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비 내리는 뒷골목 (9)
“그거 좋은…! 말인지, 아닌지는 자세한 이유를 들어보고 결정할까?”
나는 사나워지는 프레시아의 눈초리에 다급하게 말을 수정했다.
프레시아는 그런 나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프레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싱긋 웃으며 어서 흥미로운 제안을 계속하라 손짓했다.
버밀리온은 그런 날 보며 폭소했다.
“으하하하하! 너 잡혀 사는구나?”
“시끄러워. 자세한 이유나 빨리 말해. 뒷골목 양아치 새끼들은 네 아버지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내 물음에 버밀리온은 쓰게 웃었다.
“이 도시에서는 그렇지. 그 녀석들은 양아치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세력이 거대해. 영도(領都) 브류타 밖의 도시나 마을들은 여전히 그놈들에게 수탈을 당하고 있어.”
“네 아버지라면 충분히 지워버릴 수 있을 텐데?”
프로스트는 초인이다.
뒷골목의 깡패 세력이 아무리 거대해 봤자 간부에 검기 비스무리한 걸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나 있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니 프로스트가 마음만 먹으면 그들을 지워버리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내 지적에 버밀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쉽지 않아. …정확히는 내 탓이 커.”
버밀리온의 설명에 따르면 이 영지의 영주는 암흑가에게 주기적으로 뒷돈을 먹으며 수탈에 동참하고 있었다.
프로스트는 병에 걸린 아들 탓에 멀리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깡패들을 한자리에 모두 모아놓고 한 번에 쓸어버리지 않는 이상 바퀴벌레처럼 숨어버릴 거다.
프로스트와 원한이 생긴 깡패 잔당들은 버밀리온을 노릴게 분명했다.
마력 한 줌 사용하지 않고도 잘 싸우는 버밀리온을 보면 ‘제까짓 놈들이 노려봤자’ 같긴 했지만, 밤낮없이 사람들 사이에 숨어들어 공격하면 답이 없긴 했다.
“딱히 네 탓은 아닌 것 같다만.”
내 말에 버밀리온은 피식 웃었다.
“아니, 내 탓이야. 나 때문에 아버지께선 타협할 수밖에 없었어.”
타협이라, 소설 속의 프로스트는 아들과 연관된 일이 아니라면 미온적인 인물이었다.
어쩌면 등장이 거의 없는 엑스트라라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프로스트가 등장하는 이유는 어지간해서 검악 버밀리온과 연관되었을 때뿐이었으니까.
그래도 자유 기사 동맹은 자유와 정의를 숭상하는 집단이니 현 시점에선 그렇게 미온적인 인물은 아닐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겉보기엔 버밀리온이 타락하기 전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네가 굳이 움직일 이유는 없지 않나?”
내 물음에 버밀리온은 약간 으스대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웃어보였다.
“이유 따위는 필요 없어. 그게 바로 올바른 정의니까.”
훗날의 검악이 짓기에는 너무나 올곧은 미소였다.
* * *
이른 새벽, 제이드는 마법으로 은신한 채 야드와 프레시아가 발견한 술집의 지하 공간으로 숨어들었다.
빛의 정령만큼 정교하지는 못했지만, 하품이나 하며 졸고 있는 허술한 경비 하나쯤은 간단히 속일 수 있었다.
어제 저녁 무렵 야드와 한 번 찾아왔지만 그때는 이미 철창 안의 사람들이 사라져 있었다.
야드는 철창 안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도시에 온 첫날, 빛의 정령인 은하에게 위장을 지워달라고 하지 않아서 들어온 게 들킨 게 아닌가 자책했다.
하지만 제이드는 그런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 않았다.
유안이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은하에게 두 사람을 감추는 것 외에 힘을 사용하게 될 때면 10분 안에 힘을 회수하라 지시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 사이 누군가 광학 위장에 접촉하게 된다면 유안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이런 일에 철두철미한 유안이 실수할 리 없다고 제이드는 확신했다.
“역시 가능성은 제물로 사용하기 위함인가?”
어떤 목적이든 흑마법 의식의 때가 다가왔기 때문에 따로 보관하고 있던 제물을 의식의 장소로 옮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미세하게나마 흑마력이 검출된 빈민 거리의 사람들도 제물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꽤나 급하게 움직인 듯했다.
철저하게 흔적을 지워왔던 이들이 마력흔을 남겼기 때문이다.
어째서 급하게 움직였을까?
고민하던 제이드는 금세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악마숭배자들이 급하게 움직인 이유는 유안 때문이다.
정확히는 유안과 자하룡 바하무트의 내기로 인한 결과였다.
“유안이 턴 백작이 굉장히 높은 사람이었나 보군.”
제이드는 확신했다.
유안은 바하무트가 태양 교단의 추기경과 인연이 있다고 했고, 유안이 나오자마자 태양교단의 성기사들이 백작의 집에 들이닥쳤다.
유안이 바하무트에게 넘긴 비리 장부는 그냥 비리 장부가 아니었던 셈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제이드는 잠시 눈을 감았다.
지금은 악마 숭배자들이 어째서 급하게 움직였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할 일은 흑마법 의식을 치르는 장소가 어디인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
시간이 지나 희미해진 마력흔을 더듬던 제이드는 무언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위화감… 그래! 도시를 돌아다니며 느낀 위화감! 그게 이 마력흔이었나!”
어제 저녁, 처음 왔을 때는 제이드가 어렵지 않게 감지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마력흔이 남아 있었기에 알아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집중하며 간신히 남은 미세한 흔적을 더듬다 보니 도시에 옅게 깔린 위화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제이드는 대충 도시를 돌아다니며 그린 지도를 꺼내 유독 위화감이 느껴졌던 곳을 표시했다.
자신이 그린 표시를 가만히 살피던 제이드는 경악했다.
“설마…! 어느 특정 장소가 아니라 도시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의식인가!”
이게 사실이라면 이 도시는 거대한 재해 구역이 될 것이 분명했다.
제이드는 차가운 눈으로 마력흔의 잔향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 * *
버밀리온과 즐거운 취미 생활. 아니,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활동을 약속한 다음 날.
오늘도 하늘엔 구름이 가득하고 자박하게 비가 내렸지만, 어제의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를 생각하면 꽤나 온화한 날씨였다.
비바람이 잦아든 탓인지 나비와 람은 진정한 상태였다.
다만 비구름 속에서 천둥 번개가 치는 건 여전한지 누니는 내 머리 위에서 신나게 춤을 췄다.
나는 내 팔에 감긴 채 고개를 축 늘어트린 비암의 머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아바스엘과 야드의 경과 보고를 들었다.
“위화감이 들었던 마력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만, 마법진 설치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은밀함을 가장 중요시 여겨서 사흘 정도는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아바스엘 혼자였다면 사흘이 아니라 석 달이 걸릴 규모였지만, 단순한 일은 실루아의 인형들이 처리하니 시간이 단축되었다.
시간 단축은 실루아를 아바스엘과 붙인 이유기도 했다.
“제이드 군과 함께 납치된 사람들을 보러 갔었는데 모두 사라져 있더군요. 하지만 미세한 마력흔을 발견해서 지금 제이드 군이 계속 추적하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고생이네.”
어제도 밤늦게 돌아와서 급한 일이 아니면 내일 보고하라고 했는데 내가 일어나기 전인 새벽부터 먼저 나간 모양이다.
하여간 정의감이 투철하다니까.
아직 미숙한 녀석인데 야드가 없는 사이 사고나 안 쳤으면 좋겠다.
“아마 도시 서쪽의 암흑가와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은밀하게 불법적인 일을 하는 데에 깡패 새끼들이 끼어 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 이건 어제 말씀하신 대략적인 암흑가 파벌에 대한 정보입니다.”
“천천히 해도 됐는데.”
“아닙니다. 그저 모아둔 정보를 정리한 것뿐인걸요. 얼마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야드는 싱긋 웃어 보이고는 마저 보고를 했다.
“그리고 제이드 군이 빈민 거리의 사람들을 살펴봤는데, 마력과 생명력이 추출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보통 강제로 추출하면 괴로워하기 마련인데, 평온한 게 이상해서 머리 부분을 살폈더니 흑마력이 검출되었습니다.”
야드의 보고에 아바스엘이 침음성을 흘렸다.
“으흠… 역시 주군의 예상대로 악마 숭배 교단 놈들이 숨어 있는 모양입니다.”
흑마법사가 꼭 악마 숭배자인건 아니었지만, 악마 숭배자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흑마법을 사용했다.
적어도 부전공으로라도 흑마법을 익혔다.
“아바스엘은 마법진 설치 확실하게 해줘. 어지간하면 안 쓸 거지만 보험은 필요하니까.”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야드는 최대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주의하고. 암흑가는 내가 별도로 쑤셔댈 생각이니까 소란스러워지면 나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뒤를 털어줘.”
“알겠습니다. 제이드 군에게도 말해두죠.”
두 사람의 보고가 끝나갈 무렵 여관 밖을 감시하던 은하가 버밀리온의 접근을 알려왔다.
“자, 그럼 오늘도 열심히 해보자고. 끝나면 각자 원하는 음식 하나씩 해줄 테니까.”
식재료가 허락하는 한에서 말이다. 살짝 올렸던 비암의 머리가 천천히 내려가더니 이내 축 쳐졌다.
나름 기운 차리라고 마력을 화염 마법에 사용하는 형질로 변환시켜 불어넣어 줬는데도 맥아리가 없다.
장마만 끝나면 불지옥 같은 날씨로 살판 날 테니 그냥 둘까.
내 말에 아바스엘은 기대감에 웃었고, 내가 차린 음식을 먹어본 적 없는 야드는 궁금해했다.
“유안 군. 프레시아 양이 있으니 괜찮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세요.”
야드의 걱정에 나는 싱긋 웃었다.
“내가 또 한 조심 하는 사람이거든.”
내 말에 옆에 앉아 있던 프레시아는 불신의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래도 내가 누구보다도 용의주도한 사람이니까 걱정하지 마.”
말을 정정하자 프레시아는 그제야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하네.
나는 두 사람을 방에 두고 프레시아와 길버트를 데리고 여관 1층으로 내려갔다.
여관 정문에는 버밀리온이 젖은 우산을 바닥에 탁탁 치며 빗물을 털어내고 있었다.
“좋은 아침. 일찍 왔네. 아침밥은 먹었어?”
내가 인사하자 버밀리온은 웃으며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좋은 아침! 아침은 당연히 먹고 왔지. 이야~! 어제부터 설레서 말이야. 협객행에 로망이 있었거든.”
버밀리온은 부주의하게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다행히도 이른 아침엔 여행객이 별로 없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더욱 그랬다.
내 일행이 반쯤 전세 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괜한 소리가 깡패들 귀로 들어갈 위험이 있었다.
여기가 일부러 아침부터 찾아와서 식사를 할 정도의 맛집이 아니라 살았다.
나는 가볍게 꾸중하듯 주의를 주며 우산을 쓰고 여관을 나섰다.
“네가 세운 계획이 있어?”
내 물음에 버밀리온은 아무 생각 없는 듯 멍청하게 웃어 보였다.
“그냥 복면을 쓰고 기습해서 때려잡으면 되는 거 아니야?”
“아이고야. 그따위로 잘도 불한당 사냥을 한다는 생각을 했네.”
“아하하하, 너무 무식했나?”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는 버밀리온을 뒤로하고 야드가 노트에 정리한 정보를 살폈다.
이틀 만에 수집하고 정리했다고 하기에는 상세하고 분량이 많았다.
이 정도나 되는 정보가 있다면 할 수 있는 수작은 수십 가지나 된다.
“나만 따라와, 양아치 새끼들을 상대하는 법을 제대로 알려줄 테니까.”
나는 유쾌하게 웃으며 앞장섰다.
즐거운 양아치 사냥, 아니 정의 세우기다. 협객 나가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