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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149화 (149/214)

제149화. 비 내리는 뒷골목 (8)

버밀리온은 기분이 좋은지 흥얼거리며 우리에게 수건을 나눠줬다.

폭풍우를 뚫고 오긴 했지만, 나비와 람의 힘으로 젖지 않고 왔기에 살짝 물기만 묻은 상태였다.

아예 젖지 않고 뽀송뽀송하게 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집 앞에서 정령의 힘을 거두고 일부러 비를 좀 맞았다.

“폭풍우가 너무 심해서 못 올 줄 알았는데 용케 왔네?”

“내가 마법을 조금 사용할 줄 알아서 말이야.”

“아하, 그래서 생각보다 멀쩡했구나. 오면 물에 젖은 생쥐 꼴로 올 줄 알았거든.”

내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고개를 주억인 그는 프레시아를 보며 물었다.

“처음 뵙는 분인데 혹시 어제 말했던 호위분?”

버밀리온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 호위인 프레시아. 이쪽은 어제 사귄 친구.”

내 소개에 버밀리온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더니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속삭였다.

“여자라는 말은 없었잖아!”

당황하는 그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여자면 뭐? 호위 기사가 강하면 됐지, 뭘 더 바라?”

“아니, 그건 그렇지만… 저렇게 예쁜 사람과 심장 떨려서 어떻게 검을 맞대!”

최근 몇 달간 프레시아의 외모보다 실력에만 관심을 두던 사람들만 보다가 외모에 집중하는 사람을 보니 신선했다.

하긴,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긴 하다.

길버트도 처음엔 아닌 척 얼굴을 붉히며 프레시아를 흘끔흘끔 보곤 했었다.

지금이야 프레시아에게 갈굼, 아니 훈련을 받다 보니 공포와 두려움으로 눈치를 보는 걸로 바뀌었지만.

프레시아의 진면목을 한눈에 알아볼 안목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외모에 집중하곤 했다.

그래서 프레시아는 외출할 때 어지간해서 후드를 눌러쓰거나 야드의 천변 가면을 애용했다.

“검이나 맞댈 수 있으면 다행이지. 너 정도는 굳이 검을 안 들어도 손가락 하나로 제압할 수 있을걸.”

내 말에 프레시아를 흘끔 본 버밀리온은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 정도로 강해?”

“길버트가 말했잖아. 자기가 병대 단위로 있어도 못 이긴다고.”

내 대답에 버밀리온은 언제 부끄러워했냐는 듯이 프레시아를 보는 눈이 호승심으로 물들어 갔다.

이 녀석도 천성이 검객이긴 하군.

내 어깨에서 팔을 푼 그는 장난스레 웃으며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버밀리온이 안내한 곳은 벽난로가 있긴 했지만 거실이라기에는 황량했고, 마치 실내 도장처럼 넓은 공간이었다.

버밀리온은 스스로 안내해 놓고 아차 싶었는지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 손님을 초대해 놓고 체단실로 바로 안내한 건 조금 그런가?”

역시 체력 단련실이었나.

하기야, 시기상으로 프로스트가 자유 기사로서 반쯤 은퇴한 상태긴 해도 단련을 게을리 할 리가 없었다.

버밀리온은 프로스트의 눈치를 보느라 거의 이용을 못 할 테지만 오늘은 길버트와 프레시아라는 변명거리가 있으니 자유롭게 사용할 모양인가 보다.

나는 차라도 내올까 물으며 머쓱해하는 그의 등을 쳤다.

“됐어. 놀 공간으로 잘 안내해 줬는데, 뭘.”

내가 길버트에게 눈짓하자 길버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에서 날이 죽은 철검 두 자루를 꺼냈다.

그러자 버밀리온은 환하게 웃으며 검 한 자루를 받았다.

“그럼 어디 몸이나 풀어볼까?”

두 사람은 어제처럼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 바라봤다.

나는 그런 둘을 보며 프레시아에게 말했다.

“저 녀석의 검을 잘 봐둬.”

프레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련의 심판을 자처했다.

프레시아의 신호에 길버트와 버밀리온은 다시 검을 맞부딪쳤다.

* * *

폭풍우가 몰아치는 강변에서 수많은 사내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대부분은 과수원이나 논밭을 일구는 농부와 그 가족들이었다.

그들은 분주하게 삽으로 땅을 파 자루를 채우고, 강물이 범람하지 못하게 흙포대로 토사를 쌓았다.

그러고는 토사가 무너지지 않게 말뚝과 밧줄로 고정했다.

열심히 흙 포대를 옮기는 농부들 사이에서 프로스트는 마력이 서린 삽으로 과수원과 반대 방향으로 배수로를 만들었다.

강물이 예상 이상으로 불어나 범람하게 되면 파놓은 길을 따라 흐를 수 있게 장정 하나는 가볍게 들어갈 깊이와 넓이였다.

프로스트가 파낸 땅의 흙은 다시 포대 자루에 담겨 옮겨졌다.

“핫핫핫! 별 쓸데없는 일을 하시는군요.”

검은 정장 차림을 한 갈색 단발의 사내, 새벽별 교단의 6사도, 어기스트림은 검기까지 사용하며 열심히 배수로를 만드는 프로스트를 비웃었다.

현장과 어울리지 않는 정장 차림 탓에 눈에 띄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어기스트림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어기스트림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을 느끼고 그 사실을 알아차린 프로스트는 혀를 찼다.

“쓸데없이 그 불쾌한 마력을 풍기지 마라.”

어기스트림은 정신 간섭계 마법으로 사람들이 스스로를 인지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이는 광학계와는 다른 방식의 투명화 마법이었다.

“저런, 쓸데없는 일이라니요. 가장 필요한 일이죠. 당신도 제가 거리낌 없이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 말에 프로스트는 혀를 찼다.

“그리고 말했듯이, 쓸데없는 일이란 제 마법보다는 당신이 하고 있는 행위를 말합니다.”

어기스트림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어차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의식을 치른다면 과수원이나 논밭 따위 가꿀 사람은 남지 않을 것 아닙니까? 단 한 명도 말이죠~”

놀리듯 장난스럽게 웃는 어기스트림을 보며 프로스트는 순간 살기를 제어하지 못했다.

일대를 휘감은 초인의 살기에 흙 포대를 쌓던 이들이 갑자기 심장을 부여잡고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초인의 정제되지 않은 살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흉악한 무기였다.

프로스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재빨리 살기를 회수했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 기절하고, 기절하지 않은 이도 공황 발작을 한 것처럼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어기스트림은 유쾌하게 웃었다.

“핫핫핫! 고명하신 자유 기사께서 그러시면 안 되죠. 가여운 사람들이 다치지 않습니까. 아니, 제물들이라 표현해야 옳을까요? 아드님을 생각하셔서라도 저 가여운 제물들을 아끼셔야지요.”

계속되는 이죽거림에 프로스트는 분노했지만 심호흡을 하며 머리를 차갑게 했다.

“무슨 볼일이지? 준비하겠다는 일은 다 끝난 거냐?”

프로스트의 물음에 어기스트림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요.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지만 완성되려면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럼 왜 내게 와서 천둥벌거숭이처럼 깝죽거리는 거지? 네놈의 사지라도 베어달라고 귀찮게 구는 건가? 손이나 혓바닥은 그래도 필요할 테니 다리가 좋겠군.”

살벌한 목소리에 어기스트림은 키득거리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가 손에 짚고 있는 지팡이에 검고 끈적이는 마력이 맺혔다.

그것은 사방으로 퍼져 기절한 사람들을 깨우고 공황 발작을 일으킨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저 도시에 미세하고 불쾌한 위화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모르니 알아두고 주의하라고 말씀드리기 위해 찾아온 겁니다.”

어기스트림은 자신의 친절을 곡해한다며 장난스럽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알겠다. 주의하지. 그러니 내 눈앞에서 꺼져라.”

“예이, 예이. 누구의 말씀이신데 들어드리지 못할까요.”

마지막까지 이죽거리던 어기스트림은 지난번과 같이 연기처럼 흩어지듯 사라졌다.

“프로스트 님, 쉬면서 하십쇼! 저희들 일인데 무리시키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방금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졌던 사람들은 그랬던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프로스트에게 쉴 것을 권했다.

그런 그들을 본 프로스트는 잠시 할 말을 고르지 못하다가 삽자루를 움켜쥐었다.

“아니오. 크게 무리가 가지 않으니 빨리 끝내겠소. 계속 비를 맞고 있을 순 없지 않소.”

그가 단련한 육체는 이런 비바람에 쉬이 쇠할 정도로 어설프지 않았다.

다만 최대한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아들이 있는 집으로.

* * *

길버트와 대련을 하고 프레시아와 마주 선 버밀리온은 검을 든 채로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프레시아의 미모에 부끄러워하던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그의 표정에는 긴장과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오시지 않는 겁니까?”

프레시아의 물음에 버밀리온은 유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하, 전혀 빈틈이 없는데 어떻게 가? 와, 이런 느낌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앞에 두고 검을 휘둘렀을 때밖에 느껴본 적이 없는데.”

제대로 검을 부딪쳐 본 것도 아니다.

그저 마주 서고 내가 대련 시작을 외쳤을 뿐인데도 버밀리온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길버트나 프레시아나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어 보이는데, 버밀리온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때 프레시아의 인상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그 순간 갑자기 버밀리온이 벼락처럼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캉-!

버밀리온은 프레시아의 왼쪽 옆구리를 노렸고 프레시아는 예상했다는 듯이 검을 비스듬히 대어 막았다.

“앞선 대련을 보고 생각했는데 역시 감이 좋군요.”

프레시아의 여유로운 평가와 상반되게 버밀리온은 여유를 잃고 검을 몰아쳤다.

그런 버밀리온의 검격에 프레시아는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모두 맞받아쳤다.

두 사람의 대련을 보는 길버트는 살짝 거친 숨을 고르며 감탄했다.

“과연 프레시아 경은 대단합니다.”

“어느 부분이 대단한데? 나도 좀 알자.”

내 투덜거림에 길버트는 두 사람의 대련을 중개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프레시아 경이 기세에 일부러 빈틈을 만들어 공격을 유도했습니다. 당연히 유도한 만큼 노릴 곳을 알고 있으니 수월하게 막았고요.”

“오, 그래서?”

“그 다음에는 버밀리온 씨에겐 선택지가 없어졌습니다. 이미 기세 싸움에서 밀린 상황이니 물러나거나 수세를 취하면 바로 쫓아와 끝장을 낼 테니 공격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여기서 버밀리온 씨는….”

길버트의 설명을 들어보니 프레시아가 대단하게 느껴지긴 했다.

동시에 길버트도 많이 성장하긴 했구나 싶었다.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대련이라 그런지 프레시아와 버밀리온의 공방은 꽤나 길게 이어졌다.

프레시아가 봐주고 있는 건가?

아니, 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점차 버밀리온의 움직임이 달라지고 있었다.

저 움직임은 프레시아의 움직임을 카피한 건가?

“마력은 사용하지 않는 겁니까?”

프레시아의 물음에 버밀리온은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가 마력을 사용하면 죽는 병이 있어서 말이야. 아버지가 슬퍼한다고?”

“그렇습니까? 그거 아쉽군요.”

프레시아는 살짝 검끝을 흔들어 버밀리온의 헛손질을 유도해 승부를 끝냈다.

날이 서 있지 않은 철검이 목에 대어지자 버밀리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양손을 들었다.

“졌다! 에고고! 전력을 다했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못한 건 아버지 이후로 처음이야.”

항복한 그는 지쳤는지 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나는 지친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는 프레시아에게 물었다.

“어때?”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누워서 헐떡이는 버밀리온을 흘끔 보고는 내 귀에 속삭였다.

“…저건 단순히 천재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해의 범주를 초월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역시 미래의 천하십검에 이를 재목이란 거군.

물론 세세히 따지자면 프레시아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십대 중반에 초인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할 평가는 아니었다.

그녀 또한 이해의 범주를 넘은 천재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프레시아도 무의식중에 그 사실을 아는지 호승심과 동질감을 동시에 느끼는 듯했다.

숨을 어느 정도 고른 버밀리온은 몸을 일으키며 창밖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말이야, 혹시 괜찮으면 나랑 같이 뒷골목에서 불한당 사냥하지 않을래?”

몰아치던 폭풍우는 한풀 기세가 꺾인 듯 빗줄기가 약해져 있었고, 버밀리온의 제안은 너무나 재미있어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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