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비 내리는 뒷골목 (7)
늦은 새벽 어둑한 거리.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에 별빛 한 줌 닿지 않는 길을 한 사내가 거닐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에도 검은 외투와 턱 끝까지 기른 옅은 갈색 머리카락은 전혀 젖은 기색이 없었다.
“음음~ 음음음음~”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사내는 걸음을 멈추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것 참, 너무하시네. 우리는 함께하는 사이 아닙니까? 치워주시죠.”
검은 외투의 사내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그의 배후를 잡고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프로스트가 싸늘하게 경고했다.
“더 이상 접근하면 팔 하나는 잘릴 거다. 어기스트림.”
검은 외투의 사내, 어기스트림은 코끝까지 내려온 동그란 안경을 다시 밀어 올리며 장난스레 웃었다.
“핫핫핫! 그리 협박하시면 너무 무섭지 않습니까. 제가 그래도 아드님을 치료시켜 줄 의사 선생님인데 말이죠.”
“닥쳐라. 내가 사전에 말도 없이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그저 시술 전에 상태를 확인해도….”
“수작 부리지 마라, 6사도. 내가 네놈에 대해서 모를 것 같나?”
프로스트는 살기를 내뿜으며 말을 잘랐다.
어기스트림은 오만의 마왕을 숭배하는 새벽별 교단의 최고 간부로 꼽히는 사도 중 하나였다.
“그동안 내가 베어버린 악마 숭배자가 몇이나 될 것 같지?”
“…알겠습니다. 더 이상 당신의 집에 다가가는 건 그만두죠. 아쉽지만 아드님을 뵙는 것도 시술 당일로 미뤄두기로 하고요.”
어기스트림은 꽤나 큰 목조 주택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교단 내부에 사정이 생겨서 일정을 크게 당겨야 합니다.”
어기스트림의 말에 프로스트는 담담하게 물었다.
“무슨 사정이지?”
“으음~ 원래는 내부 일을 외부에 이야기하는 건 징계감이지만 특별히 말씀드리죠. 태양 교단이 저희 교단의 대주교를 기습해 확보했답니다.”
“대주교?”
“예, 재수 없게도 그 대주교가 이 나라에 심어둔 조직의 운영자라서 말이죠.”
악마 숭배 교단은 철저하게 점조직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점조직의 장점은 말단이 아무리 잡혀도 꼬리 자르기 쉽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점조직이라도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선 전체적인 움직임을 조율하는 운영자가 필요한 법이었다.
필연적으로 운영자는 조직의 모든 사항을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재수도 없었죠. 하필이면 바함하크 백작이 그 지독한 아세트 추기경에게 잡혀버리는 바람에 빼내 오지도 못했습니다.”
아세트 추기경의 명성은 프로스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악마를 극도로 혐오하는 독실한 종교인으로 유명한 데다 이단 심문관 출신이라 개인의 무력 또한 출중했다.
지난 행적을 철저하게 비밀로 부치는 이단 심문관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의 업적은 살아 있는 최고의 성인(聖人)이라 불리는 교도칠성(敎導七聖) 중 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 여겨질 정도였다.
아세트 추기경은 새벽별 교단의 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거 재난이었겠군.”
프로스트는 피식 웃었다.
어기스트림은 그의 조소를 아는지 모르는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아니랍니까. 비리 장부로 위장한 관리 장부도 빼앗겼는지, 덕분에 실시간으로 이 나라의 비밀 지부들이 박살 나고 있답니다. 그래서 아세트 추기경의 마수가 이곳까지 뻗치기 전에 최대한 서두를 생각입니다.”
어기스트림의 말에 프로스트는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 영지를 장악하고 있는 암흑가의 보스는 새벽별 교단의 힘으로 그 자리에 오른 바지 사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정확히는 새벽별 교단의 입장에서는 하찮은 뒷골목의 이득 따위는 알바 아니라서 신경 쓰지 않으니 서로 이용하는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알겠다. 때가 되면 연락해라.”
“핫핫핫, 걱정 마시죠. 일주일은 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그 말과 동시에 6사도 어기스트림은 연기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프로스트는 혀를 차며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의 눈은 혐오와 분노, 그리고 서글픔으로 가라앉았다.
* * *
아침을 알리는 나비의 발바닥이 내 뺨을 누르자 나는 부스스한 눈을 뜨고 몸을 돌려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누워서 본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한 회백색의 구름뿐이었다.
나는 신이 나서 내 뺨을 꾹꾹 누르는 나비를 얼굴에서 떼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나비와 누니, 람이 신나고 비암이 축 처진 걸 보면 오늘은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칠 모양이다.
정령들이 있으니 오늘의 일기예보를 챙겨보지 않아도 되니 편하네.
“일어나셨습니까.”
내 옆자리의 야드는 벌써 일어나서 단검과 와이어 등 자신의 무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어제 있던 일을 생각하면 당연한 대비였다.
어제 저녁 늦게 돌아온 프레시아와 야드는 자신들이 본 것들을 설명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 도시에서 사악한 흑마법 의식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마약을 한 흔적은 없는데, 안색은 안 좋고, 표정만 좋다.
그들도 알게 모르게 생명력을 갈취당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흑마법에는 정신 간섭 계열 마법이 존재하는데, 티가 나지 않을 정도면 꽤나 고위 흑마법사가 이 도시에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정신 간섭 계열이라면 색욕 계파의 대주교급이 움직인 건가?
아니, 어쩌면 사도급이 움직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3사도나 6사도인가.
거의 모든 흑마법에 능통한 1사도도 가능성은 있지만, 고작 도시 하나를 잡아먹는 의식에 그런 거물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을 거다.
교주인 1사도라면 적어도 대영지나 작은 왕국을 집어삼키는 의식 정도는 되어야 모습을 드러내겠지.
“하암~! 좋은 아침. 아침밥이나 먹고 움직이자고.”
나는 하품을 하며 까치집이 진 머리를 쓸어 만졌다.
여관 1층의 식당으로 가니 다들 날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도 되는데.”
내 말에 제이드가 피식 웃었다.
“아직 조식 시간이 아니라서 주문만 해둔 상태입니다.”
“아, 그래?”
나는 내 자리에 앉으며 주변 소리를 차단했다.
“오늘은 다르게 짝을 맞춰 움직이자. 야드랑 제이드가 암흑가 위주로 탐색해.”
“그냥 인신매매인지, 흑마법 의식의 흔적이 있는지 확인해 보란 말씀이시군요.”
제이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드도 뛰어난 마법사였지만, 아무래도 이것저것 잡다하게 익혀서인지 하나에 전문적이진 못했다.
제이드가 있으니 혹시라도 흑마법사와 마주치더라도 괜찮겠지.
“도시를 돌며 내 보험을 설치하고 마력을 탐지하는 건 아바스엘과 실루아가 해줘.”
“와! 재미있겠다!”
실루아는 어제 심심했는지 일을 시키니 좋아했다.
아바스엘은 미소 지으면서도 실루아에게 위험한 마법을 다룰 때는 흥분해선 안 된다고 주의를 줬다.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선생과 학생을 보는 느낌이었다.
“길버트와 프레시아는 나랑 같이 새로 사귄 친구네에 놀러가자고.”
버밀리온은 물론 프로스트라면 프레시아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어줄 거다.
너무 자극해서 싸우지만 않았으면 좋겠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간단한 아침상이 차려졌다.
“사 먹는 것도 좋지만 유안이 만든 요리가 살짝 그립군요.”
저렴한 여관이라 그런지 음식이 그리 맛있지 않았기에 심정은 이해했다.
일행 중 나보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요리를 전담하게 된 구석이 있었다.
식당이 있는데도 요리를 하는 건 사양이다.
오는 동안 프레시아의 훈련으로 지쳐서 야드에게 요리를 시켜봤는데, 만능으로 보이던 그도 요리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길버트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었다.
소설 초중반에서는 야드가 식사를 챙겼었는데 놀랍다.
그런 걸 먹어왔던 건가.
제이드의 은근한 시선에 나는 싱긋 웃으며 묽은 스프에 딱딱한 빵을 적셨다.
“귀찮아.”
난 요리사가 아니다.
내 단호한 거절에 일행들은 살짝 시무룩해졌다.
* * *
아침에 정령들이 신이 났던 대로 식사를 마치고 보니 천둥 번개가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쳤다.
이 정도면 태풍이 온 것 같은데?
도저히 밖에서 놀 수 없는 날씨였다.
“와~! 폭풍이다!”
실루아는 신이 나서 여관 밖으로 뛰쳐나갔고, 아바스엘은 당황해서 마법으로 실루아를 보호하며 뒤따랐다.
“실루아! 진정해!”
역시 어린애의 텐션은 이해할 수 없다.
이 폭풍우가 뭐가 좋은 걸까?
물론 실루아가 나고 자란 인형의 숲은 게오르의 절대적인 마법으로 통제되는 영역이라 이런 폭풍우는 처음일 거다.
비가 내려봤자 숲에 일일이 물을 주기 귀찮으니까 잠깐 부슬비가 내리게 하는 정도였겠지.
현자란 일대의 자연 현상을 자유자제로 통제하는 괴물이었다.
“도련님, 정말 나가실 겁니까?”
최근 엄하게 훈련을 시키던 프레시아도 날 걱정하며 물었다.
그런 걱정을 내 훈련에 조금이라도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약속을 했으니 가보긴 해야지.”
나는 정령들을 모두 모아 폭풍우가 내게 닿지 않게 만들었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게 이런 날씨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사실 거리에 사람들이 있어도 별 문제는 없었다.
쏟아지듯 내리는 비 덕분에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비바람이 피해가도 눈치채기 힘들었다.
버밀리온의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울리자 안에서 버밀리온과 프로스트가 나왔다.
“어디 가십니까?”
프로스트는 우의를 입은 채 삽과 밧줄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내 물음에 버밀리온이 대신 대답했다.
“폭풍우가 심해서 도시 남쪽에 있는 강이 범람할 것 같다고 도우러 가시는 거야. 거기가 과수원에 물을 대는 수원인데, 범람하면 한 해 농사를 망치거든.”
과연, 삽으로는 토대를 쌓고 밧줄로 고정하려는 건가?
“버밀리온, 화로에 장작을 넣고 손님이 왔으니 몸을 닦을 수건을 가져오거라. 여름이라도 이런 날씨면 젖은 채로 있으면 감기 걸린다.”
“아! 그러네요.”
딱히 젖진 않았지만 버밀리온은 호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프로스트는 안으로 들어오라며 몸을 비켜주며 말했다.
“…마법을 사용할 줄 아나?”
프로스트는 노련한 자유 기사답게 우리가 거의 젖지 않은 걸 알아봤다.
그런데도 버밀리온을 안에 들여보낸 건 따로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교양 수준으로는 압니다.”
“그런가.”
내 대답에 프로스트의 시선은 길버트와 프레시아에게로 향했다.
시선이 프레시아에게 닿자 눈에 이체가 돌았다.
초인답게 프레시아가 보통 단련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딱히 프레시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들이 어제부터 새롭게 사귄 친구들이 마음에 들었는지 들떠 있더구나. 재미있게 놀고 가되 무리시키진 말거라.”
프로스트는 어제 아들인 버밀리온이 신나게 대련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걸 아들에게는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무리가 가지 않게 적당히 하겠습니다.”
버밀리온의 안색을 보면 누구라도 병색이 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대답에 그는 피곤한 듯 미간을 좁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마.”
그렇게 아들을 부탁한 프로스트는 삽과 포대 자루를 잔뜩 끌어안은 장정 다섯과 합류해 남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프레시아에게 물었다.
“어때?”
내 질문에 프레시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대단히 단련된 분입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상당한 실력자로 보입니다.”
역시 기세를 끌어올리지 않으면 초인이란 것까지는 알아보기 힘든가.
그렇다면 프로스트도 프레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안에서 수건을 한아름 들고 온 버밀리온이 왔다.
“어? 아버지는?”
“남쪽으로 가셨어.”
“그래? 어서 들어와.”
우리는 버밀리온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