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146화 (146/214)

제146화. 비 내리는 뒷골목 (5)

야드가 비밀 통로를 쉽게 발견하자 프레시아는 놀라며 물었다.

“어떻게 발견한 건가요?”

“서커스단에서 마술을 하려면 공간 소품을 활용할 때가 많습니다. 소품을 제작할 때 이런 비밀 공간을 관객들에게 들키지 않게 노력하는데, 그러다 보니 역으로 어떤 곳에 공간을 만들지 보이네요.”

야드는 별것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문제는 비밀 공간 바로 옆에 감시자가 있다는 점이었다.

“혹시 우리 빛의 정령님께서 가려주실 수 있을까요?”

야드의 물음에도 은하는 허공을 헤엄칠 뿐이었다.

계약자가 아닌 야드의 지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야드는 자세하게 부탁했다.

“은하. 저 얼굴에 수염 난 인간 남성이 봤을 때 이 건물 내부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으면 허공에 원을 그리고, 할 수 없으면 허공에 세모를 그려주세요.”

야드의 지시에 은하는 허공에 빛으로 만든 원을 그렸다.

“그럼 저 얼굴에 수염 난 인간 남성이 봤을 때 이 건물 내부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해주세요. 앞선 부탁을 수행해 줬으면 다시 한번 원을 그려주세요.”

은하가 다시 원을 그리자 야드는 안심하고 비밀 통로의 문을 열었다.

대놓고 문이 열렸음에도 따분한 표정의 털보 사내는 하품만 할 뿐이었다.

“이것 참, 유안 군은 정령을 잘도 다루는군요.”

야드는 정령을 다루는 게 어렵다며 혀를 내둘렀지만, 만약 정령학을 배운 마법사가 봤다면 굉장히 놀랐을 일이었다.

보통의 정령은 사람의 언어적 의사소통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벽 너머로 어두운 비밀 계단이 나타나자 야드는 문을 닫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은하의 몸에서 나오는 빛 덕분에 앞을 볼 수 있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지하에는 넓은 공간이 나왔다.

한낱 허름한 술집의 지하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넓은 지하 공간에 두 사람은 놀랐다.

지하 공간에는 쇠창살 우리가 줄지어 있었는데, 그 안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축 늘어져 있었다.

“인신매매?”

프레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야드가 손을 들어 말렸다.

“여기서 소동을 일으켜선 안 됩니다. 지금 검을 뽑아봤자 배후는 꼬리를 자르고 도망칠 겁니다.”

게다가 철창에 갇혀 있는 게 여기 있는 이들이 전부라 확신할 수도 없었다.

다른 곳에도 이러한 감옥이 더 있을지도 몰랐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잠시 흥분한 모양입니다.”

프레시아가 빠르게 진정하자 야드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광경을 보았을 때 분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인간성을 의심해 봐야 했다.

야드 또한 프레시아처럼 눈앞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전혀 관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매매란 사고파는 행위다.

역겨운 일이지만 당연히 ‘상품’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관리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철창 안의 사람들의 상태는 굉장히 좋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애초에 이들이 정말로 인신매매를 당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노예로 팔려 가는 것보다 심한 꼴을 당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참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내부를 훑어보고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죠. 유안 군이 뒷골목 위주로 도시 내부 사정을 조사해 보라 했으니 분명 이것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야드의 말에 프레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안이라면 분명 도시 상황을 알고 대책을 구상하고 있을 터였다.

지금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유안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프레시아는 그렇게 확신했다.

* * *

나는 마치 청춘 스포츠극의 주인공처럼 활기차게 웃으며 땀 흘리는 버밀리온을 보며 생각했다.

음, 모르겠다. 모르겠어.

지금의 버밀리온을 보면 순수하게 검을 좋아하는 스포츠 소년으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도저히 소설 속의 신경질적이고 감정 기복이 심한 악당이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소설의 내용으로 유추하자면 분명 버밀리온의 인생의 분기점은 이 도시, 브류타에서 발생할 거다.

그런데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야 저 쾌활해 보이는 녀석이 그런 미치광이가 되는 거지?

전혀 모르겠다.

앞으로 벌어질 사건의 배후는 얼추 알고 있긴 하지만 어떤 개판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으니 머리가 아파왔다.

나는 결국 소설 속에서 나온 내용만 알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몇 번을 고민해 봐도 그 사실만 반복해서 깨달을 뿐이었다.

“그만~!”

나는 손뼉을 치며 두 사람의 여섯 번째 대련을 멈추게 했다.

내 선언에 길버트와 버밀리온은 아쉬워하면서도 검을 내리고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허억, 허억, 진짜, 검사는 다르네. 후우~!”

거친 숨을 몰아쉬는 버밀리온과 달리 길버트는 살짝 지친 듯 깊게 호흡하며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버밀리온 씨의 검술도 대단했습니다.”

상당한 격전의 연속이었음에도 길버트는 안정적으로 보이는 게 프레시아의 훈련이 빛을 발하는 듯했다.

하기야, 그런 미친 훈련을 거의 매일같이 받는데 두 사람의 체력이 같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나야 이 도시까지 오면서 마차 안에서만 훈련을 했지만, 길버트는 프레시아와 함께 마차 옆을 전속력으로 달려서 따라오는 훈련을 추가로 받았다.

마차와 나란히 달리는 두 사람을 보며 기사란 존재는 괴물이구나 싶었다.

“아이고, 힘들다!”

버밀리온은 땅에 주저앉아 소매로 땀을 닦았다.

힘들어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꽤나 즐거워 보였다.

나는 살짝 고갯짓하며  길버트에게 물었다.

“어때?”

내 물음에 길버트의 표정에 순수한 감탄이 서려 있었다.

“대단한 재능입니다. 저도 프레시아 경에게 나쁘지 않은 재능이 있다 들었지만, 저분을 보니 자신감이 사라질 것 같습니다.”

길버트와 버밀리온의 첫 대련은 싱겁게 끝났었다.

혼자서 검을 휘두른 경험밖에 없는 버밀리온이 쉽게 빈틈을 드러내는 바람에 길버트가 그 틈을 찔러 이겼다.

그러나 두 번째 대련부터는 찔렸던 빈틈이 사라지더니, 세 번째 대련부터는 그럭저럭 대결이 이루어졌다.

“그 정도란 말이지?”

“예, 도련님께서 말리지 않으셨다면 열 번, 아니 아홉 번째부터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길버트는 아주 어려서부터 검을 배워왔다.

그도 그럴 게, 검을 가르쳐준 할아버지는 왕실 기사단 중에서도 손꼽히는 근위 기사단인 황금 사자 기사단 출신이었다.

그러니 체계적이고 깊게 가르쳐줄 수밖에 없었다.

이른 나이에 조실부모하고 마지막 남은 보호자인 할아버지까지 잃었지만, 근간이 되는 기초는 모두 익힌 상태였다.

그랬기에 내 여정을 따라오는 길버트의 성장이 폭발적일 수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실전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기초가 다져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길버트가 아무리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라.

길버트의 평가에 버밀리온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열 번은 무슨, 과찬이야. 스무 번, 아니 서른 번을 싸워도 이길 것 같지 않은데? 기껏해야 싸울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정도겠지.”

그는 부정했지만 그의 미래를 생각하면 의외로 길버트의 평가가 정확할지도 몰랐다.

아쉽군. 동료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그를 동료로 삼기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았다.

당장 그가 연기를 하고 있는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보증도 없지 않은가.

버밀리온은 가뭄에 봄비를 맞은 새싹처럼 더 싸워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의 떨리는 손이 흥분 때문이 아니라는 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도 프레시아의 훈련을 받다보면 자주 저렇게 되거든.

“대련은 내일 계속해. 길버트 말고도 내 호위가 하나 더 있으니까 내일 소개해 줄게.”

내 말에 버밀리온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정말?! 다른 호위는 어때? 강해?”

버밀리온의 물음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며 대답했다.

“강하지. 길버트보다 더 강할걸?”

“하하, 프레시아 경이라면 제가 부대 단위로 있어도 털끝 하나 못 건들 겁니다.”

길버트의 첨언에 버밀리온은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자, 슬슬 숨도 고른 것 같으니까 가자. 맛집을 잘 알고 있다고 했잖아.”

내 말에 버밀리온은 무릎을 짚고 일어나며 쾌활하게 웃었다.

“물론이지! 가자! 내가 한턱 살게!”

“내일도 대련시켜 달라는 뇌물이야?”

“하하하하! 들켰네. 그래도 너무 비싼 건 못 사줘. 내 용돈에도 한계가 있거든.”

우리는 버밀리온의 뒤를 따라 시내로 향했다.

* * *

장년의 사내, 프로스트 웨이븐은 서부 빈민 거리를 지나 서남부 암흑가로 향했다.

“음?”

암흑가와 걸쳐 있는 빈민 거리의 끝자락, 작고 허름한 술집 앞을 지나던 그는 극히 미세한 위화감에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매인 검에 손이 향했지만 어디서 위화감을 느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어째서 위화감을 느꼈는가.

오래된 기억을 반추해 봤지만 떠오르는 기억은 허무맹랑했다.

과거 정령왕의 근거지인 마경 대수림 인근에서 마주한 정령백(精靈伯)의 정령 군세였다.

그 당시 죽을 뻔한 기억이 떠오르자 프로스트는 낮게 혀를 차며 미간을 좁혔다.

“쯧, 오랜만에 단장을 만나서인가 쓸데없이 옛 생각이 자주 떠오르는군.”

그는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높은 위계의 마법까지 익힌 집행 기사단의 단장인 마검사 아이오마이어 덕분에 마법에 대해 나름 자세히 알았다.

정령과 계약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의외로 정령은 자연에서 자주 목격되곤 했다.

굳이 소환하지 않아도 자연적인 마력의 흐름에 따라 정령계와의 통로가 연결되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프로스트는 자신이 느낀 위화감이 그저 자연 상태의 정령이 장난치다 간 흔적이겠거니 넘겼다.

음울한 거리로 발을 들일 무렵, 하늘은 다시 어둑해졌고 지겨운 빗방울을 떨어트렸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줄기의 기세가 여간 사나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더 빨라지지도, 늦어지지도 않았다.

끼익-

그는 비루한 거리의 허름한 건물들 사이 유독 화려하고 커다란 주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앉아서 술을 마시던 사내들이 일순 침묵하며 시선을 모았다.

험상궂은 사내들의 시선에도 그는 대수롭지 않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앙을 가로질러 가장 큰 테이블로 향했다.

“불렀나.”

거만하게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근육질의 사내는 피식 웃었다.

“해줘야 할 일이 생겼다, 동업자.”

근육질 사내의 말에 프로스트는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입에 담지 않았다.

사내의 말이 크게 틀리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이 도시의 암흑가를 넘어 영지의 뒷골목을 지배하는 우두머리다.

그리고 그의 경쟁자들을 죽여 일대 지역의 패자로 만들어준 이가 프로스트였다.

자유와 정의를 숭상하는 자유기사가 많이도 영락했구나.

조소가 절로 나왔다.

“무슨 일이지?”

프로스트의 물음에 암흑가의 우두머리는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 의사 선생의 의뢰다. 최근에 일이 생겼으니 일정을 당긴다고 하더군.”

“얼마나?”

“글쎄, 갑자기 정해진 일이라며 조금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더군. 일주일은 안 걸릴 거라 했다.”

사내의 말에 프로스트는 음울한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준비하지.”

다소 무례한 태도였지만, 술집에 앉아 있는 그 누구도 뭐라 하지 못했다.

중앙을 가로질러 술집을 나서는 영락한 자유 기사는 무자비한 괴물이었기에.

뒷골목에 내려앉는 빗줄기가 서글프고도 사나운 울음소리같이 추락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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