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불의 제전(祭典) (1)
내 말에 벨트의 표정이 굳었다.
“네 땅의 영지민이 된다는 건 당연히 네게 종속된다는 말이지 않나?”
그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영지민이란 표현이 거슬리면 동맹이라 해도 좋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친구로서 비플레이오드 일족을 대우하지.”
난쟁이는 강제로 굴복시킨다고 굴복하는 놈들이 아니다.
그랬으면 진작 드래곤들이 난쟁이를 노예로 잡아다 부리고 있었을 거다.
“동등한 친구라…. 미스릴은 당연히 땅의 주인인 네 것이겠지?”
“당연하지. 그 땅은 나도 나름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고.”
어지간한 남작령보다 작은 내 영지는 이 나라의 왕과 직접 거래를 해서 얻어낸 전리품이었다.
나는 왕후를 궁지에 몰 증거를 만들어줬고, 그 대가로 왕은 내게 영지를 하사했다.
옥새까지 찍힌 영지문서가 마법적 처리까지 되어 영토 대장에 기록되었다.
봉건 시대를 지탱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국제 표준 기록 마법, ‘이빌리비스크의 계약서’는 한번 작성되면 블록체인처럼 왕궁, 마탑, 천공섬 등 여러 곳에 동시에 기록된다.
따라서 왕이 물리고 싶다고 물릴 수도 없다.
나중에 미스릴이 나온다는 걸 알면 왕도 속이 꽤나 쓰릴 거다.
물론 알릴 생각은 없었지만.
“뭐, 나도 많은 걸 바라진 않아. 너희가 미스릴로 무엇을 만들든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단, 너희가 미스릴을 사용해 만든 모든 것은 내게만 팔아야 하고, 내 의뢰를 우선시해 줘야 해.”
당연히 가공비만 받고 일해 줘야겠지만 말이다.
가공비로 미스릴을 받는다면 그 미스릴은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
가공비로 미스릴을 살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도 참 순해졌다니까. 유약해 빠진 몸뚱이의 영향을 받는 건가?
내 말에 벨트는 심각해졌다.
“이건 나 혼자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족장님과 일족의 장로들과 대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 차기 족장으로 선택받은 너라면 그 정도 권한은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차기 족장으로 선택받은 건 어떻게 안 거지?”
벨트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그의 시선에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코르가 아레하와의 대결에서 너를 심판으로 세운 것만 봐도 족장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지 않나? 무려 검장의 칭호를 내건 대결이었잖아.”
사실 나도 모른다.
애당초 소설에 등장할 때는 이미 족장을 물려받은 직후였기에 이유를 때려 맞힌 것뿐이었다.
소설 속에서도 차기 족장으로 내정된 게 10년은 넘었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시점에선 이미 차기 족장으로 낙점되어 있겠지 싶어 찔러 봤다.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족장과 장로들과 대화하는 데 얼마나 걸리지? 10분이면 되나? 너희 일족에는 장거리 통신용 마도구가 있잖아.”
내 물음에 벨트는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바라봤지만 내가 대답하지 않을 걸 짐작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시간, 아니 2시간은 걸린다. 내가 의견을 보내도 족장님께서 장로들의 의견을 모을 시간이 필요하다. 잠시 기다려 줬으면 좋겠군.”
“그 정도야 기다리지.”
인간들이었으면 몇 날 며칠이 걸려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결단이 빠른 건 난쟁이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아, 기다리는 동안 몇 가지 의뢰를 맡겨도 되나? 재료와 설계도는 있어.”
나는 설계 도면과 미스릴과 아다만티움, 에테르스킬 주괴를 꺼냈다.
벨트는 검을 주로 만들었지만, 금속을 다루는 일이라면 모두 능했다.
“앗! 저도요!”
“저도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실루아와 제이드도 눈을 반짝이며 저마다의 설계도를 꺼냈다.
우리 셋의 설계도를 확인한 벨트는 흥미롭다는 듯이 수염을 매만졌다.
“모두 재미있는 설계군. 이따금 마법사의 제작 의뢰는 받아왔는데, 이 정도로 흥미가 동하는 설계들은 오랜만이야.”
깊게 집중하던 벨트는 내가 건넨 설계도 두 개만 챙겼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시 우리에게 되돌려줬다.
“이 두 설계를 제외하고 1, 2시간 안에 불가능해. 나 혼자선 설계도 하나를 구현하는 데 며칠씩 걸릴 만한 물건이야. 특히 그쪽 꼬마 아가씨의 인형은 설비가 없어서 몇 달이 걸려도 부족해.”
“히잉….”
실루아는 울상을 지었다.
“그럼 유안의 설계도는 1, 2시간 안에 가능합니까?”
제이드의 물음에 벨트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난쟁이라면 골치깨나 썩겠지만 내겐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 설계대로라면 마법 머스킷의 동력원 부분이 없는데, 제대로 된 것 맞나? 화약을 사용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쏠 때마다 따로 마법을 사용하는 건 비효율적일 텐데.”
내가 의뢰한 설계도 중 하나는 코일건의 개조였다.
“동력원이라면 괜찮아. 여기 있으니까.”
모습을 감추고 있던 누니를 꺼내자 벨트의 눈이 커졌다.
“정령?! 그것도 보통 정령이 아니군!”
역시 벨트도 정령을 다루다 보니 한눈에 알아봤다.
“어쩐지 아까부터 내 정령들이 무언가를 두려워하더니만, 초인의 기세에 짓눌려서가 아니었던가.”
벨트의 정령에도 관심이 갔지만 우선 중요한 것을 물어봤다.
“가격은?”
내 물음에 벨트는 히죽거리며 설계도에만 집중했다.
“재료도 그쪽이 준비했으니 값은 됐어. 대신 내가 설계를 조금 손봐도 괜찮나?”
난쟁이는 이래서 좋다.
돈보다는 자신의 창작 욕구를 가장 우선하니 욕구만 자극할 수 있으면 이렇게 값싸게 이용해 먹을 수 있었다.
반대로 욕구를 자극하지 못하면 비싼 값을 치러야 했지만.
“무게를 늘리거나 위력을 줄이는 방식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좋아! 정령 총이라, 아주 재미있겠군! 벌써부터 손이 근질거려!”
벨트는 우리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것처럼 설계도와 씨름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러다 일족과 연락하는 것도 깜박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 * *
“유안, 여기를 보십쇼. 여기서 마력이 이쪽으로 흐르면….”
제이드는 설계도를 꺼낸 김에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마법 장치를 설명했다.
극한(極寒)의 상황에서의 시간 동결에 대한 실험 장치였다.
실험 자체는 흥미로웠지만, 학술적인 목적 외에는 써먹기 힘들어 보였다.
이 연구가 꽃을 피우더라도 실용적인 활용에는 수백 년의 연구가 더 필요해 보일 정도로 아무래도 좋았다.
“시간 동결이면 원소계보다는 공간계 쪽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아니면 차라리 중력계 쪽이나.”
“중력계 마법 말씀이십니까? 그건 생각 못 했는데, 그럼…”
제이드는 내가 던져준 화두로 혼자 중얼거리며 노트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중얼거리는 제이드의 모습을 보며 나는 실루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저렇게 되지 마라.”
“네! 알겠어요! 아, 그런데 여기 이 부분을 미스릴로 할까요? 에테르스틸로 할까요? 저는….”
자신의 설계도를 신나서 설명하는 실루아를 보니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마법이라고는 모르는 순수한 아이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 오빠는 네가 사교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연구실 붙박이 폐인이 되지 않길 바란단다.
내가 실루아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을 무렵, 벨트가 자기 키보다 큰 라이플을 어깨에 걸쳐 메고 돌아왔다.
“완성된 거야?”
“그래.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 정령 총의 능력을 이야기해 주자면, 기존의 구리 대신 에테르스틸과 구리 합금으로 보다 전도력을 높이는 동시에….”
벨트는 정령 저격총의 스펙과 사용법, 그리고 보관 및 손질 방법을 알려주었다.
석궁에 구리 코일을 덧댄 기존의 주먹구구식 코일건과 달리 새로운 코일건의 형태는 훨씬 미래적인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바람의 정령의 힘으로 발사하는 공기압식 발사 방식으로 변경한 덕분에 석궁의 활 부분과 시위가 사라져 옆면이 깔끔해졌다.
대신 자동으로 재장전되도록 총 밑에 탄창이 붙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전체적으로 가벼워졌을 뿐만 아니라 무게 균형도 잘 맞아 총구를 겨누기 편해졌다.
이 정도면 굳이 나비에게 바람길을 만들게 하지 않아도 괜찮겠는데?
“이것들은 겸사겸사 생각나는 대로 만들어봤다.”
벨트가 건넨 건 라이플에 달 수 있는 전용 액세서리였다.
“그리고 이건 다른 설계도대로 만들었다. 그런데 뭐 하는 물건이냐?”
나는 벨트가 건넨 휴대전화같이 생긴 작은 디바이스를 받았다.
“말하자면 일종의 마법 계산기야. 자잘한 마법 연산을 대신 해주는 물건이지.”
사실 계산기보다는 자바스크립트 같은 프로그래밍 언어 입력 및 구동 기기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소형 컴퓨터와 비슷했다.
핵심이 되는 SoC(System on a Chip:스마트폰의 핵심 부품)를 어떻게 마법으로 구현할까 많이 고민했는데, 게오르의 연구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나저나 역시 난쟁이다.
다른 장인에게 맡겼다면 아무리 작게 만들어도 서버실을 마련해야 할 정도의 커다란 크기였을 텐데 제대로 만들어 주었다.
“대충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거지.”
나는 디바이스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내장되어 있는 마법 문자와 숫자로 마법 주문과 함수식을 입력했다.
그러자 허공에 간단한 마법진이 떠오르며 불꽃이 피어올랐다.
별 볼 일 없는 마법이었지만 제이드는 단번에 진가를 눈치챘다.
“무영창 마법 보조 도구군요! 이거라면 이중 영창이나 삼중 영창도 수월해지겠네요!”
숙달된 마법이라면 여러 개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 디바이스를 사용하면 숙달되지 않아도 충분히 사용 가능했다.
“그것뿐만 아니야. 이 디바이스의 진짜 중요한 점은 저장 능력이지. 제아무리 복잡한 마법이라도 한번 저장해 두면 단숨에 사용 가능해.”
물론 저장 용량을 초과한 대마법이라면 입력 자체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어떤 마법의 경우 주문의 구성만으로 책 열 권 분량이 넘기도 한다.
하지만 여러 카트리지에 나누어 저장한다면 사용이 불가능하지도 않다.
전용 카트리지도 난쟁이가 만들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작은 게 스크롤의 기능을 한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일회용이 아니라 다회용으로?!”
제이드가 놀라서 얼굴을 들이밀자 나는 그의 얼굴을 밀어내며 말했다.
“스크롤처럼 일반인도 사용할 수는 없어. 굳이 비유하자면 메모라이즈 마법과 유사하지. 허공에 띄운 마법을 사용하면 사라지니까. 물론 저장한 정보 값이 휘발되진 않지만.”
메모라이즈 마법은 마법을 사물에 저장하는 마법으로 휘발성 마법 각인을 말한다.
마도구처럼 주문이나 연산 없이 바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만, 한번 사용하면 마법이 사라져 버린다는 단점이 있다.
보통은 희귀한 마법 소재를 한 가지 마도구로 만들기 아깝다고 생각할 때 사용하는 마법으로, 주로 가난뱅이 마법사들이 사용했다.
재료가 있어도 마도구로 만들 돈이 없으니 마법으로 때우는 거다.
메모라이즈는 가난뱅이 마법으로 유명하지만, 놀랍게도 마법을 만든 사람은 기록의 현자 이빌리비스크였다.
“그래도 대단합니다! 아니! 그래서 대단한 겁니다!”
“대단한 건가?”
흥분하는 제이드와 달리 정작 디바이스를 만든 벨트는 뭐가 대단한지 이해하지 못해 시큰둥했다.
한눈에 봐도 흥미로운 정령 저격총과 달리 디바이스는 겉으로 보기에는 메모라이즈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으니 미적지근한 것도 당연했다.
“이건 시대를 초월한 혁신…!”
“자자, 진정하고. 그래서 연락은 어떻게 되었어?”
내 물음에 벨트는 깜짝 놀랐다.
“아, 맞다! 정령 저격총에 신경 쓰느라 말하는 걸 깜박했다.”
“일족의 중대사보다 정령 저격총이 더 중요했던 거냐?”
“크흠! 사, 사람이 살다 보면 깜박할 수도 있지!”
벨트는 정령 저격총에 정신을 팔았던 게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했다.
“우선 내가 너를 주군으로 모시는 건 전적으로 내 의사를 존중하겠다고 전해왔다.”
“오, 그래서?”
“고민했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내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줄 테니 부하가 되라니. 뭐 하는 인간인가 싶었지. 솔직히 미친놈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벨트의 말에 제이드와 실루아는 공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너희 둘에게는 부하가 되라고 한 적 없잖아!
물론 어느 정도 의도해서 행동하기는 했지만.
“망치를 두드리며 고민한 끝에 정했다. 네가 인의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부정을 저지르지 않으며, 신의 성실을 다하여 나를 대우한다면. 나는 너의 호의를 받아들여 이 삶이 다하는 날까지 네게 충성을 바치겠다.”
역시 난쟁이는 이래서 좋다.
결단이 빠르고 한번 결단을 내렸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벨트는 내게 한쪽 무릎을 꿇고 자신의 망치를 바쳤다.
나는 그 망치를 받아들고 그에게 새로운 망치인 베브로드론의 신물을 하사했다.
“네가 내게 더 이상 충성을 바치지 못할 때 반납해라. 네게 받은 망치를 돌려줄 테니.”
“그리하겠다, 나의 주인이여.”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