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비 내리는 뒷골목 (12)
핼쑥한 인상인 작두파의 파벌장은 갑작스러운 항쟁에 정신이 없었다.
그는 손도끼파의 기습 공격에 일시적으로 아지트에서 피신했다.
싸울 준비도 하지 않고 평소처럼 술이나 마시고 있는데 손도끼파의 정예가 몰려오니 별수 없었다.
다행인 점은 자신의 주력 중에선 크게 다친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형님! 이대로 있을 겁니까?!”
부하들은 공격당하자 제대로 열이 받은 듯 손도끼 파를 공격하자고 외쳤다.
먼저 공격당했다고는 하지만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게다가 손도끼파 녀석들은 자신들을 공격할 때 작두파가 먼저 공격했다고 외쳤다.
부하들의 아우성에도 침묵하던 그때, 골목 사이로 상처를 입은 듯한 부하가 다리를 절뚝이며 달려왔다.
“혀, 형님!”
“한스! 무사했구나!”
다리를 절고 피가 묻어 있었지만 겉보기엔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다.
한스라 불린 깡패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다급하게 외쳤다.
“형님! 여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큰일 났습니다! 쇠망치파 놈들이 우리인 척을 하고 손도끼파 놈들을 공격했습니다!”
“뭐? 뭐라고?!”
당황했지만 왜 손도끼파가 자신들을 공격했는지 이해가 갔다.
“제가 쇠망치파 놈들 밑에 뒷돈 먹여놓은 게 있는데, 그놈들이 말하길 쇠망치 놈들이 뒤통수쳐서 조직을 꿀꺽하려는 것 같습니다! 저한테 죽기 싫으면 도망치라고 했는데, 이렇게 알리기 위해 왔습니다!”
한스가 같은 조직 사람에게 뒷돈을 먹여놨다는 말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같은 조직이라도 원래는 다른 조직이 흡수 합병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조직이었던 파벌이 정보를 숨기는 건 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가 영민하지 못한 작두파의 파벌장은 이해할 수 없었다.
“쇠망치 새끼가? 그런데 왜 그놈들이 우리인 척하고 손도끼 놈들을 공격해?”
당황하는 작두파 파벌장을 보며 한스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아이고 답답해! 쇠망치 놈들 간부 중에 머리 돌아가는 새끼 있잖습니까! 에탄! 그 새끼가 손도끼파 놈들 공격하기 전에 전력 분산시킬 방법이 있다며 우리가 손도끼파를 공격한 것처럼 꾸미자 했답니다!”
“뭐?! 이 자식이!”
“갑자기 손도끼 놈들이 공격한 게 이상해서 알아보니, 잘은 모르겠지만 쇠망치파 파벌장이 몰래 뭔가를 한 모양입니다. 그걸 손도끼파 파벌장이 눈치챈 것 같다고 선수 치기로 했답니다!”
작두 파의 파벌장은 한스가 말한 ‘뭔가’가 뭐인지 짐작이 갔다.
흑마법사다.
그는 그리 똑똑하진 않았지만 뒷골목에서 살아오면서 생리를 몸으로 익혀왔기에 쇠망치파 파벌장 놈이 할 짓은 눈에 훤했다.
“지금 쇠망치 새끼들이 손도끼파를 공격하고 있다고요!”
한스의 외침에 작두파의 조직원들은 분노했다.
“한스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쇠망치 새끼들을 쳐야 합니다!”
“이런 처죽일 새끼들!”
부하들의 반응에 작두파의 파벌장은 한스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으냐?”
한스는 자신의 부하들 중에서도 똑똑하고 악랄해서 꾀주머니 역할을 해왔다.
그의 물음에 한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지금 손도끼파를 공격하고 있는 쇠망치파의 뒤를 쳐야 합니다! 쇠망치 놈들이 손도끼파를 공격하고 있다면 제 말이 사실이니 죽여버려야 하고, 손도끼 놈들과의 오해도 풀 수 있을 겁니다!”
오해를 풀 수 있다는 말에 작두파의 파벌장은 옳다구나 무릎을 쳤다.
“지금 당장 쇠망치 새끼들의 뒤를 친다!”
“오오~!”
작두파 파벌장의 선언에 부하들은 각자 무기를 챙기고 손도끼파의 아지트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다리를 절뚝거리던 한스도 같이 소리치며 뒤따르다가 자연스럽게 천천히 뒤쳐졌다.
그리고는 흥분한 깡패들과 충분히 멀어지자 슬쩍 골목 사이로 빠졌다.
“쯧, 돌대가리들. 귀찮게 일일이 설명을 해야 알아먹는다니까. 그래서 좋은 거지만.”
키득거리던 한스는 잠시 얼굴을 만지더니 곧 금발의 유약한 인상의 소년으로 바뀌었다.
“아~! 재미있다. 다음에는 작두파 아지트를 부수고 있는 손도끼파에게로 가볼까.”
유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비 내리는 뒷골목을 거닐었다.
* * *
나는 건장한 체격의 위장을 흐트러트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가 깡패 파벌 세 곳을 돌아다니며 수작을 부리는 동안 아무도 내 위장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은하의 광학 위장 속에 람의 힘으로 가짜 피부를 만들고, 비암의 힘으로 체온까지 따라 했다.
게다가 나비의 힘으로 목소리까지 변조했으니 더더욱 눈치채기 힘들었을 거다.
물론 야드의 조사 자료를 참고했을 뿐, 내가 직접 연기하는 대상을 관찰한 건 아니라서 오래 대화했다면 들켰을 거다.
그래서 은하의 힘으로 위장하기 앞서서 일단 가면을 쓰고 분쟁을 일으킨 거다.
머리에 피가 몰리고 생각이 복잡해지면 자잘한 건 눈에 안 들어오는 법이었으니까.
“고생하셨습니다.”
길버트가 내게 우산을 씌워줬고, 프레시아가 수건을 건넸다.
위장하고 구르느라 옷에 흙탕물이 조금 튀긴 했다.
람의 가짜 피부 덕분에 많이 묻진 않았지만, 그래도 수건을 물에 적셔 옷을 닦아냈다.
그러고는 람의 힘으로 비에 젖은 프레시아를 말려줬다.
내가 깡패들을 속이는 동안 날 지키겠다고 기척을 죽인 채 내 근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어서 비를 피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뭘. 은하야, 나비야.”
내 호명에 은하가 내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도시 서부 이곳저곳을 비추고, 나비가 소리를 들려줬다.
-쇠망치 새끼들! 가만두지 않겠다!
마침 손도끼파의 아지트 인근에 세 파벌의 전력이 한데 모였다.
작두파의 깡패들은 쇠망치파의 깡패들의 배후를 공격했다.
-쇠망치와 작두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모두 죽여버려!
그때 마침 도착한 손도끼파가 다시 작두파의 배후를 공격했다.
내가 손도끼파에게 가서 쇠망치파가 손도끼파의 아지트를 공격하는데, 그걸 알게 된 작두파가 쇠망치파를 돕기 위해 가세했다고 속여서였다.
-으아악! 아니야! 오해야!
-우리 아지트에 무기를 들고 몰려와선 뭐가 오해란 거냐!
손도끼파가 작두파도 공격하자 작두 파도 해명은 둘째 치고 자기 방어를 위해 손도끼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꼬리의 꼬리를 무는 삼파전은 하늘에 내리는 비가 씻겨내지 못할 정도로 흥건하게 그 일대 바닥을 피범벅으로 만들었다.
오늘 항쟁으로 블랙 맘바 패밀리의 세력이 적어도 삼분의 일은 사라질 거다.
죽거나 재기 불능이 된 놈들은 제외하고 생각해도 당장 거동이 불가능한 부상자들을 보면 며칠간은 반쯤 괴멸 상태에 빠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나저나 이상했다.
블랙 맘바 패밀리의 보스인 노르드는 왜 보이지 않는 거지?
“이야, 내가 그린 그림이지만 잘 나왔네. 어때? 마음에 들어?”
나는 일단 의문을 제쳐두고 버밀리온에게 물었다.
버밀리온은 계속 감탄하며 세 파벌의 항쟁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마음에 들다뿐이겠어? 나는 지금까지 저놈들을 어떻게 무리에서 떨어트리고 유인할지만 생각했지, 저렇게 내부 분열을 시킬 생각은 못 했거든. 그런데 나도 저기 끼면 안 되나?”
싸우지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왜 이렇게 호전적이야?
훗날의 검악이라면 이해가 가긴 하지만.
그의 부탁에 나는 정령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깡패들을 향해 고갯짓했다.
“당연히 되지. 마음에 드는 파벌을 골라봐. 내 추천은 작두파야. 역시 길쭉한 날붙이가 손에 맞을 테니까.”
“그거 좋지!”
“아, 그래도 적당히 날뛰어. 너무 활약했다간 사흘에 걸쳐 완벽히 괴멸하도록 만들 계획이 어그러지니까.”
“하하하하! 걱정 마!”
버밀리온은 작두를 휘두르며 손에 감각을 익혔다.
그러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참 한심하군.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을 그저 몸의 병만을 탓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으니 말이야.”
“뭐, 생각했어도 쉽게 행동으로는 못 옮길 만한 계획이긴 했지.”
나같이 변장에 능숙한 초일류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무슨 병이길래 그러는 거야? 싸우는 걸 보면 그렇게 몸이 안 좋지도 않던데?”
안색은 좋지 않았지만 신체 능력은 오히려 어지간한 기사보다 좋아 보였다.
소설 속에서도 검악 버밀리온이 어렸을 때 병을 앓았다고만 나왔지, 무슨 병이었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검악은 악마 숭배자들과 연관된 약간 비중 있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악마 숭배자들은 아무래도 메인 빌런이 아니었다 보니 덩달아 검악에 대한 자세한 정보도 없었다.
내 물음에 버밀리온은 머뭇거렸다.
그런 그의 반응에 길버트가 활기차게 말했다.
“도련님께선 의학 쪽으로 조예가 깊읏!”
나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길버트의 발등을 힘껏 밟으며 말했다.
“병에 대해 알리기 꺼려진다면 굳이 억지로 말할 건 없어. 내가 프라이버시는 지키는 사람이거든.”
내 말에 버밀리온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처럼 진심을 다해 사귄 친구에게 숨길 만한 이야기는 아니야. 다만… 고명하다는 의사도, 신실한 성직자도 날 치료할 방법을 못 찾았거든.”
고명한 의사라.
버밀리온이 말한 의사는 프로스트의 인맥, 아니 자유 기사 동맹의 맹주이자 유일한 기사단의 단장인 겔스토 아이오마이어의 인맥을 떠올리면 독원의 실력 있는 의사일 터였다.
그도 그럴게 아이오마이어는 ‘아르카나 11, 정의’였으니까.
아이오마이어는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프로스트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을 테니까.
“치료한 의사와 성직자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
내 물음에 버밀리온은 눈을 감고 의사의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이름? 의사는 아마… 말레 제프, 아니 카프? 말레 카프리즈? 그리고 올리브 트리트… 트리트먼트였을 거야.”
그런 주스와 모발 영양제 같은 이름이 아니었을 거다.
디지즈 마스터(Disease Master) ‘말레콥 제프리즈’, 프로시저 마스터(Procedure Master) ‘올리번 트리톨먼’.
마법과 신성력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병을 치료한다는 현 시대 최고의 다섯 의사, 천수오의(天數五醫) 중 두 사람이나 붙었는데도 치료하지 못했다고?
“그리고 성직자는 아멜리라는 여자였어. 되게 예쁜 여자라서 말이야.”
아멜리, ‘아르카나 02, 여교황’.
단순히 신성력으로만 봤을 때 모든 교단을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괴물이었다.
“무슨 병이길래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녀석들이 포기한 거지?”
“어, 유명한 사람들이야?”
버밀리온의 벙찐 얼굴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사람들에게 돈으로 진료받으려면 금괴 상자로 집을 지을 정도로 가져다 바쳐야 할 정도는 되지.”
“와! 숙부, 그러니까 아버지 동료분 소개로 진료받았는데 대단한 사람들이었구나.”
감탄한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사람들도 못 고쳤단 말이지? 내 병명은 부맥증(腐脈症)이라고 하더라고.”
“부맥증…. 농담처럼 했던 마력을 사용하면 죽는 병에 걸렸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내 병을 알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맥증. 길버트의 동생이 걸렸던 절맥증과 맞먹을 정도로 극도로 희귀한 질병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마력을 모두 가지고 있다.
흔히 생명력이라 불리는 것도 마력의 일종이었다.
절맥증은 그런 마력이 자연스럽게 몸을 순환해야 하는 길이 끊겨 죽는 병이라면, 부맥증은 몸이 마력과 닿으면 썩어 죽는 병이었다.
절맥증은 발병 후 5년이면 죽지만, 부맥증은 식물처럼 살면 40대까지는 살 수 있었다.
생명력도 마력이라 활발하게 움직일수록 전신이 썩는 속도는 빨라진다.
“알고 있어.”
치료법뿐만 아니라 악마 숭배자들이 이 도시에서 하려는 짓거리도, 그의 재능의 정체도, 훗날 검악이 되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그럼 치료 방법도?”
치료 방법을 묻는 목소리에 전혀 기대감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치료 방법을 알려주기 전에, 네가 이 영지 사람들을 위해 움직이게 한 ‘정의’는 네게 어떤 의미지?”
내 물음에 버밀리온은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나의 신념, 동경, 그리고 목숨을 걸어도 좋을 정도로 소중한 것.”
그의 대답에 나도 대답했다.
“그렇다면 너는 반드시 죽을 거야.”
비정하고 잔학한 운명은 그에게 두 가지 길만을 남겼다.
정의를 숭상하다 죽거나, 금세기 희대의 악당이 되거나.
어느 쪽이든 지금의 버밀리온에게 있어선 죽음이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