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비 내리는 뒷골목 (6)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우리는 어느 가게의 처마 밑으로 피했다.
물의 정령인 람의 힘을 조금만 사용하면 비를 피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얌전히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후우, 지랄 맞은 날씨군.”
홀딱 젖어버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물기를 짜냈다.
내 한숨에 버밀리온은 유쾌하게 웃었다.
“아하하하! 이 시기엔 여기 날씨가 그렇긴 해. 그래도 이 나라는 이 근방만 그렇지 저, 아래쪽 공국은 이 시기마다 나라 전체가 더 심할걸?”
왕국 기준 서남부 쪽에 있는 공국은 제국의 속국령으로 대공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딱 장마 전선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공국은 도시 하나만큼 왕국과 국경이 닿아 있어 제국과 교류의 통로였다.
“그래도 겨울에는 따듯할 거 아니야.”
“그건 그렇겠지. 거기서 겨울을 맞아본 적이 없어서 확신은 못 하지만.”
버밀리온은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 본 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던 중, 우리가 떠드는 소리를 들은 가게 주인이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더니 버밀리온을 알아봤다.
“아니, 이게 누구야. 버밀리온 아니냐.”
가게 주인이 아는 척을 하자 버밀리온도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이 젊은이들은 친구냐?”
“네. 오늘 사귀었어요. 장사는 잘되세요?”
“아하하하, 이 시기에는 워낙 날씨가 변덕스러워서 그런지 파리만 날리지. 뭐, 그래도 네 아버지 덕분에 입에 풀칠은 한다.”
가게 주인은 넉살스럽게 대답하고는 다시 창문 안으로 들어가더니 우산 두 개와 엿 네 개를 가져왔다.
“우산이 이거밖에 없네. 대신이라기에는 뭐하지만 이거라도 먹거라.”
“아이고, 이러시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버밀리온이 난감한 듯 사양하자 가게 주인은 웃으며 말했다.
“아니다. 네 아버지 덕분에 서쪽 패거리들이 함부로 설치지 못하지 않느냐. 이런 거라도 챙겨주지 않으면 면목이 없어.”
“아버지도 그런 걸 바라고 하신 일은 아니실 텐데…. 그래도 감사히 먹겠습니다.”
“오냐. 네 아버지께도 언제 한번 들러달라고 말씀드리렴.”
가게 주인의 호의에 버밀리온은 인사를 하고 처마 밑을 떠났다.
실루아의 키가 작기 때문에 길버트가 업고 우산을 썼다.
내가 실루아를 업으려 했지만, 내 체력 문제와 길버트와 버밀리온의 건장한 어깨로 인해 내가 버밀리온과 쓸 수밖에 없었다.
어린애라도 꽤나 무겁단 말이지.
“네 춘부장(椿府丈)께선 도시에서 존경받으시나 봐?”
내 물음에 버밀리온은 쑥스러운 듯 웃었지만 그 안에 자부심을 숨길 수는 없었다.
“아버지께서 이 도시로 오면서 이 도시의 불한당들을 제압하셨거든. 뭐, 이제 와선 그 불한당들과도 나름 잘 지내시는 것 같지만, 아버지 덕분에 도시 상인들에게는 자릿세를 받지 않게 됐다고 해.”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동경과 선망을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
나는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척 감탄사를 내뱉었다.
버밀리온의 아버지인 프로스트는 자유와 정의를 숭상하는 집단인 자유 기사 연맹의 핵심 간부 중 하나였다.
기사 중의 기사라 칭송받던 이인 만큼 그 실력은 당당히 초인에 이르렀다.
소설 속에서 프로스트가 죽기 직전, 천하십검과 비등하게 겨뤘던 것을 생각하면 만만치 않은 인물임에 분명했다.
내 시선에 버밀리온은 싱긋 웃어 보였다.
“왜?”
버밀리온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별것 아니야.”
프로스트가 마지막으로 싸운, 그리고 그런 프로스트를 죽인 천하십검이 바로 검악(劍惡) 버밀리온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의 미소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소설 속의 버밀리온은 프로스트를 싫어하는 것을 넘어 증오했다.
어째서인지에 대한 서술은 없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서 빠지지 않는 키워드가 있다면 바로 이 도시, 브류타였다.
이 도시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프로스트는 아들의 검이 심장에 박히는 순간, 후회하면서도 건강해져서 다행이라며 웃으며 죽었다.
잡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 그때, 버밀리온이 매서운 빗줄기 사이에서 나타난 장년의 사내를 보며 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
거센 소나기 속에서도 우산 하나 없이 걷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는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이런 궂은 날씨에 또 어딜 다녀오는 거냐?”
“아하하, 그냥 산책 좀 다녀왔어요.”
“녀석, 비 맞으면 몸에 좋지 않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의 시선이 나와 실루아를 업고 있는 길버트에게 향했다.
“아, 오늘 산책하다가 사귄 친구들이에요.”
버밀리온의 소개에 나는 미소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유안이라고 합니다.”
프로스트는 친구라는 말에 살짝 표정을 굳혔다.
“…못 보던 얼굴들인데, 새로 정착하려는 이주민인가?”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브류타는 며칠 들렀다 가는 곳입니다. 친척을 만나러 가는 중이라서요.”
내 대답에 프로스트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미세하게 안도감이 느껴졌다.
어째서 안도하는 거지?
“그래? 짧은 시간이나마 버밀리온과는 친하게들 지내줬으면 좋겠구나.”
“하하, 여행의 묘미가 또 현지에서 만드는 친구들 아니겠습니까. 이러게 만난 친구가 평생 기억되는 친구가 되기도 하는 법이죠.”
“‘그도 그렇지. 너무 늦게까지 놀진 말고 일찍 들어오거라. 젖은 채로 늦게까지 돌아다니면 안 좋아.”
프로스트는 알겠다는 아들의 대답을 듣고는 주머니에서 용돈을 꺼내 아들에게 쥐여줬다.
“이걸로 맛있는 거라도 사 먹거라.”
“감사합니다!”
프로스트가 떠나자 버밀리온은 활짝 웃으며 받은 동화의 수를 세었다.
“헤헤헤, 이 정도면 꽤 비싼 맛집도 갈 수 있겠다. 빨리 가자!”
나는 버밀리온의 안내를 받으며 빗줄기가 내리는 거리를 거닐었다.
* * *
군것질거리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아직도 그치지 않는 빗줄기에 조금 이르지만 헤어지기로 했다.
버밀리온이 아직 재미있는 곳을 안내해 주지 못했다며 아쉬워하길래 내일 만나기로 약속했다.
버밀리온과 헤어지고 여관에 돌아온 나는 빗소리를 벗 삼아 책을 읽었다.
어스름 상회를 통해 입수한 마탑의 정령술 연구서였는데, 리즈벳의 정령술과는 굉장히 괴리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리즈벳의 정령술은 정령술사가 되는 것을 기초로 세워진 이론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의 정령술은 정령과 계약하지 못한 상태로 그 힘을 다루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 때문에 에너지 효율이 극명하게 갈렸다. 그래도 마법사들이 정령을 다루는 방식은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후우, 무슨 비가 이렇게 내리는지.”
제이드와 아바스엘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눈에 띄지 말라는 내 지시 때문에 마법으로 비를 막지 않은 듯했다.
“고생했어. 뭐 좀 건진 게 있어?”
나는 물의 정령인 람의 힘으로 두 사람의 물기를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간식으로 사온 닭꼬치를 불의 정령인 비암의 힘으로 데워 건넸다.
여름이라 비에 젖어도 딱히 춥지는 않아 다행이다.
“오! 잘 먹겠습니다.”
제이드는 자신의 아공간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더니 ‘퐁-!’ 하고 코르크 마개를 열어 술잔에 따랐다.
“유안도 한 잔 드립니까?”
이 녀석, 완전히 술에 맛 들렸군.
“당연하지.”
제이드는 그럴 줄 알았다며 내게도 한 잔 가득 따라 줬다.
딱히 디캔터로 디캔팅 한 것도 아닌데 향기가 풍부한 걸 보면 비싼 술인 듯했다.
음, 맛있네. 역시 비싼 술이잖아.
내가 마법서나 마법 재료 사라고 준 용돈을 술 사는 데 모두 때려 박은 건 아니겠지?
제이드가 아바스엘에게도 술병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술을 즐기지 않는 아바스엘은 손바닥을 보이며 살짝 고개를 젓고 내게 보고했다.
“딱히 수확이랄 건 없었습니다.”
아바스엘의 말에 나는 턱을 쓸어 만지며 물었다.
“이상한 느낌이나 기분 탓이라도 위화감은 없었어?”
“음, 기분 탓 정도라면 묘한 위화감이 있긴 했습니다.”
제이드의 대답에 아바스엘이 첨언했다.
“우선 도시 외곽의 과수원을 둘러 본 다음에 조금씩 도시 안쪽으로 들어오듯 탐색해 봤습니다. 그런데 도시 안으로 움직일수록 무언가가 무언가 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오! 그거 절묘한 표현입니다. 무언가가 무언가 한 느낌. 감각을 한껏 예민하게 곤두세워야 느껴지는 무언가.”
“그렇지? 기분 탓이라고 한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데, 미묘하게 거슬린 것 같은 무언가 한 느낌!”
두 사람은 서로 고개를 주억이며 공감했다. 그게 뭔 말이야?
“그러니까 도시 외곽보다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기분 탓이든, 진짜 뭐가 있든, 위화감이 느껴진다는 말이지?”
“예, 정확하진 않지만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면 둘 중 하나였다.
두 대마법사가 제대로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거나, 아니면 이 도시에서 벌어질 뭔지 모를 사건이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든가.
“한 사람만이라면 모를까 둘 다 위화감을 느꼈다면 정말 뭔가가 있는 모양인데….”
후자라면 모를까 전자라면 최악의 경우, 초인이나 대마법사급 괴물들과 싸우게 될지도 몰랐다.
보험, 보험이 필요하다.
나는 고민하다가 종이에 지시 사항을 적어 건넸다.
“내일도 오늘처럼 마력을 탐지하면서 이것도 같이 준비해 줘.”
종이를 받아든 두 사람은 천천히 들여다보더니 기겁했다.
“이, 이걸 정말로 합니까?!”
“이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주군?”
두 사람의 반응에 나는 침대에 발라당 누워버렸다.
“그냥 보험이야, 보험. 어지간한 일이 생기지 않으면 사용할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 그래도 이거 잘못하면 도시에 피해가 클 텐데요.”
제이드의 걱정에 나는 가볍게 웃었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보다는 도시가 소멸하는 게 낫지. 안 그래?”
내 장난스러운 물음에 제이드는 난감한 듯 뺨을 긁적였다.
“그 둘을 비교하자면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바스엘은 진지하게 내 지시 사항을 보다 물었다.
“주군이 상정하신 ‘어지간한 일’은 어떤 일입니까?”
그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씨익 웃었다.
“글쎄, 당장 사람들이 떼로 죽어 나갈 상황이거나… 이 도시를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상황?”
끝까지 못 찾으면 배후의 놈들을 도시째로 없애버릴 거다.
사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다 태워버리는 일이었지만, 그 빈대가 보통 빈대가 아니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내가 예상하는 놈들이 브류타에 암약하고 있다면 도시 하나쯤은 같이 길동무로 보내버려도 큰 손해는 아니었다.
뭐가 되었든지 사람들만 멀쩡히 살아 있다면 도시는 재건할 수 있다.
내 대답에 제이드와 아바스엘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못 찾으면 도시가 사라지는 겁니까.”
“위화감의 근원을 반드시 찾아야겠군요.”
깊은 탄식을 내뱉은 아바스엘은 다시 한번 날 바라봤다.
“그나저나 이 지시사항대로라면, ‘그놈들’이 이 도시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바스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드는 아바스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놈들이라니, 그놈들이 누구입니까?”
제이드의 물음에 아바스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진지한 눈으로 대답했다.
“악마 교단. 악마들을 찬양하고 숭배하는 세상의 기생충들.”
악마 교단 중에서도 정확히는 새벽별 교단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