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비 내리는 뒷골목 (3)
어제는 비가 내렸는데, 오늘은 구름 사이로 햇살이 새어나왔다.
언제 다시 비가 내릴지 모르지만, 따사로운 햇빛에 눈이 부셔 소년은 잠에서 깨어났다.
다시 자고 싶다는 욕구와 이제는 일어나야 한다는 이성이 싸운 끝에 소년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어났느냐.”
창밖에서 빨래를 널고 있던 장년의 사내가 웃으며 인사하자 소년은 헤실거리며 까치집이 진 머리를 문질렀다.
“하하,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버지.”
“그래, 이 아비의 아침은 조금 이르지 않느냐. 잘 잤느냐?”
아버지의 아침 인사에 소년은 눈을 비벼 눈곱을 떼며 대답했다.
“저야 언제나 잘 자죠.”
“부엌에 아침을 차려놨다. 데우기만 하면 되니 같이 먹자꾸나.”
빨래를 대충 널어놓은 소년의 아버지는 담 넘듯이 가볍게 창문을 넘었다.
구름이 가득했지만 벌써 해가 중천에 떴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기에 소년은 멋쩍게 웃었다.
“먼저 식사하셔도 괜찮았는데.”
소년의 말에 장년의 사내는 굳은살 가득한 손으로 아들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되었다. 내 아침은 이르다 하지 않았느냐. 내게는 점심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아침이라기에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점심이라기에는 또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들도 아버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침은 뭐에요?”
아들이 얇은 손으로 그의 손을 잡자, 장년의 사내는 싱긋 웃으며 아들을 부축하듯 이끌었다.
“어제 먹다 남은 고기로 스튜를 끓였다.”
소년은 굳이 이럴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가볍게 웃어 넘겼다.
“와! 맛있겠네요!”
두 부자는 식탁이 있는 부엌으로 향했다.
* * *
언덕을 너머 마차를 달리다 보니 어느새 목적했던 도시 브류타가 보이기 시작했다.
최남단에 위치한 브류타는 분지 형태로 되어 있는 도시였다.
덕분에 사과가 특산물인 브류타는 외부 도시나 마을의 눈을 피하기 쉬워 헛짓하기 좋아 보였다.
특히 마법적 현상인 장마가 있는 탓에, 다른 지역과 달리 길을 정비하기 까다롭다는 것도 약간이나마 도시의 은밀함을 더해주는 듯했다.
물론 그래봤자 주기적으로 상단이 오고가는 꽤나 규모 있는 도시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도시에는 뭐가 있습니까?”
제이드는 브류타에 꼭 무언가 있다고 단정하듯 물었다.
제이드의 물음에 모두들 나를 바라봤다.
“꼭 무언가가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냥 여행 온 걸 수도 있잖아.”
브류타는 최남단의 독특한 건축 양식을 구경하기 좋은 도시였다.
물론 관광을 위해서라면 더 남쪽에 아예 관광 도시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내 대답에 제이드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비밀입니까? 역시 유안은 심술궂군요.”
제이드의 말에 프레시아가 귀엽게 콧방귀를 뀌었다.
“도련님께서 숨기신다면 다 이유가 있으신 겁니다.”
프레시아의 지적에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저는 그저 그 이유 중에 저희가 놀라는 걸 보며 즐기려는 마음의 비중이 높을 거라 그리 말한 겁니다. 프레시아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까?”
“….”
프레시아는 제이드의 시선을 피했다.
너무해! 거기선 당당히 아니라고 대답해야지!
게다가 비중이 높지는 않다고!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말했다.
“뭐, 아예 목적이 없는 건 아니야. 도시 안에서 다 같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괜히 눈에 띄고 좋지 않으니까 움직일 때는 나뉘어 움직이자.”
일곱 명 정도야 그렇게까지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도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는 게 좋았다.
내 말에 다들 집중했다.
“아바스엘과 제이드는 행상인인 척 도시를 돌아다니며 혹시 마력이 이상한 곳이 있나 찾아줘. 돈을 줄 테니까 수상하게 여겨지지 않도록 실제로 물건도 사.”
“마법과 관련된 겁니까?”
아바스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사람은 접근도 못 하는 재해 구역으로 바뀔 정도니 보통 마법은 아닐 거다.
“야드와 프레시아는 최대한 은밀하게 도시 내부 사정을 살펴줘. 특히 뒷골목 위주로.”
내 지시에 야드가 손을 들었다.
“뒷골목 조사 같은 위험한 일에 레이디와 함께하는 건 조금 그렇습니다만.”
“프레시아는 네 호위로 붙여주는 거야.”
야드도 어중간한 기사 서넛은 맨손으로 쓰러트릴 수 있는 강자였지만, 프레시아 수준은 못 되었다.
“우리 일행 중에 프레시아보다 강한 사람이 없을걸?”
제이드는 아직 대인 전투 경험이 한참 부족했다.
아바스엘은 아직 마터호른산에서 얻은 미스텔의 힘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해 힘 조절이 서툴렀다.
“대마법사인 엘이 있는데도 말입니까?”
“있어도 말이야.”
야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바스엘을 바라보자 아바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의 말씀이 옳다. 마법사의 싸움은 무수히 많은 변수가 있지만 일대일로는 아무래도 마법사가 기사에게 불리하지.”
그냥 불리한 수준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원래 마법사는 특수한 훈련을 받은 전투 마법사가 아니라면 싸움은 잘 못했다.
애초에 마법은 싸움을 위해 있는 게 아니다.
“프레시아 경이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그녀의 일격에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죽거나 치명상을 피할 수 없을 거다.”
아바스엘은 어지간히 생사의 경계와 친숙하지 않으면 치명상은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질 거라 덧붙였다.
프레시아의 강함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야드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프레시아와 날 번갈아 바라봤다.
프레시아는 야드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물었다.
“절 떨어뜨리려는 건 제 훈련을 피하려고죠?”
“에이, 그럴 리가. 당연히 내가 누구보다도 프레시아를 믿어서지.”
어떻게 알았지? 귀신같기는.
여기까지 오면서 마차 안에서 프레시아의 훈련은 계속되었다.
물론 제대로 된 훈련을 하기에는 공간이 협소해서, 주로 연공법과 근력 단련 위주로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꽤나 힘들었다. 그런데 공간의 제약이 없다고 생각해 봐라. 얼마나 날 가혹하게 굴리겠는가.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프레시아는 가르치는 재능이 없다.
“아니면 나도 함께 갈까? 양아치 건달들을 상대하는 건 누구보다도 자신 있는데.”
양아치 건달들을 족치는 건 내 취미, 아니 전문 분야라 할 수 있었다.
내 제안을 프레시아는 단칼에 잘랐다.
“아닙니다. 저희가 할 테니 도련님께선 가급적 움직이지 말아주세요.”
왠지 불의 제전 이후로 나에 대한 프레시아의 믿음이 바닥을 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 줘야겠다.
“쳇, 너무해. 길버트와 실루아는 나랑 같이 관광이나 하자.”
내 말에 프레시아와 제이드는 동시에 말했다.
“조심하세요, 길버트.”
“도련님이 이상한 데 가지 않도록 잘 막아야 해.”
음, 두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는지 자아알 알겠다.
길버트는 주먹을 움켜쥐며 외쳤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길버트, 너마저!
“에휴, 서두르다가 사고를 칠 바에는 느긋하게 하자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차의 머리를 도시로 향했다.
* * *
브류타는 질리빌처럼 고위 귀족들이 제집처럼 드나드는 대도시가 아니다 보니 스위트룸 형태의 호화 여관이 없었다.
때문에 적당히 깔끔한 여관의 2인실 두 개와 3인실 하나를 빌렸다.
돈이야 많았으니 각자 1인 1실로 빌려도 괜찮았지만, 작은 여관이라 1인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언제 소동이 벌어질지 모르는 도시라 각자 다른 여관에서 자는 것도 좋지 않았다.
“프레시아, 이거 받아.”
나는 프레시아에게 팔찌를 건넸다.
“아공간 마도구야. 벨트가 만든 보조 무기와 여분의 철검, 그리고 보존식과 돈을 넣어뒀으니 편하게 사용해.”
아바스엘이 제프리즈 부부에게 빼앗은 아공간 마도구였다.
기껏해야 좁은 고시원 정도의 크기였지만 가방 대신 사용하기에는 충분했다.
아공간 팔찌를 찬 프레시아는 어색하게 조작해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아공간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감사히 사용하고 반납하겠습니다.”
“아니, 반납하지 말고 가져.”
난 이미 아공간 마도구가 두 개나 있는데, 그런 작은 아공간을 가져서 뭐 하겠나.
“예? 하지만 이런 귀한 걸….”
확실히 아공간 마도구는 귀했다.
아공간 마법은 공간계 마법 중에서도 특히 고난이도 마법에 속했다.
게다가 마법 술식이 복잡한 만큼 사람이 착용할 정도로 소형화하는 것도 극히 어려웠다.
난쟁이가 아니라면 제작할 엄두도 못 낼 물건이 아공간 마도구였다.
아바스엘이 괜히 희대의 천재라 불린 게 아니다.
“귀한 물건이니까 주는 거야. 귀하지 않았으면 굳이 주는 의미도 없지.”
뭐, 만든 사람도 노획한 사람도 아바스엘이었지만 말이다.
남은 아공간 팔찌 하나는 나중에 길버트가 아공간이 필요해지거나 잘한 일을 하면 포상으로 줄 생각이었다.
내 말에 프레시아는 감동한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훈련 강도는 안 줄일 거예요.”
“쳇, 치사하긴. 자, 그럼 점심이나 먹고 움직이자고.”
쩝, 훈련 강도는 줄여줬으면 했는데 역시 뇌물로는 안 되나.
* * *
제이드와 아바스엘은 행상인처럼 가방을 메고 도시를 둘러싼 과수원부터 살펴보러 갔다.
지금처럼 수확 시기가 아니라면 과수원은 은근히 인적이 드물어서 무언가 수작 부리기 좋았다.
프레시아와 야드는 은신술을 사용하며 반대로 영주성 인근부터 천천히 살펴보겠다고 했다.
이 도시의 영주는 쓰레기라고 했으니, 양아치 깡패 새끼들과 커넥션이 있다면 분명 영주성에 수시로 드나들 터였다.
여관에 남은 길버트와 실루아는 날 바라봤다.
“저희는 어디부터 시작합니까?”
의욕 가득해 보이는 길버트를 보며 나는 싱긋 웃었다.
“시작하긴 뭘 시작해? 훈련해야지. 훈련 빼먹으면 프레시아가 이놈 한다.”
내 대답에 길버트는 시무룩해졌다. 그런 길버트의 등을 때리며 말했다.
“그래도 프레시아가 없으니까 쉬엄쉬엄하자고. 훈련하기 좋은 으슥한 곳을 알고 있으니까 실루아도 인형 조종 연습하자.”
“네~!”
나는 두 사람을 데리고 도시 뒷산으로 향했다.
도시가 분지 안이라 어디가 뒷산이고 어디가 앞산인가 싶지만, 영주성 정문 방향을 앞으로 삼았다.
적어도 소설 속의 그는 그랬다.
브류타는 소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엔 이미 사라진 도시였기에 나는 이 도시에 대해 잘 모른다.
그저 어떤 등장인물의 회상으로 약간의 편린을 유추해 볼 뿐이었다.
그리 많은 시간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그리 높지 않은 언덕.
때때로 까마귀가 우는 소나무 숲 사이, 영주성의 가장 높은 첨탑 지붕이 소나무 숲 위로 간신히 보이는 넓은 공터.
“대충 여기인가.”
정령의 눈으로 위에서 봤을 때 소설의 묘사와 일치하면서 이 근방에서 여기만큼 운동하기 좋은 곳도 없었다.
주변 나무 몇 그루에는 둔기로 파인 듯한 자국들이 선명한 걸 보면 여기가 확실한 것 같았다.
“확실히 여기라면 누구에게 방해받지 않을 것 같네요.”
길버트는 몸을 풀며 날이 서 있지 않은 철검을 뽑아 들었다.
길버트가 검을 휘두르는 사이 실루아는 명주실을 풀어 마법으로 짚인형 같은 형태로 작은 실 인형을 만들어 인형을 조종하는 연습을 했다.
실 인형을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실 하나하나를 근섬유처럼 섬세하게 조종해야 해서 연습에 딱 좋았다.
나는 실루아 옆에 앉아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마법회로의 세맥을 개발했다.
쓰읍,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한참을 고통을 감내하며 집중하고 있는데 소나무 숲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어? 선객이 있었네?”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듯한 인상의 소년은 한 손에 닳고 달은 목검을 쥐고 있었다.
나는 병약해 보이는 소년을 보며 웃었다.
소년은 제국을 중심으로 자유 기사들을 위해 암약하는 조직, 자유 기사 연맹의 유일한 기사단인 집행 기사단의 전임 부단장 프로스트 웨이븐의 아들.
훗날 천하십검의 자리에 오르는 검악(劍惡) 버밀리온 웨이븐.
금세기 최악의 악당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