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검령(劍靈)
프레시아는 천천히 마력 연공에 들어갔다.
자연의 기운을 받고 거르던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고 바하무트와의 내기를 떠올렸다.
* * *
바하무트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나와 내기를 하겠다고?”
“네, 그렇습니다!”
프레시아는 뺨을 붉히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건국 신화의 주연 중 하나인 자하룡 바하무트는 아직 어린 그녀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내기는 언제나 환영이야.”
바하무트의 말에 프레시아는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하무트와 내기를 하다니.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좋아, 기사라면 마침 최고의 내기 상대가 있지.”
바하무트의 내기는 한 가지.
심상 세계 속의 한 검객과 싸워 이길 것.
싸움의 방식은 그 검객이 정할 것이란 말과 함께 바하무트는 프레시아를 심상 세계로 밀어 넣어버렸다.
환한 빛무리 속에서 정신이 든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끝을 모르는 초원.
그리고 초원의 중앙에 꽂혀 있는 섬뜩할 만큼 날이 선 검 한 자루.
프레시아는 언제든지 검을 뽑을 준비를 하며 자신의 상대는 어디 있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때 검에서 요사한 기운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더니, 연기가 뭉쳐 더벅머리의 청년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바하무트가 날 내기 상대로 소환한 건 오랜만이군. 꼬마야, 네가 내 상대더냐?”
투덜거리는 더벅머리의 물음에 프레시아는 긴장하며 검을 뽑았다.
“예, 그렇습니다. 저는 프레시아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프레시아는 입이 말라가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그의 등장부터 형형할 수 없는 압박감이 전신을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은 과거, 그녀의 스승인 호레이즌에게서밖에 느껴보지 못했다.
더벅머리 청년은 들판에 꽂힌 검을 뽑아 어깨에 걸치며 고민했다.
“음, 내가 누구인가라. 심오한 질문이군. 지금의 나는 이 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지. 흔히 말하는 도깨비, 혹은 검의 정령. 그도 아니면 빙의령인 리빙 웨폰, 에고 소드, 부르는 명칭은 천차만별이지만…. 그나마 알 법한 이름이라면 ‘검령(劍靈)’정도인가?”
검령의 자기소개에 프레시아는 깜짝 놀랐다.
“검령, 알 더그플렛!?”
검령은 먼 과거, 천하십검으로 이름 높은 기사였으나 자신을 배신해 죽인 주군을 원망해 언데드로 일어난 존재.
그는 평범한 데스 나이트를 초월한 하나의 재해였다.
그런 그가 지금 데스 나이트로서의 육신을 버리고 한 자루의 검이 되어 있었다.
프레시아의 경악성에 더벅머리는 박장대소를 했다.
“으하하하! 아직 세상에 내 이름이 잊히진 않은 모양이군. 비극이로소이다, 참으로 비극이야!”
한참을 웃은 검령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이젠 옛날처럼 이지(理智)를 상실하고 학살을 벌이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이미 내가 섬기던 왕과 나라는 내 손에 사그라졌으니 원한 따위 더 남아 있을 리 만무하지.”
검령 더그플렛의 언데드화는 언데드 재해로 손꼽히는 재앙이었다.
그의 손에 작은 나라가 몰살당했던 까닭에 태양의 현자의 리치화 사건 이전까지 최악의 언데드화 사건이라 불렸다.
“정확히는 비델에게 된통 처맞고 정신 차린 지는 꽤 되었어. 뭐, 바하무트 그 도마뱀 녀석만 없었어도 내가 비델에게 당하지도 않았겠지만 말이야. 막말로 온갖 상극이 되는 무기로 무장한 녀석을 내가 어떻게 이기냐 말이야. 비델 그 녀석은 특히 그 망할 갑옷이 사기였단 말이지.”
장난스럽게 툴툴거리는 검령의 말에도 프레시아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여전히 그의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프레시아가 검령의 기세를 이겨내고 투지를 다지자 검령은 피식 웃었다.
“하핫! 어리다고 무시했는데 정정해야겠군. 나쁘지 않아.”
그는 나쁘지 않다고는 했지만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한눈에 봐도 성장기의 소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세에 잡아먹히지 않고 대항하는 모습은 감탄만이 나왔다.
검령의 생전과 사후를 통틀어 프레시아 같은 천재는 처음이었다.
“내기를 하려면 일단 실력을 확인해 봐야겠지? 전력으로 와봐.”
검령이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도발하자 프레시아는 심호흡하며 전신의 기세를 끌어올렸다.
눈앞의 상대는 초인을 초월한 희대의 괴물이었다.
한 치의 방심도 용납할 수 없었다.
“갑니다!”
콰아아아아-!
칠성검에 검강이 맺히는 순간, 서로 달려들어 프레시아와 검령의 검이 맞부딪쳤다.
단 일합에 심상 세계가 요동치며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녹아내렸다.
프레시아는 순간 반보(半步) 물러났다가 수십 번의 연격을 날렸다.
검령은 프레시아의 검격을 흘려보내지 않고 일부러 맞부딪치며 분쇄했다.
그때, 바하무트가 준비한 마법이 깨지려 했다. 검령은 검을 흔들어 힘을 분산시킨 뒤 크게 물러났다.
그러자 마치 언제 격돌이 있었냐는 듯이 백일몽처럼 들판이 원상 복구되었고, 검령과 프레시아는 처음 있던 자리에 서 있었다.
“허참, 그 나이에 대단하군. 지금 몇 살이지?”
“몇 개월 뒤면 열여섯이 됩니다.”
“큭큭큭! 누가 길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른쯤 되면 이 세상에 적수가 없겠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세상은 넓고, 너는 아직 애송이일 뿐이다. 꼬마야.”
단호히 말한 검령은 프레시아를 평가하듯 바라봤다.
“꼬마야, 너는 네가 초인이라 생각하느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약간 뜸을 들인 프레시아의 대답에 검령은 혼을 내듯 타일렀다.
“어리석구나! 스스로 그리 생각하지 않으면서 어찌 스스로를 초인이라 칭하더냐!”
검령의 외침에 프레시아는 움찔했다.
그의 말처럼 무의식중에 아직 자신이 초인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었다.
“만인은 너의 무용(武勇)을 보면 네가 초인이라 칭송할 것이다. 하지만 너는 초인이 아니다, 왜 그런 줄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네가 그걸 모르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선문답에 프레시아는 당황했다.
바스타유 산맥에서의 경험은 분명 그녀가 초인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검령은 피식 웃었다.
“네 스승은 필히 나와 비등한 강자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네가 아무리 천재라도 벌써 초인의 벽을 두드리고 있을 순 없을 터. 하지만 꼬마야, 너는 이미 타인에게 가르침을 받을 시기가 지나 버렸구나.”
그의 말에 프레시아는 자신의 스승을 떠올렸다.
그녀가 기사가 되기 직전, 전력을 다한 그녀의 실력을 확인했던 호레이즌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었다.
‘생각보다 너무 빠른데? 뭐, 이제 네가 그토록 원하던 기사가 되었으니 내 도움 없이 스스로의 길을 나아가 보거라.’
처음에는 여성의 몸으로 다른 이들 보다 빨리 기사가 된 것을 말하는 줄 알았다.
스스로의 길이란 명망 높은 스승의 권위에 매달리지 말고 기사로서 자리를 확립하라는 의미로 이해했었다.
하지만 지금 검령의 말을 듣자 어쩌면 호레이즌은 다른 의미로 말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건 내가 네게 가르침을 내릴 수도 없다는 말이다. 왜냐, 너는 네 스스로를 확립하여야 하기 때문이지. 섣부른 가르침은 네게 독이 될 테니까.”
검령의 눈이 요사스럽게 번뜩였다.
“그러나 걱정 말거라. 내가 죽고 나서 얻은 별 볼 일 없는 능력으로 보건대, 앞으로 나를 비롯한 네 앞을 막는 무수히 많은 적들이 네 스승이 되어줄 것이다. 네가 피하지만 않는다면 전사의 숙명처럼 투쟁의 소용돌이가 네게 몰아칠 터이니.”
격이 높은 언데드는 때때로 타인의 삶과 죽음의 사이를 훔쳐보기도 했다.
위대한 선지자 노릇은 할 수 없었지만 어설픈 예언가 노릇은 가능했다.
“생각하길 멈추지 말거라. 생각하고 또 생각하거라, 답은 네 안에 있을지니.”
그렇게 말한 검령은 피식 웃었다.
“나도 참 흔해빠진 말을 조언이랍시고 해주고 있군. 내가 조금 수다스럽더라도 이해해 주길 바란다, 꼬마야. 다 죽어 나빠진 얼간이가 나라지만 최근에는 바하무트, 그 망할 도마뱀 외에는 대화 상대가 없어서 말이지.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니 말이 많아지는 것도 당연한 일 아니겠나.”
유쾌하게 웃으며 수다스럽게 떠든 검령은 잠시 고민했다.
“어디 보자, 어린 후배를 위하여 몇 번이고 생사결을 벌여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그건 망할 도마뱀이 허락지 않겠군. 바하무트 녀석은 은근 공정한 면이 있어서 상대방이 절대 이기지 못할 내기는 하지 않거든. 그러면서도 비겁하게 자신이 이길 수준을 내기로 제시하지.”
물론 상대가 이길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만으로도 드래곤치고 인성이 바르다 할 수 있었다.
검령은 지금의 프레시아로는 생사결에선 절대 자신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프레시아가 잘만 한다면 이길 수 있을 방법을 생각해 냈다.
“좋아, 정했다. 내기 종목은 수건 빼앗기로 하자.”
검령의 말과 동시에 허공에 둘의 손에 수건이 쥐어졌다.
“사용은 검기까지로 제한하고,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허리춤의 수건을 빼앗을 것. 간단하지?”
“이해했습니다.”
프레시아의 동의에 검령은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검령과 프레시아는 상대의 수건을 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넓은 들판 위에 수십 개의 잔상이 맺히며 초고속 전투를 벌였다.
* * *
프레시아는 명상을 마치고 차분히 눈을 다시 떴다.
검령과의 수건 빼앗기에서 결국 그녀는 졌고, 자신의 내기 조건으로 다시 한번 검령과의 재대결을 선택했다.
재대결에서는 기어코 수건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그 후, 검령에게 진검승부를 부탁해 전력으로 맞부딪쳤다.
하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검령은 낄낄거리며 오랜만에 재미있었다며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다시 보자는 말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바하무트는 프레시아의 승리라 말했으나 그녀는 자신의 승리를 인정할 수 없었다.
“후우… 내가 초인이 아닌 이유라.”
프레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민했다.
눈을 뜬 프레시아는 낚싯대와 어망을 챙기는 유안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필하겠습니다.”
프레시아의 말에 유안은 손을 내저었다.
“됐어, 어디 위험한 곳도 아닌데. 아바스엘과 합류할 때까진 모두 휴가야. 모처럼의 휴양도시니 다들 마음껏 놀아.”
유안의 선언에 프레시아는 고개를 저으려 했다. 하지만 유안은 단호히 말했다.
“특히 프레시아, 넌 무조건 휴가야. 바하무트와 한 내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손에 잡히는 거지?”
그의 물음에 프레시아는 순간 움찔했다.
그녀의 주군인 가냘픈 소년은 때때로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스스로 생각하라는 습관을 들이라는 조언을 먼저 한 것도 눈앞의 소년이었다.
“하지만 언제 잡힐지도 모르는 걸로 의무를 방기할 순 없습니다.”
프레시아의 단호한 거절에 유안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길버트였으면 다른 데 정신이 사로잡혀서 호위가 되겠냐고 혼을 냈을 텐데 말이야. 넌 정신이 다른 데 가 있어도 잘할 것 같아 뭐라고 할 수 없구만.”
“너무합니다!”
갑자기 불똥이 튄 길버트는 울상을 지었다.
유안은 그런 길버트를 보며 낄낄 웃고는 프레시아에게 말했다.
“조급해할 건 없어. 네 안의 화두를 꼭 당장 손에 잡을 필요도 없고. 그저 어렴풋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실마리만 잡아도 충분하니 고민해 봐.”
그렇게 말한 유안은 피식 웃었다.
“아, 이러면 딱히 휴가는 아니게 되나?”
기사에게 자기 단련과 수양은 업무 중 하나였다.
“나도 같이 방에서 푹 쉴까?”
유안의 물음에 프레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치사하십니다. 그리 말씀하시면 따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녀의 웃음에 유안은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다른 데서 웃으면 혼난다?”
그의 장난스러운 웃음에 그녀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