아닙니까. 의식이 완성되면 당신 또한 제국으로 피신해야 할 터.”
태양 교단의 이단 심문관 출신 추기경이 눈을 부릅뜨고 전국 각지에서 악마 숭배자 토벌을 하고 있는 이상.
의식의 완성 즉시 제국으로 피난 가야 했다.
흑마법 의식의 대가로 브류타는 향후 백 년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재해 구역으로 변할 테니, 빼도 박도 못 한다.
“끄응, 그래도 내가 아끼는 부하들은 건져 가야지. 이주하더라도 그놈들 없이 나 혼자 언제 다시 조직을 재건하라고. 댁 부하들을 내 조직원으로 줄 것도 아니잖아.”
노르드의 항의에 어기스트림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흥흥, 그깟 내부 항쟁으로 죽는 놈들은 별 도움도 안 될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제가 말했지요. 제 직속 부하들은 당신 같은 무식쟁이와 다른 인텔리라고요. 저야 편하게 대할 것을 허락해 줬지만, 제 부하들에게는 조심하세요. 제아무리 부하를 잡아먹고 상급 신도가 되었어도 당신은 신입입니다.”
“예, 예, 명심합지요.”
어기스트림은 대충 대답한 노르드을 보며 경고했다.
“그리고 지금부터 집중할 테니 괜히 말 걸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사나흘 정도는 명상을 하며 심신을 경건히 해야 하니까요.”
그 말과 동시에 허공에 소환진이 떠오르며 검은 마력을 휘감은 죽음의 기사들이 어기스트림을 호위하기 시작했다.
노르드는 그 위압적인 모습에 열심히 땅을 파고 흑마력을 가득 머금은 검은 수정을 고르게 심었다.
* * *
가면을 뒤집어쓰고 블랙 맘바 패밀리와 놀은 지도 사흘 정도 지났다.
제이드와 야드는 조사를 계속하겠다고 연락한 뒤로 전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간간이 그들의 조사 내용에 대한 정기 보고를 보내오는 게 다였다.
아바스엘과 실루아도 꼭두새벽부터 내 보험을 설치하느라 고생이었다.
늦게나마 돌아와 잠깐 자고, 다시 새벽에 일어나 나갔다.
실루아도 사건의 중대함을 아는지 소중한 기록실에서의 시간을 포기하고 열심히 아바스엘을 도왔다.
아바스엘의 보고에 따르면 설치는 끝났고, 나름대로 자신만의 대비를 더 한다고 했다.
“여유롭구만.”
열심히 일하는 마법사들과 달리 나는 한가롭게 하품하며 저 멀리 벌어지는 패싸움을 구경했다.
첫날에 세 파벌 모두가 큰 피해를 입어서인지 소극적으로 움직이자 나는 버밀리온과 길버트를 투입해 분란을 조장했다.
덕분에 저 머리 나쁜 놈들은 신나게 싸워대고 있었다.
이제는 피해보다 분노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행동을 지배하는 지경에 다다랐는데, 그 과정에서 일반 시민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아, 버밀리온.”
“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오늘도 신나게 싸울 준비를 하던 버밀리온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그런데 이렇게 외박해도 돼? 네 무서운 아버지가 이놈 하며 날 찾아오는 건 아니겠지?”
버밀리온은 나와 함께 불한당 사냥을 시작한 이후로 나와 같은 여관에서 머물며 같이 작전을 짜고 행동했다.
“하하하! 너무 늦게 묻는 거 아니야? 사흘 전에나 물었어야지.”
“뭐, 하루 정도는 그러려니 했는데 왠지 오늘도 여관에서 잘 것 같아서 말이야.”
내 대답에 버밀리온은 키득거리며 작두칼을 휘둘렀다.
“음, 이 칼도 계속 휘두르다 보니 익숙해지네. 내가 외박하는 건 아버지께 허락 맡았으니까 걱정하지 마. 오히려 당분간 할 일이 있다며 당신 대신 신경 써줄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하시던데?”
“그래? 할 일이라….”
이 도시에서 행해질 흑마법 의식은 분명 버밀리온을 치료하는, 아니 ‘개조’하는 의식이다.
절맥증은 끊기고 막힌 길을 잇고 뚫어주면 되는 병이다.
하지만 부맥증은 마력이 다니는 길은 멀쩡했다. 다만 그 길이 마력과 닿으면 썩어 문드러져서 문제였다.
부맥증은 이 세계의 의학과 마법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이었다.
그런 만큼 프로스트가 의식이 행해지기 전까지 돌아와 주지 않는다면 내게 좋은 일이었다.
버밀리온을 내 감시하에 둘 수 있으니까.
그런데 프로스트가 할 일이 뭐지?
분명 흑마법 의식과 연관되어 있을 텐데 마법에 대해 문외한인 순수한 기사가 사교도 마법에 손 보탤 일이 있나?
* * *
제이드와 야드는 방수 후드 망토를 눌러쓰고 기척을 죽인 채 영주성에서 빠져 나왔다.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듯한 암흑가의 지배 조직인 블랙 맘바 패밀리의 뒤를 캐다 보니 영주와 연관된 비리가 넝쿨째 끌려오는 감자처럼 줄줄이 나왔다.
유안의 취미 생활 덕분에 끊임없이 내부 분열 중이라 숨어들어 정보를 빼오기 좋았다.
아니, 좋은 수준을 넘어 땅에 뿌려진 것을 수확하는 수준이었다.
“정말이지, 어떻게 해야 한 번 찌른다는 게 저렇게 되는지 모르겠네.”
지난 며칠간 같이 고생한 덕에 야드는 제이드에게 편하게 대했다.
야드는 내성벽 위에서 서쪽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꽤나 거리가 있는 이곳까지 피 냄새가 물씬 풍겨 올 정도로 도시 서쪽은 엉망이었다.
꽤나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여전히 길거리에서 연장을 들고 싸우는 게 보였다.
“뭐, 유안이니까요.”
가볍게 넘기는 제이드의 목소리에는 굳건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실제로도 자칫 잘못하면 도시 전역이 깡패들의 전쟁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블랙 맘바 패밀리의 내부 항쟁은 도시 서쪽에서만 벌어지고 있었다.
이는 철저하게 깡패들의 항쟁을 유안이 컨트롤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나저나 영주는 그저 한쪽 발만 걸치고 있는 수준이었군요.”
야드가 마법으로 비를 빗겨내며 영주성에서 빼낸 자료를 훑었다.
영주는 부패하긴 했지만 악마 숭배자들과 손을 잡을 정도로 막장이진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이 땅은 영주의 가문에서 대대로 물려받으며 관리해 온 영주의 근간이자 힘이었다.
그런 땅에서, 그것도 영지 변두리도 아니고, 영주성이 있는 도시에서 대규모 흑마술 의식을 벌이는 데 협조할 리 없었다.
“이 정도면 영주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봐야겠어. 영주는 천국 가긴 글렀군.”
그저 의도치 않게 엮인 정도에 불과해 보였다.
돈과 여자, 재물을 상납 받고 뒤를 봐준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이게 드러나면 일단 영주의 일가친척은 모두 사이좋게 손잡고 이단 심문실에 들어갈 게 분명했다.
의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 다리 걸쳤다는 것만으로도 인류의 배반자이자 배교자였으니까.
제국에 성행하는 ‘면죄부’도 통하지 않는 게 악마 숭배자와의 결탁이었다.
“그나저나 일이 복잡하게 되었네. 영주도 깊게 얽혀 있어서 영주성에 의식장을 차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면 영주성은 의식의 중심지가 아닐 테니까.”
도시의 중심지인 영주성만큼 의식장을 설치하기 좋은 곳은 없었는데, 혹시 몰라 지하까지 뒤져봤지만 그런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도시 곳곳에서 이따금씩 느껴지는 위화감조차 없었으니 영주성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러게요. 어디일…!”
야드의 말에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느껴지는 역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럽니까? 제이드 군.”
“…흑마력, 그것도 짙은 생명력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인신 공양을 골자로 한 흑마법입니다!”
제이드의 외침에 야드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의 의미를 피부로 알 수 있었다.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가 봐야겠습니다!”
사방에서 거대한 흑마력의 폭풍이 몰아쳤다.
* * *
사방에서 흑마력이 뻗어나가며 검은 기둥이 하늘까지 솟아올랐다.
“도련님!”
프레시아의 외침에 나는 작게 혀를 찼다.
“쥐새끼들이 드디어 활동을 시작했군.”
가급적이면 의식이 시작되기 전에 제이드와 야드가 찾아내 주길 바랐지만, 역시 무리였나.
하기야 상대는 최소 사도급, 그것도 몇 년간은 철저하게 은폐하며 준비해 왔을 테니 사전에 적들을 분쇄하는 건 무리였다.
이는 두 사람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저 정보와 경험의 부재가 원인일 뿐.
계속해서 경험을 쌓아간다면 이 정도 의식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겠지.
소설 속에서 이곳에서 벌어질 일이 묘사가 되었다면 어떻게든 했을 텐데, 지금은 아직 소설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의 시점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말에 버밀리온은 당황해서 날 바라봤다.
“쥐새끼들이라니? 저 검은 기둥이랑 사방에서 풍기는 이 기분 더러운 느낌에 대해 뭔가 아는 거야?”
그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었다.
“물론 잘 알지. 저 검은 기둥과 기분 더러운 흑마력은 네 아버지가 널 치료하려고 부른 악마 숭배자 놈들의 의식이거든.”
내 말과 동시에 버밀리온을 의식의 중심으로 데려가려는 새벽별 교단의 흑마법사와 전투원들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손에 정령 권총을 들고 말했다.
“자, 전투 준비. 상대는 인간의 탈을 쓴 쓰레기니 소각하자고.”
그래도 구성 성분이 탄소가 대부분인 덕분에 타는 쓰레기라서 다행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