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호국공과 난쟁이 (2)
나는 낚싯바늘에 미끼를 끼우고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웠다.
생선 한 마리 잡아서 매운탕에 한잔해야지.
“드디어 해방이구만.”
자하룡 바하무트와 사흘에 걸친 내기가 끝난 다음 날부터 그녀는 원류를 비롯해 각종 파생 룰의 모든 아류 차투랑가로 도전해 왔다.
처음에는 내기로 얻을 것도 다 얻었으니 접대나 해주려 했지만, 오래 살아온 연륜은 속일 수 없었다.
그녀는 날 무섭게 노려보며 절대 봐주지 말라고 부탁해 왔다.
과연 1300년에 걸쳐 연마했다는 것이 거짓말은 아닌지, 바하무트는 내 기준으로는 꽤나 강호였다.
다만 의외로 그렇게까지 상대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나도 몰랐는데, 아무래도 나는 체스류의 게임을 잘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 세계 사람들이 더럽게 못하는 거든가.
개인적으로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믿음이 갔다.
바하무트는 연달아 내게 패배하고는 눈물을 머금고 수련을 해서 날 꼭 이기겠노라 선언했다.
그러고는 태양신 교단이 악마 숭배 집단인 새벽별 교단을 토벌하는 걸 구경하러 갔다.
“하하, 어제는 고생 많으셨습니다. 드래곤과 친구가 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더군요.”
내 옆에 나를 따라 낚싯대를 드리운 제이드는 키득거렸다.
제이드는 내 호위로서 내 옆에 있었다.
평화로운 휴양 도시에서 무슨 일이나 있을까 싶어 일행들에게 마음껏 놀라고 돈을 쥐여 줬는데도, 왜인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돌아가며 내 호위를 자처했다.
오늘은 제이드의 차례였다.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기껏 휴가를 줬으니까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놀아도 되는데 말이야.”
다시 언제 휴가를 줄 수 있을지 모르는 이상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게 좋았다.
내 말에 제이드는 싱긋 웃었다.
“저는 지금 충분히 즐겁습니다. 그런데 술은 안 꺼내십니까?”
제이드가 입맛을 다시며 은근히 묻자 나는 낄낄 웃었다.
“호위는 핑계고 진짜 목적은 이거였구만?”
내가 악마 숭배자 백작의 술 창고에서 챙겨온 이름난 명주를 꺼내자 제이드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하하하, 겸사겸사입니다.”
소설에서는 딱히 술은 입에 대지 않았던 녀석이 술고래가 되어버렸다.
나야 술친구가 생겨서 좋지만.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척이 느껴지며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크흠! 이거 참, 선객이 있었구만.”
한눈에 봐도 다부진 몸의 노인이 밀짚모자를 쓰고 낚싯대를 어깨에 걸치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 * *
질리빌에 도착한 호국공 아드게일은 부하들을 시켜 자신의 영지와 서부 국경 사령부에 연락을 시켰다.
고령의 나이로 반쯤 은퇴한 그였지만, 왕국에 다섯밖에 없다 알려진 초인으로서 국가 방위에 손을 보태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영지를 벗어나 휴양을 한다니 사람들의 걱정을 사지 않게 연락을 해둬야 했다.
영지야 맏아들이 운영한 지 오래되었으니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서부 국경 사령부는 당분간 여차할 때 아드게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테니 미리 전달하지 않으면 곤란할 수도 있었다.
서부, 그것도 서남부에 국경을 맞댄 왕국은 건국 초기부터 사이가 좋지 않은 적대국이라 이따금씩 소규모 전투나 신경전이 벌어지곤 했다.
“슬슬 내게 의지하는 것도 졸업해야지. 별장으로 가자꾸나.”
호국공쯤 되면 왕국 이곳저곳에 별장 몇 개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특히 질리빌의 별장은 왕실에서 공을 치하하며 하사한 저택이었다.
그런 만큼 고위 귀족들이 모이는 고급 저택 거리의 건물들 중에서도 유달리 크고 화려했다.
별장에 도달하자 대문 밖에서 질리빌의 시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아드게일을 환영했다.
질리빌은 국왕 직할 도시였기에 영주가 아닌 왕실에서 파견한 관찰사(觀察使)와 도시의 유력 토호(土豪) 가문 출신의 시장이 힘을 합쳐 다스렸다.
“질리빌에 오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호국공!”
일반적인 휴양 목적으로 도시에 왔어도 찾아왔을 테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보낸 긴급 구원 요청 때문에 한달음에 달려온 거라 더더욱 공손했다.
비록 사실 관계를 파악하고 바로 정정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아드게일이 이곳에 오게 된 건 시장의 탓이었다.
“저의 미흡함으로 공사가 다망하신 호국공 저하의 귀한 시간을 낭….”
“되었네. 도시가 무사했다면 된 것이지.”
시장의 말을 자른 아드게일은 길을 막지 말라 고갯짓했다.
“강행군으로 피곤하군. 잠시 휴양이나 즐길 생각인데, 자네의 허락이 필요한가?”
“아닙니다! 제가 뭐라고 감히 호국공 저하의 휴식에 왈가왈부하겠습니까! 그저, 환여….”
“아! 맞다.”
은근슬쩍 자신을 초대해 연줄을 만들려는 시장의 말을 자른 아드게일은 무표정하게 시장을 바라봤다.
“나는 그저 혼자 푹 쉬고 싶을 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이번 일로 불이익을 주거나 하진 않을 테니 괜히 귀찮게 하지 말라는 반쯤 협박의 말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시장은 늙은 몸에서 자연스럽게 흐르는 오라에 찔끔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편히 쉬시는 중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찾아 주십시오.”
시장의 마지막 미련에 아드게일은 피식 웃었다.
“필요한 게 있다면 그리하지. 지금은 잠 좀 자야겠어.”
별장 안으로 들어간 노령의 기사는 하루를 꼬박 잠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오랜만에 정무와 전투에서 벗어나 푹 쉬었다.
하지만 휴식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된 휴식에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아드게일은 부하들에게 자유를 주고 가벼운 차림으로 갈아입은 뒤 낚싯대를 챙겼다.
수많은 전장을 돌아다니던 노회한 기사는 수렵의 손맛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낚시를 오랜 취미로 삼았다.
“따르겠습니다.”
“예끼! 귀찮게 따라다니지 말고 썩 꺼져!”
호위랍시고 뒤따라오려는 부하들의 엉덩이를 걷어차 준 아드게일은 별장 관리인에게 인적 드물고 낚시하기 좋은 자리를 확인했다.
오랜만에 즐기는 여유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관리인이 알려준 곳으로 향했다.
“이런, 선객인가.”
목이 좋은 자리는 빨리 사라지기 마련이었으니 선객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두 사람이 젊다 못해 어려 보이기까지 한 소년들이라는 게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저들의 나이 때는 보통 뛰어노는 것을 선호하지, 낚시같이 정적인 취미를 갖기 쉽지 않았다.
그냥 별일도 다 있구나 하고 다른 자리로 가려는데, 금발의 유약해 보이는 인상의 소년이 술병을 하나 꺼냈다.
먼 거리에서 본 아드게일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년이 손에 든 술병은 제국의 황제도 쉽사리 마시지 못한다는 천하명주로 이름 높은 천루주(天淚酒)였다.
늙은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인기척을 내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크흠! 이거 참, 선객이 있었구만.”
그의 뺨은 부끄러움으로 살짝 붉어졌다.
* * *
갑자기 등장한 웬 노인네는 홀린 듯 내 손에 들린 술에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내가 슬쩍 술병을 오른쪽으로 옮기자 노인네의 고개도 따라 움직였다. 이게 목적이구만.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건 조금 그러니 다음에 마실까?”
내 말에 제이드는 그게 무슨 어울리지 않는 개소리냐는 듯이 날 바라봤고, 이름 모를 노인네는 충격을 받은 듯 날 바라봤다.
“하핫! 농담~!”
내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자 다부진 육신의 노인네도 순간 정신을 차렸는지 얼굴이 빨개지며 헛기침을 했다.
“허흠! 크흠! …젊은이들, 실례가 안 된다면 옆에 낚싯대를 놔도 괜찮겠나?”
정중한 그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었다.
투박한 손에 굳은살 깊이 박인 손바닥, 그을린 얼굴, 나이에 맞지 않게 건장한 육체.
기사 출신, 아니 아직까지 현역 기사군.
은퇴한 지 얼마 안 된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추측한 나이가 맞는다면 며칠만 노력을 게을리 해도 저런 체격을 유지할 수 없다.
하지만 기사치고 입고 있는 옷의 질이 너무 좋다.
꾸밈은 없지만 값비싼 비단으로 보건대 신분은 결코 낮지 않다.
신분제 사회에서 실력으로 신분을 높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이 땅을 제가 산 것도 아니니 편하신 대로 하시죠, 어르신.”
“허허허, 고맙구나.”
내 허락에 노령의 기사는 소탈하게 웃으며 내 옆에 덩치에 맞지 않는 접이식 의자를 펼쳤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내 손의 술병에 시선이 갔다.
어지간히 내 술이 탐나는 모양이었다.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무의식중에 흘리는 것인지. 노령의 기사에게서 은은하면서도 패도적인 기파(氣波)가 느껴졌다.
제이드도 모르는 걸 보면 노인 스스로도 모르게 흘리는 것 같았다.
나도 정령들의 감각을 공유하지 않았다면 결코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미세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낚시 같은 느긋한 취미라니. 특이하군.”
“특이할 게 뭐 있습니까. 낚시도 결국 수렵 활동인데요. 수렵은 나름 고급 취미 아닙니까.”
내 대답에 그는 무릎을 치며 웃었다.
“수렵이라! 어허허허! 맞지, 맞아! 낚시도 일종의 사냥이지. 요즘 젊은 것들은 그걸 모른단 말이야.”
마치 자식들이나 아랫사람들은 낚시 취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투였다.
왠지 노인네가 말하는 젊은 것들은 전혀 젊지 않을 것 같았다.
“젊은이랑은 말이 통할 것 같구만.”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노령의 나이에 높은 경지에 오른 현역 기사라.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일곱 사람 정도인가?
호국공 아드게일, 도살자 파브로드, 일기당천 데일호르그, 갑옷 분쇄자 토일, 흡혈검 마르콘티느, 서부국경 사령관 제르무악, 대사범 밀리라르.
모두 전 세대의 유명한 강자들이었지만 일곱 명 중 둘은 소설에서 이름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엑스트라거나 이름만 언급되는 수준이었다.
그들 중 그나마 비중이랄 게 있다면 대사범 밀리라르 정도였나?
그나마도 대사범은 천하십검 중 한 사람이자 무국구왕(無國九王) 중 한 사람인 검왕(劍王)의 제자로서 옆에 있는 엑스트라였다.
참고로 소설에서도 나오지 않는 이들까지 내가 아는 이유는 아퀼라의 마력회로에 데인 이후 소설 내용만 믿지 않고 여러 정보를 수집한 덕분이었다.
그래 봤자 시종인 헤리온이 알 수 있는 대중적인 정보들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뭐, 이 노인네가 누구든 내 알 바인가? 나랑은 아무 상관 없었다.
“크흠, 그런데 그 술은 언제쯤 마실 겐가?”
노인네는 대뜸 술을 탐하는 게 부끄러웠는지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그 술을 달라는 게 아니라! 그저 술에는 적정한 온도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 온도를 잃기 전에 마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시답지 않은 변명에 나는 피식 웃으며 근처 돌멩이를 주워 땅바닥을 긁었다.
간단히 그려진 마법진 위에 술병을 올려놓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마법진이 옅게 빛나며 냉기를 내뿜었다.
오래 마법을 지속하려면 마석을 갈아 넣은 먹물 등의 촉매가 필요했지만, 지금처럼 잠시 마법을 유지할 때는 굳이 촉매까지는 필요 없었다.
마법 주문도 휘발되어 사라지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마법이 발현되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결국 마법은 마력으로 발동되는 현상이었으니, 땅에 그어놓은 마법식은 언어보다 조금 더 오래가는 마법 주문이라 할 수 있었다.
“오, 젊은이. 마법사였는가?”
“스스로 마법사라 칭할 정도는 안 됩니다. 그저 술의 온도를 유지할 수준이죠.”
당장 마실 생각은 없다는 내 말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그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처음 보는 노인네가 양심도 없지, 내 귀한 술을 탐내다니.
“혹시 안주는 필요 없나? 내 당장 사 올 수 있는데.”
“지금 안주를 잡으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매운탕을 끓일 거다. 재료도 다 준비해 놓았다.
“그래도 좋은 술은 좋은 안주와….”
“그런 안주를 찾을 거였으면 지금 여기 안 있고 고급 레스토랑에 있었겠죠.”
“그, 그럼 술잔이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아공간에서 술잔 두 개를 꺼냈다.
“술을 가져왔는데 안 가져왔겠습니까? 당연히 챙겨 왔습니다. 물론 사람 수대로.”
“으윽! 그럼 거래! 거래를 하세! 자네 술을 나눠주면 내가 귀한 술 열 병을 주겠네!”
“응, 천루주 한 잔만도 못한 술은 백 병도 필요 없어요.”
내 철벽과도 같은 거절에 노령의 기사는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방법까지는 사용하지 않으려 했는데! 나는 이 나라의 공작! 호국공이다!”
“저런, 그럼 저는 이 나라의 왕자입니다.”
응~ 호국공이고 나발이고 안 줄 거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