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불의 제전(祭典) (4)
“치키치키! 예! 예~!”
미친 듯이 반짝이는 별 모양 선글라스를 보며 난 생각했다.
미친X인가?
흐느적거리는 춤을 추고 있는 옅은 분홍빛 머리카락의 여자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어스름 상회에서 구매한 정보에 따르면, 불의 제전에는 이따금 안내인이 등장해 직접 시련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주로 난쟁이가 직계 후손에게 미처 전수하지 못한 비전을 넘겨주기 위해 자신의 분신체를 남겨두는 경우였다.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편한 박스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던 그녀는 별 모양 선글라스를 살짝 들어 올리며 내게 윙크를 했다.
“어때? 네가 사는 시대에 유행하는 옷차림을 따라 해봤는데. 옛날 사람 같지 않지?”
“내가 사는 시대의 옷차림?”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의 차림은 현대의, 정확히는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에 흔히 입었을 법한 차림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당황하고 있는데, 눈앞의 여자는 갑자기 물끄러미 내 옷차림을 보고는 턱을 쓸어 만졌다.
“어라? 이상하다. 내가 본 미래의 차림은 이런 양식이 아니었는데? 아니, 손에 든 물건들을 보면 내가 본 미래의 물건 같기도 하고.”
그녀는 내 왼손에 들린 디바이스를 보며 의아해했다.
“이런걸 뭐라고 하지? 코스튬 플레이?”
“…일단 무슨 일인지나 알았으면 하는데? 여기는 난쟁이들의 불의 제전이 아닌가?”
내 물음에 어디서 본 것 같은 그녀는 유쾌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여기는 난쟁이들의 불의 제전 의식 속이야. 그런데 날 처음 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데, 내가 남긴 힌트를 보고 찾아온 거 아니야?”
“네가 누구인데?”
“…어?”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가빌렛이 보낸 거 아니야?”
가빌렛이라면 무국구왕 중 하나인 정령왕을 말하는 건가?
“가빌렛이란 녀석은 만난 적도 없다만.”
“어라? 어디서 엉킨 거지? 인간 정령사여야지 내가 나왔을 텐데?”
서로 당황하고 있는데 내 옷자락 안에서 나비가 튀어나오며 울었다.
-미야옹~!
반가움과 그리움이 담긴 울음소리에 그녀는 놀랐다.
“미올리!? 네가 어떻게?”
나비의 감정에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초상화 하나가 있었다.
“혹시 초대 왕후 리즈벳?”
내가 리즈벳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리즈벳이긴 한데… 어어? 내가 왕후가 돼? 아퀼라, 그 사갈 같은 마녀가 순순히 정실 자리를 넘겨주지 않았을 텐데?”
반응을 보아하니 정말로 전설적인 정령사 리즈벳이 맞는 모양이었다.
리즈벳과 가빌렛이 친분이 있었던가?
하기야 둘 다 전설적인 정령술사이니, 친분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가빌렛은 순혈 엘프라 리즈벳이 살아 있던 600여 년 전에도 활동했을 테니까.
그런데 왕궁에 걸려 있던 초상화보다 젊어 보이는 걸 보면 분신체가 만들어진 건 왕후가 되기 이전인 듯 했다.
“당신이 리즈벳이 맞다면 일단 저부터 인사드리죠. 건국왕과 당신의 후손이자, 듀플리온 왕국의 현 1왕자인 유안이라고 합니다.”
“네가 내 후손에 왕자라는 건, 내가 왕후가 된 것도 모자라 내 아이가 왕이 된다고?!”
내 소개에 리즈벳은 자신의 아이가 왕국을 계승했다는 사실에 감격한 듯했다.
“야호~!”
팡-! 팡-!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폭죽을 터트리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물었다.
“당신께서 무슨 안배를 남겨두신 듯한데, 제가 불의 제전을 치르게 된 건 당신과 관계없는 일이라 그런데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아, 그렇지. 기쁘기도 하고, 놀라워서 잠시 깜박했네. 설명하자면 조금 복잡한데… 혹시 별을 읽는 자라고 알아?”
“선천적으로 타고난 예언가를 말하는 거라면 알고 있습니다.”
내 대답에 리즈벳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면 설명이 쉽겠네. 나는 그 당시에 태어난 별을 읽는 자였어.”
리즈벳이 별을 읽는 자였다는 건 몰랐다.
다만 리즈벳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 덕분에, 시조와 동료들을 위험에서 몇 번이나 구했다는 것 정도는 아퀼라의 마도서를 통해 알고 있었다.
“동시에 나는 인간들 중에서는 극히 드문 ‘정령들의 사랑을 받는 자’기도 했지. 정령들의 힘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렸을 때 예지의 반동으로 죽었을지도 몰라. 물론 그 탓에 예언가 노릇은 못 하긴 했지만 말이야.”
전대 겨울나무의 현자, 예카트리체가 마법의 힘으로 예지의 힘을 억눌렀듯이 리즈벳은 정령들의 힘으로 제어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예 예지를 못 하는 건 아니었어. 미올리, 아니 지금은 새로운 계약자인 네가 지어준 이름이겠구나.”
“나비입니다.”
나비의 이름을 들은 리즈벳을 무릎을 치며 폭소했다.
“푸하하핫! 나비래! 위대한 태풍의 군주인데 고양이 같은 이름이잖아! 아하하하! 마음에 들어! 이해해, 나도 사실 미올리보다는 멍멍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었거든.”
나도 나지만 이 여자도 네이밍 센스가 엄청나군.
“듄이 말려서 미올리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말이야. 아, 혹시 미올리란 말의 의미를 알아?”
“아름다운 소리라는 고어(古語) 아닙니까. 그보다 본론에서 이탈하지 마십쇼.”
굉장히 수더분한 성격이었다.
“아하하하! 그렇지. 여하튼 나비와 계약한 너도 알겠지만, 인간은 선천적으로 정령술을 익히기 어려워. 하지만 나는 내 정령술을 인간에게 물려주고 싶었어. 정확히는 정령과 인간이 친구가 되었으면 했지.”
그녀의 말에 나는 쓰게 웃었다.
“그래서 미래를 예지했군요.”
예카트리체도 자신의 뒤를 이어줄 후계자를 찾기 위해 예지를 사용해 제이드를 찾아냈다.
다만 리즈벳은 같은 시대에서 후계자를 찾지 못했을 뿐이다.
그녀는 지닌 힘에 비하여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다.
아마 먼 훗날의 후계자를 찾느라 많은 대가를 치렀으리라.
“맞아. 나는 내가 완성하지 못한 연구를 이어줄 인재를 예지했고, 그 아이를 위해 많은 것을 남기고자 했어.”
“남기고자 했다라, 그 말은 못 남겼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내 앞의 그녀는 리즈벳의 인생에서 한 지점에 불과했다.
내 지적에 리즈벳은 손가락을 튕겼다.
“맞아. 현시점… 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겠구나. 과거, 내가 베브로드론에게 부탁해서 불의 제전 속에 내 분신을 만든 이후의 일은 내가 알 수 없거든.”
그녀는 기분이 이상하다며 웃었다.
그녀에게 있어 지금은 그녀의 사후 600여 년이 지난 시점이 아닌 아직 왕국이 제대로 자리 잡기도 전의 시점이었으니 당연한 감각이었다.
“아마 내 계획대로라면 내 연구가 담긴 정령서는 총 세 권일 거야.”
“일 거야, 라면?”
“내 기준으로는 아직 1권을 작성 중이거든. 나라면 한 권은 아마 내 거처에 있을 거고, 다른 한 권은 가빌렛에게 주었을 거야.”
리즈벳과 가빌렛은 생각 이상으로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일반적인 순혈 엘프의 수명은 대략 천 년 정도. 단련된 수준에 따라 더 오래 사는 것도 가능했다.
본인도 전설적인 정령사였으니, 먼 미래의 후계자를 가르칠 인도자로서 가빌렛만 한 인선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권은… 뭐, 왕궁 도서관 같은 곳에 있지 않으려나? 어렸을 때 도서관이 우리 아지트였거든. 소중한 건 도서관에 숨기고들 했었지. 뭐, 어렸을 때라 매미 허물이나 예쁘게 생긴 조약돌 같은 것들뿐이었지만.”
과연, 그래서 왕실 서재에 그렇게 중요한 보물들이 많이 있었구만.
시조와 왕후, 아퀼라는 소꿉친구였으니 그런 곳에 숨긴 게 이해가 갔다.
“음, 그 도서관 같은 곳에서 정령서는 못 발견했는데요. 왕후궁에서는 발견했지만요.”
내 말에 리즈벳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럼 나도 몰라. 지금의 난 아직 1권도 완성 못 했거든.”
“어디 둘 만한 곳은 없습니까?”
그저 소설에 나오지 않아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나중에 왕실 서재를 한번 다시 뒤져 봐야겠다.
어차피 왕실 서재에는 아직 내가 회수하지 못한 보물들이 있었다.
리즈벳은 턱을 쓸어 만지며 고민했다.
“음~ 글쎄? 내 고향? 아니면 무덤? 그도 아니면 가빌렛에게 있으려나? 모르겠어. 하하하, 도움이 안 돼서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충분히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리즈벳이 남긴 정령서가 세 권일지도 모른다는 것만 해도 중요한 정보였다.
정령은 내가 유일하게 가진 재능이자 주력이었으니 더 보완할 방법이 있다는 말이었다.
소설 속의 리즈벳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이곳에서 나가면 일단 리즈벳의 생애부터 자세히 조사해야겠군.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리즈벳은 내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왁~!”
갑자기 눈이 부실 정도로 번쩍이는 별 모양 선글라스를 쓴 얼굴을 들이미니 움찔했다.
“아하하하하! 무슨 생각에 그리 골몰하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이곳에 온 건 나로선 예상치 못한 기회란 말이야.”
“…기회?”
“내가 보기에는 넌 나비 말고도 계약한 정령이 있지? 그것도 군주급으로.”
그녀의 물음에 나는 기회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절 당신의 후계자로 만들 생각입니까?”
내 추측에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미소 지었다.
“네가 그래준다면.”
정령술사는 극히 드문 존재다.
그것도 정령 군주와 계약한 정령술사는 요정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런데 정령 군주와 계약한 전설적인 정령술사가 내 스승이 되어준다는 건 다시 있을까 싶은 기회였다.
“저는 당신의 예지 속 후계자가 아닌데 괜찮습니까?”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 오히려 네가 내 연구를 이어받아 발전시켜 준다면 더 미래에 태어날 나와 너의 후계자가 내 꿈을 이룰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겠어?”
리즈벳은 읭크를 하며 말했다.
“내 후손인 네가 연구를 완성해 준다면 더 좋은 일이고.”
“저로 인해 당신의 예지 속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거나 당신의 안배가 어그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내 물음에 리즈벳은 키득거렸다.
“유안, 미래는 원래 고정되어 있지 않아. 사람의 운명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그건 지금 네가 내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증명된 셈이지.”
그도 그렇다.
이미 죽음이란 운명에서 벗어난 내 존재는 운명을 비트는 특이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애초에 내 계획은 너무나 무모했던 걸지도 몰라.”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에도 바위가 꿰뚫리고, 작은 프로그램 오류가 쌓여 돌이킬 수 없는 버그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미 리즈벳이 예지한 미래까지 가기에는 미세한 운명의 비틀림이 600년간 쌓였다.
그리고 앞으로 몇백 년은 더 비틀림이 쌓이게 될 터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헛될지도 모르는 미래의 계획보다는 눈앞의 나라는 존재가 더 귀한 기회일지도 몰랐다.
“좋습니다. 그럼 기꺼이 선조님의 가르침을 받아보죠.”
내 승낙에 리즈벳은 환하게 웃었다.
“아, 그 전에.”
나는 주머니에서 각인펜과 정령석을 꺼냈다.
“정령 소환할 건데 도와주시죠.”
불의 제전이 치러지는 의식의 공간은 실제이되, 실제가 아닌 신화가 서려 있는 곳이었다.
때문에 이곳의 물건을 가지고 나간다면 현실에도 가지고 나갈 수 있었다.
게다가 이곳만큼 불의 기운이 가득한 공간은 흔치 않았다.
내 말에 리즈벳은 웃으며 손뼉을 쳤다.
“아하하하하! 좋아. 최고의 정령과 계약할 수 있게 도와줄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