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불의 제전(祭典) (3)
내 요구를 들은 조르딕은 미소를 지었다.
“정보 의뢰는 원래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하지만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 그게 어스름 상회의 모토 아닙니까?”
“맞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돈이야말로 저희 상회의 모토죠. 2시간이면 할증이 많이 붙는다는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아무리 각국에 지부를 두고 있는 어스름 상회라고 해도 정보를 수집하는 데는 시간이 든다.
하지만 이미 가지고 있는 정보라면 그저 문서화하기만 해도 되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는다.
어스름 상회와 거래를 튼 난쟁이 일족은 몇 군데나 있다.
당연히 상대를 등쳐먹는 데에 그 누구보다 열심인 양아치 새끼인 어스름 상회답게 난쟁이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 놓았을 터였다.
내 대답에 조르딕은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에게 눈짓으로 지시하고는 말했다.
“기다리시는 동안 카탈로그를 살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지난 방문 때보다 귀한 물품들이 많이 입고되어 있습니다.”
표정을 감추는 게 능숙했지만 속으로 나를 얼마나 뜯어먹을지 고민하고 있는 게 빤히 보였다.
동시에 자기가 사람을 잘 봤다고 좋아하겠군.
뭐가 되었든 팔아치우면 실적이다.
특히 정보같이 팔아도 사라지지 않는 무형의 재물의 경우라면 말할 것도 없으리라.
“오빠, 오빠, 이거 어때요? 이거면 재미있는 걸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것 좀 보십쇼! 공간계 마법에 사용하기 좋은 촉매 보석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한번 봐도 괜찮을까요?”
나와 마찬가지로 마법으로 변장한 실루아와 제이드는 양쪽에서 내 소매를 당기며 카탈로그를 들이밀었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 돈은 있으니까. 내가 너희들한테 그 정도 투자도 못 할까?”
내 대답에 두 사람은 감동한 듯 날 바라봤다.
매일매일 내가 사들인 무역선이 항구로 돌아오고 있다.
아마 이 도시에서 제일 부자는 나 일 거다.
그러고 보면 아바스엘에게 줄 선물도 사야겠다.
최신 마법 연구 논문도 파니까 이걸로 살까?
그나저나 여긴 정말 안 파는 게 없네.
* * *
조르딕은 건수 잡았다고 각 잡고 날 탈탈 털어먹었다.
덕분에 금화가 상자째로 사라져 버렸다.
물론 그래 봤자 바하무트에게서 카드로 등쳐먹은 것의 일부였지만 말이다.
불의 제전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모았으니 천천히 읽어봐야지.
“그런데 너무 과소비하신 것 아닙니까?”
제이드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손에 쥐고 있는 마법서나 놓고 그런 소리 하지?”
손에 든 새로운 마법서도 내 돈으로 산 물건이었다.
“생각해 보니 현명한 소비였던 것 같습니다. 암, 그렇고말고요!”
제이드를 오래 알고 지낸 건 아니지만 왠지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는 것 같았다.
“위험하니까 걸으면서 책 읽지 마. 실루아 너도.”
나는 흥미진진하게 마법서에 집중하고 있던 두 사람의 책을 빼앗았다.
“아앗! 돌려주십쇼!”
“아앙! 돌려줘요!”
“돌아가서 천천히 읽으면 되잖아. 그러다 벽에 부딪힌다?”
두 사람은 마력파로 주변을 감지하고 있어서 괜찮다고 항의했다.
하지만 이러면 다시는 마법서를 안 구해다 주겠다고 협박하자 입술을 삐죽 내밀며 걸으면서 책 읽는 걸 그만뒀다.
내가 애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빨리 여관에 도착해서 마저 읽고 싶다고 중얼거리던 제이드가 갑자기 진지하게 표정이 바뀌었다.
제이드는 긴장한 듯 여관 안으로 들어가려던 나와 실루아를 막았다.
“안에 무시하지 못할 누군가가 있습니다. 나름 잘 숨겼지만 보통 실력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제이드의 말에 나는 살짝 긴장했다.
그의 말에 나도 감각을 일깨우며 집중했다.
그제야 사나운 마력파를 두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확실히 보통 사람이 아닌 듯 했다.
혹시 나를 노리고 온 아르카나의 암살자인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아르카나엔 수레바퀴라는 예언자가 있으니 내 위치를 예지한 걸지도 몰랐다.
“어디쯤 있어?”
“카운터 근처 벽에 붙어 있습니다.”
제이드의 말에 나는 거울을 꺼내 천천히 여관 1층 내부를 훑었다.
1층은 식당과 주점을 겸했기에 이른 저녁을 먹는 손님이 몇 명 있었다.
혹시 아는 얼굴이 있나 살펴보는데 익숙한 얼굴을 하나 발견했다.
“어?”
거울에 비친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환하게 웃으며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유, 유안.”
제이드가 당황해서 날 붙잡았지만 나는 작은 식탁에서 홀로 간소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사내에게 손을 흔들었다.
“엘!”
내 부름에 빵을 먹던 아바스엘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하하하! 오랜만이야. 빨라도 내일 온다고 했잖아?”
“내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혼자 먼저 와 버렸습니다. 이제 제 한 몸은 건사할 수 있습니다.”
아바스엘의 말에 나는 그의 마력을 훑어봤다.
제이드가 건물 밖에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위압적인 마력이 흘렀다.
내가 알려준 대로 무사히 미스텔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나는 나비의 힘으로 소리를 차단하며 장난스레 웃었다.
“풍기는 기세가 무서울 정도야. 마법을 되찾은 걸 진심으로 축하해, 슈프림 아바스엘. 이제 당당히 슈프림이라 불러도 괜찮겠지?”
내가 악수를 건네자 아바스엘은 힘차게 내 손을 마주잡았다.
“아하하하! 모두 주군 덕분입니다. 아직 새로 얻은 힘에 익숙해지지 못해서 저도 모르게 기세를 흘린 모양이군요.”
아바스엘은 은은히 풍기는 사나운 기세를 갈무리했다.
“그런데 주군께서도 못 본 사이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티 나나? 나도 꽤나 노력했거든.”
아바스엘과 헤어질 때만 해도 내게 마력이라고는 개미 눈물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름 어려서부터 익혀온 젊은 마법사 정도쯤 되었다.
밀도는 어지간한 대마법사보다 높았지만.
나와 제이드가 경계하던 이와 친근하게 대화하자 제이드는 어색하게 붙잡았던 내 소매를 놓았다.
“아, 소개할게. 이쪽은 내가 말했던 슈프림 메이지 아바스엘 파인만, 초열의 마도사라고 불리는 천재 마법사야.”
“허명일 뿐입니다.”
아바스엘은 겸손하게 살짝 웃어 보였다.
“이쪽은 당대 겨울나무의 현자, 제이드 하이트필.”
겨울나무의 현자라는 말에 놀란 아바스엘의 눈이 커졌다.
“겨울나무라면 설마 그 전설의?”
아바스엘은 최연소 슈프림 메이지에 오른 천재답게 마법계에 숨겨진 비밀도 다수 알고 있었다.
특히 위즐 백작과 소꿉친구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터였다.
그의 물음에 제이드는 싱긋 웃었다.
“모두 선대들의 업적일 뿐입니다. 저는 막 계승한 참이라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아하하하. 부족하다니, 그럴 리 있겠습니까. 고결한 현자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참 어린 제이드에게 정중히 인사한 아바스엘은 살짝 흥분했다.
마치 동화 속 존재를 실제로 본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나는 그런 그를 진정시키며 실루아를 소개했다.
“그리고 이 아이는 만병의 현자와 정제의 마도사의 둘째 딸, 실루아 필립.”
게오르와 제이올린의 별칭을 언급하자 아바스엘은 놀라서 실루아와 날 번갈아 바라봤다.
실루아가 왜 여기 있느냐는 듯한 시선에 나는 실루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간략하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는 잠시 말을 잃고 실루아를 보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실루아와 시선을 맞췄다.
“그렇구나, 네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둘째 딸이구나.”
아바스엘은 제이올린의 장례식에 참석했었지만 실루아를 보지 못했다.
그 당시의 실루아는 제이올린의 죽음으로 심한 충격을 받아 깊은 잠에 들어 있던 상태였다.
게오르는 제이올린과 다르게 아내의 두 제자를 신용하지 않았기에 실루아를 일부러 숨겼다.
아바스엘과 위즐백작은 제이올린에게나 소중한 제자였지, 게오르에게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고뭉치 악동들이었다.
실루아는 낯을 가리는지 내 뒤에 숨으며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아저씨가 어머니의 제자에요?”
“그래, 아저씨가 선생님의 제자야. 실루아에 대해서는 선생님께 편지로 많이 들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되었구나. 만나서 반가워.”
아바스엘이 조심스럽게 악수를 건네자 실루아도 조심스럽게 손을 마주 잡았다.
“반가워요.”
실루아의 인사에 아바스엘은 순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애써 웃었다.
“네게는 이야기해 줄 게 많이 있단다. 마법에는 관심이 있니?”
“네! 마법은 재미있어요!”
“그래, 그거 다행이구나.”
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야기는 천천히 하기로 하고, 오자마자 미안한데 날 위해서 일 하나를 해줘야겠어.”
어스름 상회에서 사 온 불의 제전에 대한 정보가 내 허리춤까지 올 정도로 많다.
게다가 그 정보들의 반은 마법적 요소들에 대한 거였다.
내일 벨트에게 가기 전까지 모든 정보를 훑고 최대한 분석해야 했다.
“오늘은 다 함께 야근이야.”
나도 이런 악덕 업주가 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휴가도 아바스엘이 오기 전까지라고 했잖아?
휴가가 끝났으면 일해야지.
* * *
“하아암~!”
나는 벨트의 은신처 바닥에 앉아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지난밤, 늦게까지 불의 제전에 사용되는 마법을 해석하고, 의식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분석하느라 잠이 부족했다.
덕분에 아바스엘과 제이드도 덩달아 피곤에 찌든 얼굴을 했다.
나야 사례 분석 위주로 했지만, 두 사람은 마법식을 완전히 분해하느라 머리를 혹사했으니 당연했다.
뭐, 적당히 하라고 말려도 기어이 밤을 새운 건 자기들이었다.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며 토론하는 게 기분 좋아 보이니 그냥 놔두기로 했다.
“도련님, 괜찮으시겠습니까?”
프레시아의 걱정에 나는 싱긋 웃었다.
그래도 날 걱정해 주는 건 프레시아밖에 없다.
길버트는 어제 프레시아와 호국공 아드게일의 대련을 너무 가까이서 직관하느라 탈진해 여관에 두고 왔다.
실루아가 간호하고 있으니 괜찮겠지.
“괜찮아. 난쟁이에게 적의나 악의만 없으면 문제없을 테니까.”
저 마법 변태들, 아니 믿음직한 마법사 둘이 철저하게 분석해 준 덕분에 불의 제전이 어떤 의식인지 알 수 있었다.
벨트도 난쟁이답지 않게 영악했다.
설마 날 태워 죽일 수도 있는 의식을 제대로 고지하지도 않고 치르게 하다니 말이다.
“그런데 재종조께선 왜 그렇게 절 보십니까?”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닷새간 벨트의 실험체가 된 아드게일은 계속 날 노려봤다.
“날 팔아버린 못된 재종손을 어떻게 혼을 내야 할까 고민 중이라 그렇다.”
“에이~! 재종조께서 농담도 참 잘하십니다. 재종조도 손해는 아니지 않습니까.”
벨트는 아드게일이 닷새간 도와주는 대가로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 주기로 약속했다.
그는 벨트에게 자신이 입을 갑옷 한 벌과 부하들에게 줄 검 30자루를 요구했고 벨트는 흔쾌히 요구를 들어주었다.
난쟁이의, 그것도 난쟁이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장인이라 인정받는 여섯 갈래 수염의 난쟁이가 만든 검은 한 자루, 한 자루가 천금을 줘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벨트가 말하길 길버트의 검도 세 갈래 수염의 난쟁이가 만든 검이라 했다.
“준비가 끝났다, 주인.”
벨트의 말에 나는 오른쪽 귀에 귀걸이를 찼다.
불의 제전은 타인의 간섭을 차단하지만 도구나 정령 등의 힘은 막지 않았다.
내가 찬 귀걸이는 바하무트의 내기로 얻은 보물고의 보물 중 하나였다.
이건 내 빈약한 마력을 대신해 줄 수 있는 보조 배터리, 아니 드래곤 하트 귀걸이 ‘코젯트의 연민’이었다.
“그럼 바로 시작하지.”
귀걸이를 차고 한 손에는 디바이스, 다른 손에는 정령총, 코일건을 들고 제단 위에 누웠다.
그러자 잠시 시야가 어두컴컴해지더니 어딘가로 내 의식이 빨려 들어갔다.
팡~!
“예이~!”
눈을 뜨니 머리에 생일 파티용 고깔모자를 쓰고, 별 모양 선글라스에 이상한 콧수염 장식을 한 이상한 여자가 작은 폭죽을 터트리며 이상한 춤을 추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