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호국공과 난쟁이 (3)
내가 대수롭지 않게 한 귀로 흘리자 호국공 아드게일은 얼굴을 붉히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런데 이 노인네, 보통 노인네가 아니라 생각했지만 초인으로 유명한 호국공이었구나.
역시 제이드, 가만히 있어도 온갖 사건 사고가 휘몰아치는 주인공다웠다.
그저 낚시하러 왔을 뿐인데 무려 호국공 아드게일이 낚일 줄이야.
호국공은 이 나라에 셋밖에 없는 공작이었다.
물론 공작이라 해도 그의 영지는 어지간한 백작령보다 작다.
“끄응, 젊은이. 왕족 사칭은 중죄일세.”
아드게일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가 왕자인 날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사교계에 입문하기는커녕 왕후에 의해 반쯤 유폐당한 상태였으니까.
오히려 왕궁에서 날 아는 사람을 세는 게 더 빠를 정도였다.
“자칭 호국공께서도 마찬가지로 왕족 사칭 아닙니까?”
그가 공작인 이유는 그가 무수히 많은 전공(戰功)을 세운 ‘왕족’이기 때문이었다.
즉, 실질적인 권력자가 아닌 명예가 높은 왕족에게 주어지는 서품상의 공작이었다.
결국 그는 내 친인척인 셈이다.
족보상으로는 내게 전쟁 비상금을 상속해 준 고조할아버지의 손자이니, 내 재종조(再從祖:할아버지의 사촌) 되시겠다.
내 대답을 생각지도 못했는지 아드게일은 무릎을 두드리며 박장대소를 했다.
“하하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 그렇지, 말뿐이라면 뭔들 되지 못할꼬. 한 방 먹었구나!”
물론 명예뿐인 공작이라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의 권세가 약하다 할 수 없다.
그는 어려서부터 군문에 투신하여 서부 사령부에 독자적인 지지 세력을 만들었다.
그의 처가인 자작가 또한 상당한 거부(巨富)로서 상계에 큰손이다.
힘과 돈, 그리고 핏줄이 한데 모였으니 훗날에는 대귀족 가문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역사상 공작이 된 왕족은 그 말고도 넷이나 더 있었으나, 그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공작가는 둘뿐이다.
그마저도 하나는 나중에 멸문지화에 휩싸일 테고 말이다.
“그래서, 자칭 재종조께선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호국공이라면 왕국 남서쪽 영지에 있을 텐데 왜 여기 있을까?
내 물음에 아드게일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며칠 전 새벽에 긴급 구조 요청이 와서 왔지. 잘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 도시에 드래곤이 쳐들어왔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원.”
드래곤? 아, 내가 한 짓.
나는 모르는 척 능청스레 물었다.
“그거라면 악마 숭배자들의 환영이라고 하던데요?”
“그러게 말이다. 오는 동안 도시라도 한번 들렀다면 연락받을 수 있었을 텐데, 워낙 급하게 오느라 아무것도 몰랐구나.”
과연, 어지간해서 영지나 서부 전선 인근을 잘 떠나지 않는다는 호국공이 동부 끝자락인 이곳에 온 게 이상하다 싶었다.
나비효과가 이런 식으로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대답한 아드게일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다, 자칭 내 재종손(再從孫:사촌의 손자)아. 그 술 정말 같이 마시면 안 되겠느냐? 우린 말하자면 공범이지 않으냐.”
아드게일은 능글맞게 날 왕족 사칭범으로 만들었다.
초인으로 이름난 기사라고 하지만, 결국에는 왕족으로서 닳고 닳은 노회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물론 왕실 조정에 득시글거리는 너구리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일 테지만.
“오호, 공명정대하기로 유명하신 자칭 재종조께서 협박을 다 하시고. 이거 놀랍습니다?”
“크흠, 협박이라니. 조금 더 완곡한 표현이 있지 않을까?”
“예를 들자면?”
“친인척 간의 온정?”
나와 아드게일은 동시에 웃었다.
“아하하하하! 온정이라니, 자칭 재종조께선 유머 감각이 뛰어나십니다.”
“아하하하하! 그렇지? 자칭 재종손이 알아주니 기분이 좋구나.”
아드게일은 웃으면서도 아닌 척 여전히 내 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초인으로 명성이 자자한 호국공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까 고민했다.
잠시 계산을 마친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군요. 같이 술을 마셔도 괜찮습니다.”
내 허락에 아드게일의 표정이 환해졌다.
“정말 괜찮겠나, 자칭 재종손? 계속 눈치 준 내가 할 소린 아니지만, 천루주는 제국의 황제도 일 년에 한 번 마실까 말까 한 술이라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으음, 자칭 재종조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역시 없던 일로….”
“아! 아닐세! 아무리 술이 귀해도 그렇지, 우리 인연만큼 귀하겠나? 그렇지? 우리 자칭 재종손?”
당황하는 그를 보며 나는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뭐,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솔직히 호국공과의 인연과 천루주를 저울질하면 당연히 천루주가 아까웠다.
저 노인네 구슬리는 거야 혓바닥 한두 번 놀리면 될 일이지만, 이 술은 언제 다시 구하게 될지 모를 명주 중의 명주인데 어딜 갖다 비비겠는가.
하지만 호국공의 노동력이라면 나름 비등하게 저울추가 맞을 것 같았다.
아니, 역시 술이 아까울지도.
고민되네.
“하지만 말입니다. 자칭 재종조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이 술이 여간 귀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고민을 털어버리고 원래 계산대로 호국공을 이용해 먹기로 했다.
흑흑, 내 피 같은 술이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그건 그렇지.”
“그러니 술값으로 자칭 재종조께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몇 가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내 부탁에 아드게일은 퍽 흥미롭다는 듯이 턱을 쓸어 만졌다.
“날 부려 먹겠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큰일들은 아닙니다. 자칭 재종조께서도 나름 즐거워하실 일이고, 이득도 있을 겁니다. 제 부탁을 들어보시고 정 마음에 안 든다면 안면박대하셔도 좋습니다. 그저 세간에는 호국공이란 위대한 기사가 어린애들 등이나 쳐 먹었다는 소문이 돌게 될 뿐이겠죠.”
내 노골적인 협박에 아드게일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그런 소문이 나도 자칭 재종조께선 상관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상관없지는 않겠지. 본인의 명성과 관련된 일이었으니 말이다.
“끄응, 상관없지는 않은데…. 그런데 부탁이란 게 도의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겠지?”
“물론이죠. 어떻게 감히 자칭이라지만 무려 호국공께 무례한 부탁을 하겠습니까? 그저 인연을 소중히 하고자 하는 마음의 연장선이지요.”
즉, 서로 계속 좋은 거래 상대가 되어주자는 말이었다.
마침 고정해 둔 낚싯대가 휘어지며 낚싯줄이 팽팽해졌다.
“어이쿠, 묵직한데?”
내 가녀린 팔로는 한 번에 들어 올릴 수 없을 듯했다.
나는 휠을 풀었다 당겼다 하며 물고기의 힘을 빼며 천천히 끌어당겼다.
내가 잡아 올린 물고기는 팔뚝만 한 크기의 돌돔이었다.
꽤 귀한 생선인데 이걸로 매운탕을 끓여도 맛있으려나? 크기도 크니 반은 회 칠까?
나는 식자재 창고에서 도마와 식칼을 꺼냈다.
아드게일은 마법검인 ‘달랑타의 5번 식칼’을 보며 감탄했다.
“세상에, 식칼을 보고 탐이 난 적은 또 처음이군.”
달랑타의 식칼 세트는 확실히 보기 드문 마법 검이었다.
심지어 달랑타 본인도 만들고 나선 칼이 너무 뛰어나 식칼 다루는 실력이 떨어진다며 잘 사용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저번에 요리할 때 식칼에 온갖 마법을 부여해 사용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보였지만.
“이건 아무리 사정사정하셔도 절대 안 줄 겁니다.”
내 단호한 말에 아드게일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내 청강검(淸綱劍)이 있는데 그깟 식칼을 달라 사정할 성싶으냐?”
청강검은 호국공의 애병으로 프레시아의 칠성검, 데미웨이의 귀도와도 견줄 수 있는 검이었다.
달랑타의 식칼은 아무래도 길이가 짧으니 손색이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자, 요리만 끝나면 바로 술병 열죠.”
내 말에 아드게일은 군침을 삼켰다. 열심히 생선 살을 발라내고 있는데 무언가 고민하던 제이드가 물었다.
“실례인 질문일 수도 있는데, 그 호국공이란 분이 유명한 분이십니까? 유안의 말을 들어보니 이분은 사칭범인 듯해서요.”
순진무구한 질문에 아드게일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고, 나는 그만 폭소를 하고 말았다.
“아하하하하! 우리 자칭 재종조께서 노력 좀 하셔야겠습니다!”
“저, 젊은이. 정말 날 모르나?”
아드게일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묻자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진한 소년은 제국 출신인 데다 여섯 살 때 예카트리체에게 거둬졌다.
그 이후로 바스타유 산맥에서 일생을 보냈으니 호국공을 알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하하하하하!”
“넌 그만 웃어!”
오늘을 호국공 굴욕의 날로 지정하고 매해 기념해도 좋을 정도로 유쾌한 날이었다.
* * *
나는 마지막 한 잔을 마시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과연 황제도 쉽사리 못 마신다는 술답게 굉장히 맛있었다.
이걸 무슨 맛이라 표현해야 할까. 상큼 달콤하면서 쌉싸름하고, 시원하면서도 따듯한, 오묘한 느낌이었다.
“이 정도로 잡았으면 당분간 생선은 질리도록 먹을 수 있겠네.”
내 등 뒤에 놓인 수조에는 각종 생선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제이드는 어느새 낚시를 뒤로하고 내가 만든 뫼니에르에 새로운 와인 한 병을 따며 입맛을 다셨다.
이 녀석도 완전히 술꾼이 다됐군.
“바다 생선은 처음인데, 짭짤한 게 민물생선보다 맛있네요.”
내 옆에서 낚시하던 아드게일은 나보다 물고기를 못 잡은 게 분한 모양이었다.
날 이겨 보겠다고 파도치는 바위 위에 올라서서 바지춤을 적신 채로 낚싯대를 휘둘렀다.
“음, 저 영감님한테 사실 반쯤 물의 정령의 힘으로 잡은 거라고 말해줘야 하나?”
“괜찮지 않을까요? 저분도 마력파로 물고기 위치를 탐지하시는 것 같던데.”
도긴개긴이란 소리였다.
“아, 한잔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내가 술을 거부하자 제이드는 어디 아프냐고 물어왔다.
은근히 무례한 녀석이다.
천루주의 마지막 여운을 느끼고 있는데, 하늘을 가르고 작은 종이 새가 내게로 날아왔다.
내 손에 내려앉은 종이 새는 제 몸을 펼치더니 작은 쪽지로 변했다.
제이드가 관심을 보이자, 나는 마법으로 쪽지를 불태우며 말했다.
“슬라반 서커스가 이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쯤 질리빌에 도착한다고 하네.”
아바스엘이 보낸 서신이었다.
아바스엘 혼자 오는 게 아니라 더 늦을 줄 알았는데 짧은 휴가가 되겠군.
“그렇습니까? 그거 기대되는군요.”
제이드는 이야기로만 듣던 대마법사 아바스엘을 만날 생각에 설레는지 눈을 반짝였다.
나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드게일에게 외쳤다.
“자칭 재종조 어르신! 이제 그만하고 저와 약속한 일이나 하러 가시죠!”
내 부름에 아드게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몇 마리만 더 잡으면 자칭 재종손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만 더 하면 안 되겠나?”
검을 든 사람치고 승부욕이 없는 사람이 없다지만, 초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답게 지독하게 지는 걸 싫어한다는 게 사실이었나 보다.
“이미 많이 잡았습니다. 물고기 더 잡아서 뭐 하려고요? 먹지도 않을 걸 잡는 건 낭비입니다. 아니면 뭡니까? 호국공씩이나 되시는 분이 저잣거리에 내다 팔 생각입니까?"
“크흠! 자네도 많이 잡지 않았나.”
“저는 다 먹을 겁니다. 그래서 손질까지 다 해놓지 않았습니까.”
내 말에도 노인네는 미련이 남는지 낚싯대를 놓지 못했다.
“계속 거기 계실 거면 놓고 갈 겁니다. 기껏 난쟁이를 만나러 가는데 싫다면야….”
“뭐라고?! 난쟁이? 난쟁이가 이 도시에 있다고? 그런 건 진작 말했어야지!”
아드게일은 재빨리 정리하고 고기가 담긴 수조를 챙겼다.
“어서 가세! 무엇을 도와줄까?”
갑자기 의욕이 넘쳐 보이는 그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끝까지 그렇게 의욕적이셨으면 좋겠군요.”
지금부터 찾아갈 난쟁이는 만만치 않은 녀석이었다.
뭐, 호국공이면 죽진 않겠지.
설마 초인씩이나 되는데 죽겠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