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불의 제전(祭典) (6)
나는 용암에 불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바닥에 누워 숨을 헐떡였다.
“시부랄, 진짜로 뒈지는 줄 알았네.”
방금 전까지 용암 바다였던 이곳은 처음 리즈벳을 만났을 때처럼 한여름 날의 화원으로 바뀌어있었다.
“이예~! 수고했어. 살면서 너처럼 미친 재능의 소유자는 처음이야!”
그녀의 말에 순간 울컥해서 공격할 뻔했다. 하지만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힘을 소진한 세상이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아, 여기까진가. 그래도 어떻게든 비전 두 개는 때려 박아 넣었으니 나머지는 가빌렛이나 또 다른 ‘나’에게 배워.”
리즈벳은 불의 제전에 분신을 만들어놓은 것처럼 세계 곳곳에 ‘후계자’를 위한 분신을 만들었다.
지금 내 앞의 그녀는 리즈벳의 두 번째 분신이었다.
앞으로 만나게 될지, 아닐지 모를 그 분신들은 그녀와 다른 리즈벳일 것이기에, 나는 진심으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알겠습니다. 당신과의 만남은 말 그대로 기연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감사에 리즈벳은 싱긋 웃었다.
“나야말로 너와 만난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어. 만나서 즐거웠어, 내 후손. 너의 앞날이 순풍 만범하길 바랄게.”
“저 또한 당신의, 아니 우리의 목표가 이루어지길 바라고 노력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내 가슴 포켓에 별 모양 선글라스를 꽂아 넣으며 말했다.
“잠들어 있는 정령의 힘을….”
그 순간, 세상이 암전되었다.
* * *
다시 눈을 뜨자 종유석이 뾰족하게 반기는 천장이 보였다.
체감 시간으로는 반나절 정도 의식 속에 있던 느낌이었다.
하지만 리즈벳의 정령술로 새롭게 깨어난 감각은 불의 제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오감을 넘어선 육감이라고 해야 할까? 공기의 흐름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리즈벳이 마지막에 뭐라고 말하려 한 거지?
“끄응, 내일 근육통으로 고생하겠네.”
꽤나 무리한 탓인지 탈력감이 장난 아니었다.
아직도 전신이 열기에 후끈거리고, 머리카락 끝이 타서 꼬불거리는 게 보였다.
의식 속에서 죽었다면 현실에서도 죽었을 거란 생각에 순간 섬짓했지만, 그래도 얻은 게 많다.
새로운 정령과 계약한 것은 물론, 제대로 정령술을 배운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 가치는 충분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제단에서 내려오는데 벨트와 눈이 마주쳤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순간 내가 의식 속에서 머리나 눈이 다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도 그럴게 벨트는 포박당한 채로 체념한 듯 무릎 꿇고 목을 내밀고 있었다.
프레시아는 칠성검을 높이 들고 그런 그의 목을 벨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옆에는 실루아가 무릎 꿇고 벌을 서고 있고, 제이드와 아바스엘은 나란히 맨땅에 대가리 박고 원산폭격 중이었다.
그 와중에 호국공은 난감한 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꿈인가? 현실로 돌아온 게 아닌 건가?”
나는 진심으로 당황해서 중얼거렸고, 벨트는 눈물을 글썽이며 날 불렀다.
“주, 주인!”
프레시아는 걱정하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도련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다치거나 이상이 생긴 곳은 없습니까?!”
내 몸을 더듬으며 이상이 있는지 확인하는 프레시아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후우, 다행입니다. 머리카락이 살짝 그슬렸지만 크게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말했잖아. 별거 아니라고.”
내 말에 벌을 받고 있는 녀석들이 동시에 움찔했다.
…아, 이 의식이 위험한 거라는 걸 프레시아에게 들켰구나.
네 사람의 반응을 보니 지금 내 눈앞에 벌어진 광경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갔다.
불의 제전이 난쟁이를 속이고 적의를 가진 이를 불태워 죽이는 의식이란 사실을 안 프레시아가 벨트를 죽이려 한 듯했다.
제이드와 아바스엘이 그걸 말리려다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걸 들켰고 말이다.
그래서 두 마법사는 대가리를 박고 있었고, 내가 못 일어나면 바로 벨트의 목을 베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건가?
“도련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이 의식이 위험하다는 걸.”
“뭐?! 위험했다고? 진짜야?”
나는 능숙하게 몰랐던 것처럼 연기 했다.
나 같은 초일류 거짓말쟁이는 심장 박동과 동공 반응까지 조절할 수 있다.
“거짓말이군요.”
그러나 프레시아는 단번에 내 거짓말을 알아차렸다.
“거, 거짓말이라니? 내가 내 안전이 걸린 일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
“…이것도 거짓말이군요.”
어떻게 알았지?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립니다, 도련님.”
큰일 났다. 프레시아가 진심으로 화났다.
나는 그녀의 살벌한 투기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이럴 때는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구하는 게 현명했다.
“도련님.”
건조한 목소리 사이로 서릿발보다 서늘한 분노가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용암 해일을 타고 서핑을 해서 그런지, 프레시아의 분노가 더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제가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도련님께서 위험한 일에 뛰어들지 않는 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었습니까?"
“아니, 사실 그렇게 위험하진….”
“제가 많이 부족합니까? 그렇기에 말하지 않은 겁니까?”
프레시아는 내 말을 자르며 살벌한 표정으로 무릎 꿇고 있는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절로 식은땀이 났다.
“아니.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
“그럼 제가 믿음직스럽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
“그럼! 위험한 일에 뛰어들어야만 하더라도!”
프레시아는 한쪽 무릎을 꿇고 울 것 같은 얼굴로 날 바라봤다.
“…꼭 그래야만 하더라도, 제가 앞장서길 바라는 것이 그리도 큰 바람입니까!”
“…아니.”
“저는 도련님의, 왕자님의 호위 기사입니다. 백의 적과 싸우더라도, 천의 적을 뚫어야 한다 하더라도. 그 끝에 죽음이 있다 하더라도 기꺼이 검을 들겠습니다. 그러니… 제 검이 닿지 않는 곳에서 목숨을 걸지 말아주세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서글픔이 느껴졌다.
그녀가 이렇게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아마 ‘나’로서의 유안보다 어리고 유약했던 ‘왕자’로서의 유안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내왔기 때문일 것이다.
길버트도, 아바스엘도, 실루아도, 제이드도 ‘나’밖에 경험하지 못했기에 줄 수 있는 믿음이 있듯.
그녀가 ‘내가 아닌 나’를 경험해 왔기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걱정이 있었다.
어느새 프레시아가 내뿜던 투기는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나는….”
갑자기 시야가 흔들리며 흐릿해졌다.
불의 제전에서 무리하며 열기를 받아낸 직후, 살벌한 투기에 긴장했다가 긴장이 풀린 탓인지 속에서부터 열이 확 올라왔다.
“아, 이런.”
“왕자님! 괜찮으…!”
프레시아의 놀라는 목소리가 멀어지며 그만 의식을 잃어버렸다.
* * *
눈을 떠보니 익숙한 천장이다. 어느새 여관으로 옮겨져 내 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다.
이것 참, 벌써 몇 번째 기절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몸뚱이는 너무 병약하다.
내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순간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훅하고 올라오는 기분이 들더니, 눈앞이 어지러웠다.
“누워 계세요. 과로와 탈진으로 인한 몸살감기입니다.”
제이드는 미지근한 물을 잔에 따르며 침대 옆 탁상에 놓았다.
“마법으로 조금씩 따라 드릴까요?”
“됐어, 람아.”
람이는 잔 안의 미지근한 물을 허공에 띄워 내 입안으로 졸졸졸 흘렸다.
물이 들어오니 살 것 같다.
나는 뜨거워진 물수건을 치우고 대신 람이를 내 이마에 얹었다.
다람쥐인지 햄스터인지 모를 오동통하고 부드러운 뱃살이 서늘해 기분이 좋아졌다.
람은 물의 정령이라, 체온으로 따뜻해진 물을 바로바로 증발시켜 뜨거워지지 않았다.
이래서 수랭 쿨러가 최고라니까.
“프레시아에게 듣기로 오히려 지금까지 쓰러지지 않은 게 이상하지 않은 여정이었더군요. 그녀가 유안을 걱정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하, 그래도 꽤 휴식은 잘 취했는데. 크흠!”
몸살감기 때문인지 목이 갈라졌다.
“내가 얼마나….”
얼마나 기절해 있었나 물으려 했는데, 스위트룸 거실 쪽에서 실루아가 들어왔다.
“유안 오빠! 무서웠어요!”
“무서워? 그냥 감기일 뿐인데?”
내 물음에 실루아는 내 배 위에 얼굴을 묻으며 칭얼거렸다.
“그게 아니라 프레시아 언니가요! 오빠가 쓰러지고 막막!”
“막막 뭐?”
방 밖에서 들려오는 프레시아의 목소리에 제이드와 실루아는 움찔하며 살짝 얼어붙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프레시아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켜줬으면 좋겠는데.”
“예! 물론이죠. 천천히 이야기하십쇼!”
“아바스엘 아저씨와 길버트 오빠에게 가볼게요!”
두 사람은 재빠르게 자리를 비켜줬다.
아니, 내가 기절한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프레시아는 내 옆에 앉아 내 몸 상태를 확인했다.
확인하는 동안 짧은 침묵이 무서웠다. 그래도 일단 환자인데, 화내진 않겠지?
“도련님.”
“어? 어어, 말해.”
내 반응에 그녀는 살며시 웃었다.
“우선 도련님께서 궁금해하실 만한 이야기를 하자면, 도련님께서 기절하신 지 이틀 정도 되셨습니다. 그사이 호국공께선 난쟁이와의 약속을 이행 중이고 겸사겸사 저와 길버트, 아바스엘 씨도 돕고 있습니다.”
방금 밖에서 돌아온 게 벨트의 공방을 다녀온 모양이었다.
망나니와 죄수처럼 당장이라도 벨트의 목을 베어버릴 것 같던 광경이 뇌리에 박혀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아마 프레시아는 비슷한 수준으로서, 길버트는 낮은 경지로서 비교군으로 돕는 듯했다.
아바스엘은 난쟁이의 마법 자체에 관심이 가서 이런저런 일에 손을 보태면서 마법을 빼내고 있겠지.
“호국공의 보조를 하다 보니 배울 점이 많더군요.”
“그래? 그거 다행이네. 고민하던 건 해결했어?”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래도 작은 실마리는 발견한 것 같아요.”
“뭔데?”
“초인의 검에는 제 검에 없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제 검에 그 무언가가 비어 있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겠네요.”
거기서 거기인 듯했지만 꽤나 큰 차이가 있었다.
후자는 스스로 채울 수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아마 그녀가 스스로의 검에 없다고 느낀 건 바로 자신만의 심상(心象)일 거다.
초인은 모두 자신만의 심상을 검에 담아 펼쳤는데 그 심상은 하나같이 검술을 초월한 무언가를 자아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몰라도 괜찮아. 프레시아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채울 수 있을 거야.”
생각해 보면 내가 죽지 않음으로서 프레시아의 운명도 상당히 달라졌다.
그녀의 검이 담게 될 심상이 소설과 같을지, 다를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만 해도 소설 속 프레시아보다 못 해도 2년은 빠르게 한 발을 디뎠다는 말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내 격려에 미소 짓던 프레시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내 손을 잡았다.
뭐지? 왠지 감이 좋지 않은데.
“그래서 말입니다. 도련님께선 또 위험이 있더라도 뛰어드실 겁니까?”
“...그러겠지. 그게 내가 살 수 있는 길이라면.”
“알겠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프레시아는 싱긋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 나는 순간 오한이 들었다.
마치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몸이 굳었다.
데미웨이와 바하무트 앞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불길함이 엄습했다.
“도련님의 각오, 잘 알겠습니다.”
“뭐?”
“그렇다면 어떤 위험이 닥쳐온다 해도 이겨낼 수 있도록 강해져야죠. 저도, 왕자님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프레시아의 눈이 살기 어린 광기로 번들거렸다.
“혹시… 화났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특별 훈련 일정을 짜 두겠습니다.”
“프레시아? 자, 잠깐만! 내가 잘못했어! 프레시아! 제가 잘못했다니까요!”
열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 끝내 프레시아를 붙잡지 못했다.
제길, 난 망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