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불의 제전(祭典) (5)
내가 불의 정령을 소환하는 마법진을 그릴 때 리즈벳은 정령 소환을 돕기 위해 불의 기운이 보다 응축되도록 주변에 추가적인 마법진을 그렸다.
“정령을 소환할 때는 이빌리비스크, 그 말라깽이가 만든 석판이 최고인데 아쉽네. 뭐, 그래도 불의 정령을 소환하는 거라면 석판이 없어도 좋은 환경이니까.”
“당신도 이빌리비스크의 석판으로 정령을 소환한 겁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계약한 정령 모두는 아니고, 반쯤? 환경만 받쳐준다면 선천적인 한계보다 더 많은 정령과 계약할 수 있는데 최적의 환경은 부담을 줄여주거든.”
리즈벳은 사람의 몸은 일종의 그릇이라 했다.
그릇에 담을 수 있는 한계가 있듯, 사람마다 선천적으로 정령과 계약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러고 보면 정령과는 얼마나 계약했어?”
그녀의 물음에 나는 내 정령들의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 번개, 물, 빛, 이렇게 넷입니다.”
정령들을 본 리즈벳은 경악했다.
“모두 정령 군주들이잖아!? 몸은 괜찮아? 몸이 부서질 것 같거나 더부룩한, 그런 느낌은 없어?”
“예, 괜찮습니다.”
내 대답에 그녀는 감탄했다.
“세상에, 군주 넷과 계약하고도 괜찮다고? 나비는 내가 이 세상에 남겨둔 걸 계승한 거니 그렇다고 쳐도, 다른 셋은 직접 소환한 거 아니야?”
“제가 소환했습니다.”
“얼마나 더 계약할 수 있을 것 같아?”
리즈벳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이번에 새로 계약한다고 더 이상 못 할 것 같진 않은데요.”
“그럼 정령술 재능이 내 이상이란 말이야?! 대단해! 나도 역대 모든 정령술사들을 통틀어서도 손꼽힌다고 들었는데. 넌 천재 중의 천재야! 나도 정령 군주는 넷과 계약하는 게 한계였어!”
호들갑스러운 그녀의 말에 살짝 눈앞이 흐려졌다.
“어? 왜 그래?”
“아니요, 그냥 재능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어서요.”
이 망한 몸뚱이에 들어와서 재능 없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천재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호레이즌도, 디벳도, 게오르도, 데미웨이도 모두 하나같이 내게 재능 사망 선고를 내렸는데, 리즈벳만은 다르구나.
물론 그래봤자 비루먹은 몸뚱이가 발목을 잡다 못해 반대 방향으로 질질 끌고 가고 있지만 말이다.
“그래? 하기야, 정령술사는 만나기 힘드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럼 조금 더 욕심 내볼까?”
리즈벳은 추가로 마법진을 그렸다.
“정령 소환에는 소환자가 가장 중요하지만, 기운의 움직임에 따라 정령계에서 특정 구역을 지정해 연결할 수 있어. 내가 연결한 곳은 자연재해라 불리는 군주들 중에서도 꽤나 넓은 구역을 지배하고 있는 정령이야.”
과연, 말하자면 지역 전화번호 같은 건가?
그녀가 그린 마법진을 따라 서서히 막대한 불의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시간 제약이 없다면 이런 자잘한 것까지 알려주고 싶지만, 계약하고 나면 내 비전 한두 개 가르치면 제한 시간이 끝날 것 같네.”
시공간을 초월한 불의 제전은 난쟁이들의 신화가 서린 공간이라지만 무한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나는 정령석을 들고 주문을 소환 외웠다.
“소산(燒散)하는 흔들림 속의 타오름이여! 만물을 정화하며 비산하는 아름다운 불꽃이여! 때로는 생명을 굽어 살피듯, 때로는 들불처럼 번져나가듯, 이곳에 강림하여라! 강인한 태양의 군주여!”
내 주문과 동시에 소환 마법진이 빛나며 강한 열기가 몰아치고, 거대한 화염 기둥이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타 죽을 것같이 사방으로 번져나간 불꽃은 어째서인지 뜨겁다기보다는 따듯하게만 느껴졌다.
꽤 오랫동안 타오르던 거대한 화염 기둥은 어느 순간 한 점으로 모이더니 작은 화염 구체가 되었다.
그 안에서 작고 귀여운 붉은 눈의 하얀 뱀이 나왔다.
불의 정령은 지금 환경이 마음에 드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하얀 불 숨을 토해내며 소환자인 나를 응시했다.
“나와….”
계약하자고 말을 끝내기도 전에 불의 정령은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나와 감각을 연결해 버렸다.
열심히 흔드는 꼬리에서 알 수 있듯, 불의 정령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일단 준비한 정령석을 건네 봤지만 불의 정령은 관심 없는 듯 보였다.
“계약할 때 정령석이 필요한 경우는 소환 환경이 미흡할 경우, 현계할 때 육신을 고정하는 데 필요해서야. 지금처럼 환경이 완벽할 때는 굳이 정령석이 필요 없어. 물론 그 외에도 필요할 때가 있긴 한데, 내가 남긴 책에 그 내용은 없었어?”
“없었습니다.”
내 대답에 리즈벳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정령석의 활용은 1권에 쓰기에는 애매한 내용이라 다음 권에 넣었나 보네.”
나는 계약을 마무리하기 위해 불의 정령에게 이름을 붙였다.
“네 이름은 비암이야.”
비암, 말 그대로 뱀이란 뜻이었다.
역시 이름은 직관적인 게 최고다. 내 작명에 비암은 좋다고 혀를 날름 거렸고, 리즈벳은 웃음을 참다가 터트렸다.
“푸하하핫! 이름 직관적이고 좋네! 어때? 여전히 거북한 느낌은 없어?”
“예, 없습니다.”
내 대답에 리즈벳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아주 좋아! 일곱 정령 모두 정령 군주와 계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소환 정령의 종류는 빛, 어둠, 물, 불, 바람, 번개, 땅으로, 총 일곱 가지였다.
물론 그 외에도 정령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령 나무의 정령이자 요정의 일족인 드라이어드와 앤트가 있었다.
그리고 먼 과거, 천하십검 중 한 사람이었지만 현재는 언데드의 나라를 지키는 검의 정령 알 더그플렛 등이 있다.
그런 경우는 예외적인 특이 케이스라 계약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모두 군주급은 아무래도 어렵겠죠.”
정령의 위계는 총 여섯 단계로 나눈다.
가장 밑에서부터 안전, 조심, 주의, 위험, 준재해, 자연재해 순이었다.
자연재해 등급의 정령은 정령계의 한 지역에 군림하는 군주로서, 아래 등급의 정령들을 지배한다.
내 팔에 똬리를 트고 기분 좋다는 듯 꼬리로 내 팔을 탁탁 치는 이 작은 정령이 그렇게 대단한 정령이란 말이지?
참고로 리즈벳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생전 재해급 정령 넷과, 준재해급 정령 셋과 계약했었다.
소설에 나온 정령공 제스로드의 경우 재해급과 준재해급 각각 둘씩, 정령후 아빌론의 경우 재해급 하나, 준재해급 둘과 계약했었다.
정령왕 가빌렛은 소설에 등장도 하지 않은 이름뿐인 엑스트라라 모르겠다.
그걸 감안하면 리즈벳의 생전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정령을 소환하느라 불의 제전의 힘을 많이 소모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마음 같아선 내 모든 비전을 전수해 주고 싶지만, 하나 익히기도 빠듯할 테니 바로 시작하자.”
리즈벳이 악동처럼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 풍경이 여름날의 화원에서 용암 지대로 바뀌었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열기에 나는 본능적으로 비암에게 마력을 불어넣어 내 몸을 보호했다.
“후후후, 방심하지 마. 방심하는 순간 죽기 직전까지 간다.”
리즈벳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땅이 흔들리며 용암이 파도치기 시작했다.
제길, 스파르타식이냐!
“비암! 나비!”
나는 내 몸을 덮치려는 용암 파도를 가르고 몰아치는 열기를 흘려보냈다.
내가 정령을 사용하는 것을 본 리즈벳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아무에게도 정령술을 배우지 못했구나? 이렇게 원시적인 정령술이라니.”
그녀의 박한 평가에 순간 울컥했다.
“어디가 원시적이란 겁니까!”
나는 정령에게 이미지와 함께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력을 불어넣을 때는 마법을 사용하듯 마력을 가공했다.
내 나름의 효율을 끌어올리는 방식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왜 정령을 다루는 데 마법을 모방하는 거야!?”
“아니, 그럼 어떻게 정령을 다루라는 겁니까!”
나는 간신히 무게중심을 잡으며 몰아치는 용암 파도를 제압했다.
내 항의에 리즈벳이 버럭 소리쳤다.
“내 비전 중에서도 정령 마법은 있지만 말 그대로 정령술과 마법의 융합이지, 너같이 정령의 힘을 마법처럼 사용하지 않는다고!”
내가 당황하자 리즈벳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웃긴 게, 보통 그렇게 정령을 다루면 효율이 엉망이어야 하는데, 넌 굉장히 세련되었단 말이야. 이렇게 세련된 원시 정령술은 살면서 처음이야. 요정 여왕도 이렇게 세련된 원시 정령술은 못 할 거야.”
욕인지 칭찬인지 모르겠다.
나는 조금씩 거세지는 용암의 파도를 막으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정령을 다뤄야 합니까?”
내 물음에 리즈벳은 차분히 설명했다.
“자연은 순환하는 법이야. 너처럼 일방적으로 마력을 방출해서는 정령의 힘을 오래 사용하지 못할 뿐더러 위력에도 한계가 있어.”
순환? 내가 일방적으로 정령에게 마력을 불어넣기만 해선 안 된다는 말인가?
하지만 내 마력은 정령을 통해 한차례 가공되어 소모되었는데?
“정령은 자연의 상징체이자 응집체야.”
“응집…? 아!”
나는 비암을 통해 주변의 마력을 응집시켰다.
그러자 내 주변의 열기가 비암에게 빨려 들어가며 쾌적해졌다.
동시에 내게서 비암에게 흘러가는 마력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래. 드디어 원시 단계에서 벗어났구나! 정령술사라면 주변 환경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지! 정령에게 자연의 마력을 응집시키는 건 순혈 요정들도 몇 달은 걸리는 건데, 역시 천재라니까!”
기뻐하는 리즈벳과 달리 나는 기뻐할 정신이 없었다.
“으아아아!!”
용암 파도가 파도를 넘어 소형 해일로 변하며 내가 발 디딜 땅을 빠르게 잠식했다.
나는 람의 힘으로 물의 보드를 만들어 올라타고 해일 위에 올라탔다.
조금만 중심이 틀어져도 용암에 빠질 것 같아 불안했지만 나비의 힘으로 내 등을 받쳐 중심을 잡았다.
그래도 용암이라 밀도가 높아서인지, 서핑 보드를 타는 것보다는 나았다.
“자,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다음은 정령에게 응집시킨 자연의 마력을 역으로 자신에게 되돌리는 거야!”
“뭐?! 그건 어떻게 하는 겁니까!”
“너라면 할 수 있어!”
“아니! 제대로 설명을 하라고!”
용암 해일 위로 또다시 용암 해일이 밀려들어 왔다.
“으아아아아!!”
내가 정신없이 서핑 보드를 움직이는 동시에 내게 튀는 용암 방울을 바람 보호막으로 튕겨내니 리즈벳은 박수를 쳤다.
“좋아! 그렇게 하는 거야!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네! 역시 천재는 위험에 던져놓으면 알아서 잘 터득한다니까.”
“으아아아! 뭐라는 거야, 이 미친! 으아아아아! 살려줘!”
이번에는 용암들이 뭉치더니 슬라임 인간처럼 변했다.
문제는 그 용암 슬라임 인간이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다는 거다.
“자! 원시 정령술에서 벗어났으니 기초는 끝났어. 바로 비전 레슨을 시작하자!”
“야 이 미친 새끼야! 가르칠 비전이 뭔지부터 설명하고 시작해야지!”
내 외침에도 리즈벳은 번쩍이는 별 모양 선글라스를 쓰고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예~!”
“이예고 나발이고! 으아아악! 화산이 터진다!!”
콰과과과-! 슈우우-!
리즈벳은 내게 정령술을 가르쳤고, 그녀의 가르침을 받는 동안 나는 본능적으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근본적으로 정령을 잘못 다루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이런 미친 짓을 시킬 필요는 없잖아!
살려줘, 프레시아! 제이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