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비 내리는 뒷골목 (2)
나는 야드의 부탁에 눈을 멀뚱멀뚱 떴다.
“나랑 같이 가고 싶다고?”
내가 되묻자 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나 보다.
“왜? 서커스단은 어쩌고?”
야드는 그 누구보다 서커스단과 단원들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런 서커스단을 두고 나와 움직인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아서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아서 존 자멧슨, 슬라반 서커스단의 단장 대리이자 야드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소설 속에서도 야드가 제이드를 따라 나선 뒤 서커스단을 이끈 것도 그였으니 충분히 믿고 맡길 만했다.
하지만….
“유밀 자반의 뒤를 쫓는 거라면 굳이 날 찾을 필요 없을 텐데? 아바스엘에게 듣기로 제프리즈 부부에게 정보를 얻기로 했다며?”
처음 아바스엘에게 제프리즈 부부와 만났던 일을 듣고 얼마나 쾌재를 불렀던가.
그 둘이라면 이용해 먹을 구석이 많았다.
스스로의 목숨보다 사랑하는 연인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이상 어중간하게 움직이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아마 아바스엘에게도 들었을 테지만, 그 두 사람은 자반이 속한 조직의 일원이야. 정확히는 파벌이 갈리기는 하지만 기다리기만 하면 자반을 옥죌 수 있는 정보를 물어 올 텐데 굳이 날 따라오고 싶은 이유는 뭐야?”
내 물음에 야드는 쓰게 웃었다.
“저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엘 덕분에 자반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이대로도 괜찮은 게 아닌가 하고 말이죠.”
작게 심호흡한 야드의 눈동자에는 평소의 서글서글한 눈웃음이 아닌 꺼지지 않는 증오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자반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는 교활한 작자입니다. 토끼도 굴을 세 개는 판다고 하던데, 그 단장이 살 구멍을 몇 개나 만들어 놓았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확실히 자반은 만만치 않은 녀석이다.
유능하지만 성격은 종잡을 수 없고, 약한 듯하지만 언제나 치명적인 비수를 감추고 있다.
“자반이 아무도 모르게 스스로의 정보를 조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 추측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으로 이용당할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야.”
어리숙한 니벨이라면 모를까, 자반은 제프리즈 부부가 자신의 정보를 캐는 걸 눈치챌 수도 있다.
“그래서 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수도에서 당신과 처음 대화했을 때 깨달았습니다. 너무나 서글픈 일이지만, 제 사랑하는 동료들과 함께하는 동안에는 저는 결코 자반의 그림자도 잡아낼 수 없다는 걸 말이죠.”
야드가 게으르거나 자반을 찾는 데 소홀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자반도 자신이 만든 슬라반 서커스단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그의 눈에 띄지 못한 것뿐이다.
“나와 함께해도 자반을 만나게 될 거란 보장은 할 수 없어. 꽤나 위험한 여정이 될지도 몰라.”
“괜찮습니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그의 결의에 나는 싱긋 웃었다.
“조언하자면 서커스단에 네 대역을 만들어 놔. 혹시 모를 자반의 눈을 가려두면 편할 테니까.”
자반은 야드를 경계하고 있다.
그렇기에 야드가 서커스단을 벗어나 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최대한 늦추는 편이 도움이 된다.
내 말에 야드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할게.”
세상 물정 잘 아는 사람이 있어주면 나야 고마울 따름이다.
날 제외하면 죄다 나사 하나씩 빠진 천재들이라 나만 고생 중이거든.
* * *
하늘이 회색 구름으로 차올랐다. 물방울 하나가 장년의 사내의 콧잔등에 떨어져 내렸다.
“또 비인가.”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점차 쏟아지며 길거리를 적시기 시작했다.
소낙비가 한차례 쏟아지고, 부슬거리는 이슬비가 도시의 뒷골목을 잠식해 갔다.
음울한 비 내음이 거리를 휘감았고 사내는 비를 맞으며 인적 드문 골목의 술집에 들어갔다.
술집 안에는 녹빛 머리의 청년 하나가 술잔을 홀짝이고 있었고, 장년의 사내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이군, 단장. 제국이 아닌 이 나라에서 단장을 볼 수 있을 줄은 몰랐어.”
장년의 사내가 건넨 인사에 녹빛 머리의 청년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행적을 찾는데 골머리를 앓았지, 부단장.”
부단장이라 불린 장년의 사내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호칭을 똑바로 하지. 나는 이제 부단장이 아니야.”
“돌아와 줄 순 없는 건가?”
“없다.”
단칼에 자르는 그의 대답에 녹빛 머리의 청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단원들은 널 기다리고 있다.”
청년의 말에 장년의 사내는 청년의 술잔을 뺏어 들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단원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제 내게 남은 건 그 아이뿐이야. 단장이 소개해 준 독원이란 의원 집단도, 고위 신관도 구해주지 못하지 않았나.”
술잔을 내려놓은 장년의 사내의 숨결에는 술기운과 진한 한탄이 배어 있었다.
“내게 남은 길은 이제 하나뿐이다.”
녹빛 머리의 청년은 음울하면서도 서글프게 그를 바라봤다.
“사람의 길을 벗어나지 마라, 웨이븐.”
“참견하지 마라, 내가 갈 길은 내가 정한다. 아이오마이어.”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은 녹빛 머리의 청년이 먼저 눈을 감는 것으로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오마이어는 옆에 걸어둔 망토를 어깨 위에 두르며 말했다.
“다시 찾아오겠다.”
“아니, 이제는 오지 마.”
“…자유 기사 연맹은 언제고 널 다시 환영할 거다. 네게 자유와 정의가 함께하길 빌겠다.”
청년이 술집을 떠나자 홀로 남은 장년의 사내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늦어버린 나보다는 단장에게 자유와 정의가 함께하길.”
* * *
마차는 질리빌을 떠나 남서쪽으로 향했다.
마차를 끄는 건 실루아의 인형인 망아지 시리즈였고, 마부석에 앉아 있는 건 남장한 상태로 후드 망토를 뒤집어쓴 질리안 시리즈였다.
사실 아바스엘의 개조로 굳이 말이 없어도 마차만으로 운행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마차는 마법사들의 성지인 천공 도시에서도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보여 주기식으로라도 말과 마부가 필요했다.
“그나저나 대단하군요. 이렇게나 빨리 마차를 달리는데도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확실히 길이 닦인 가도라고 해도 흙바닥일 뿐이었다.
중간중간 자갈도 많을 텐데, 마치 아스팔트 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편안했다.
난쟁이의 기술력과 슈프림 메이지의 마법이 합쳐지니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제이드의 감탄에 아바스엘은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마차를 어떤 식으로 개조했는지 떠들어댔다.
질리빌을 떠나기 전에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읊는데도 지겹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와 달리 제이드는 이런저런 관심을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와! 저 건물은 특이하게 생겼어요!”
실루아는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을 가리키며 신기한 듯 외쳤다.
실루아가 가리킨 건물은 단층 구조의 목조 주택이었다.
“그러게. 신기하네.”
“같은 나라 안인데도 건물 형태가 많이 다르네요.”
길버트와 프레시아도 처음 보는 형태의 건물이 신기한지 집중하며 바라봤다.
전국을 돌아다니는 야드는 익숙한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건물을 보아하니 최남단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왕국을 비롯한 대륙 동부는 기본적으로 온화한 해양성 기후였다.
하지만 왕국 최남단 일부는 남쪽 바다의 고온 다습한 해풍과 북쪽의 바스타유 산맥발 한랭 건조한 바람이 부딪쳐 초여름부터 장마 전선을 형성했다.
때문에 최남단은 강수량이 초여름에 몰려 있는 탓에 건축 문화는 다른 지역과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다.
강수량이 몰리는 장마 시기에는 지반이 무르기 쉬워서 튼튼하지만 무게하중이 높은 석조식 건축물보다는 가볍고 환기성이 좋은 목조식 건축물이 발달한 거다.
나는 창밖의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벌써 장마 시기인가.”
7월로 접어드는 어느 날, 꽤나 굵은 빗줄기가 마차 위를 후두두둑 내리쳤다.
사실 이 장마도 마법 현상의 일부라고 봐도 무방했다.
북방의 한랭한 기단은 겨울나무의 현자가 만든 바스타유의 냉기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고온다습한 해풍은 언데드가 되어버린 태양의 현자가 만든 제국 남부 대사막의 온도가 바다로 전해지며 만들어진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장마 전선이 생긴 지 약 170년 정도밖에 안 되어서인지, 건축 양식이 목조에 석조가 어느 정도 섞여 있는 듯 보였다.
하기야 태양의 현자가 언데드가 되기 전에는 이 근방도 해양성 기후였을 테니 이전 양식이 남아 있는 것도 당연했다.
“보통 이 시기에는 남부로 가는 사람들이 잘 없는데, 어디로 향하는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야드의 물음에 나는 저 멀리를 바라봤다.
“내가 정한 목적지는 서남부에 위치한 유적지인데, 가기 전에 남부에 위치한 브류타란 작은 도시에 잠시 들를 생각이야. 남쪽에 분지 지역이 있어서 사과가 특산품이라고 하더라고.”
브류타는 소설 속의 어떤 인물에 의해 멸망해 버린 도시였다.
소설이 시작되었을 때는 이미 지도에서 사라지다 못해 평범한 사람들은 접근조차 못하는 재해 구역으로 바뀌어버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스름 상회의 정보에 따르면 아직 멀쩡한 듯했다.
인어 에일리가 미쳐버렸던 사건도 사상자가 나오긴 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피했다.
하지만 브류타에서 일어날 사건은 성질이 달랐다.
수많은 사람이 죽는 재난을 막을 수 있다면 이번 기회에 막아둘 생각이었다.
그 재난으로 최악의 악인이 탄생하니, 지금 막으면 나중에 편해질 거다.
하지만 언제 사건이 발생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해 허탕을 칠 수도 있었다.
내가 아는 건 어디까지나 소설 속에서 나온 정보밖에 없었다.
“브류타라면 저도 한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분명 그 지방 영주가 지역 암흑가와 손잡고 자기 영지민들의 등골을 빼먹는 녀석이었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야드의 조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들었지? 내가 전에 나눠준 신분증 잘 챙기고, 변장은 수시로 해.”
내 말에 야드는 당황했다.
“그럴 때는 괜히 병사들과 분란 일으키거나 사고치지 말라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신분과 얼굴만 잘 숨기면 깽판을 쳐도 누가 알 건데?”
애초에 깽판 치려고 가는 도시인데 얌전히 있어서 뭐 하겠는가.
내가 가만히 있어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제이드와 프레시아가 먼저 나설 게 분명했다.
아마 말리는 건 힘들 테니, 은폐하고 뒷수습을 하는 걸로 방향을 잡는 게 속 편했다.
내 대답을 들은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돌아가며 유안을 감시할 순번을 정하죠.”
“역시 도련님이 가장 불안합니다.”
“저 눈을 보면 분명 사고 치실 생각이 분명해.”
이제 막 합류한 아바스엘도 적극적으로 날 감시하는 순번에 참여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억울하다! 이 몸으로 눈을 뜬 이후로 크게 일을 벌인 적이 없는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