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드래곤과 내기 (7)
차투랑가의 룰은 기본적으로 체스와 같다.
졸병과 왕이 있고, 64칸의 게임판위에서 게임이 진행되며 말의 움직임도 거의 동일했다.
‘비숍’ 대신 ‘전투 코끼리’가 있는 정도?
그러나 마법 차투랑가는 룰과 게임 말이 다소 달랐다.
아니, 그냥 다른 수준이 아니라 이질적이라 해도 좋았다.
초기 마법 차투랑가는 그저 염동 마법으로 말을 움직일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게임 말이 인형처럼 검을 휘두르기도 하며 보는 맛이 생겼다.
말의 움직임에 생동감이 생기자 마법사들이 이런저런 기믹을 더하더니, 여러 전략적 요소도 추가하기 시작했다.
“졸병 계급에는 궁병, 창병, 방패병이 있네.”
게임 말에는 각각의 병과가 있고, 병과마다 공격력과 생명력이 부여되었다.
졸병 계급의 공격력은 모두 1.
생명력은 각각 궁병이 1, 창병이 2, 방패병이 3이다.
단, 궁병의 경우 3칸, 창병은 2칸, 방패병은 1칸 떨어진 곳의 상대 말을 공격할 수 있다.
대신 플레이어는 매 턴 말을 움직일지, 말로 공격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말을 움직인다면 그 턴에는 공격할 수 없고, 반대의 경우라면 움직일 수 없다.
말을 움직이고도 공격할 수 있는 방법도 있긴 하다.
자신의 말과 상대의 말을 같은 칸에 겹치게 하면 된다.
그럴 경우 움직인 플레이어의 말부터 공격을 시작해서 어느 한쪽 말의 생명력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번갈아가며 공격한다.
마법 차투랑가에서는 상대 말을 잡아먹는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죽였다’고 표현했다.
“졸병은 총 8개, 선택은 3개 병과 중 마음대로 선택해도 되는 거였지?”
내 물음에 바하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궁병 2개, 창병 4개, 방패병 2개야. 참고로 초기 배치도 졸병 라인 안이라면 마음대로 배치해도 괜찮아.”
나는 궁병 3개, 창병 3개 방패병 2개를 선택했다.
“기사 계급은 선택하지 않아도 괜찮네.”
기사 계급은 차투랑가나 체스처럼 병과와 배치가 고정이었다.
물론 차투랑가의 말을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각각의 병과는 기병, 사제, 마도병, 초인, 왕이었다.
체스에 대입하자면 기병은 룩, 사제는 비숍, 마도병은 나이트, 초인은 퀸이었다.
기사 계급에도 당연히 졸병 계급처럼 공격력과 생명력은 물론, 공격 범위도 있었다.
기병은 공격력 3, 생명력 3, 공격 범위 1칸.
마도병은 공격력 4, 생명력 2, 공격 범위 3칸.
초인은 공격력 5, 생명력 5. 공격 범위 0칸.
왕은 공격력 5, 생명력 1, 공격 범위 0칸 이었다.
특이하게 사제는 공격할 수 없는 대신 아군의 생명력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회복력 1, 생명력 3. 회복 범위 1칸이었다.
덧붙이자면 말의 이동 방법은 기본적으로 체스와 같았다.
“자, 배치 끝났다.”
내가 배치를 끝내자 바하무트는 그 배치에 따라 거대한 게임판 위에 마법 병사를 소환했다.
나는 계속 서 있기 뭐해 근처에 환영으로 가려져 있는 의자를 가져와 은하의 힘으로 가시화(可視化)시켰다.
그러자 바하무트가 커진 눈으로 의자를 바라봤다.
“어?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하긴? 그냥 의자를 끌고 온 거지. 내가 없던 걸 만들어낸 게 아니잖아.”
공간 이동한 것도 아니고 원래 있던 여관방에 환영만 띄웠을 뿐이면서 왜 놀라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건 그렇지만….”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나는 빨리 이 내기를 끝내고 싶었다.
“별거 아닌 일로 시간 끌지 말고 게임이나 시작하자.”
나는 이런 체스류 게임에 그다지 자신이 없었다.
내가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 난 친구와 종종 체스를 두곤 했는데, 다섯 번을 두면 한 번 이길까 말까였다.
상대는 1300년 경력의 괴물이었고 나는 이번 판이 처음이었다.
“선을 먼저 넘겨주지.”
바하무트의 오만한 배려에 나는 게임판 위의 말을 움직였다.
“방패병을 E7에서 E6으로 전진.”
딱히 속임수를 쓸 수 있는 방법도 없으니 의욕이 나질 않는구만.
* * *
“어… 내가 이긴 건가?”
나는 벙쪄서 물었다.
바하무트는 충격받은 얼굴로 망연히 게임판을 내려 봤다.
“이럴 리가…!”
게임 말은 내가 더 많이 잃었지만 바하무트의 왕과 직선으로 내 초인(퀸)이 서 있고, 배후에는 기병(룩)이 대기 중이었다.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피할 곳은 하필이면 내 궁병의 사거리였다.
궁병 앞을 가로막는 바하무트의 말이 있거나 1칸, 2칸만 떨어져 있었다면 궁병이 공격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절묘하게 방해물 없이 3칸 떨어져 있으니 왕이 움직이면 곧바로 궁병의 먹이가 된다.
“1300년이나 이 게임을 했다며?”
물론 마법 차투랑가가 현재와 같은 게임 방식으로 굳어진 건 300년이 채 되질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무려 300년이다.
아무리 만년 실버가 1만 시간을 해도 실버 랭크라지만, 300년이면 실버도 챌린저가 될 수 있을 터였다.
심지어 마법 차투랑가는 피지컬 게임도 아닌 턴제 전략 게임 아닌가.
놀리려는 생각 없이 순수하게 어이가 없어 묻자 바하무트는 정말로 충격받았는지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내가 다 이기고 있었는데!”
그녀의 말대로 내 말들은 대부분 죽어 사라졌다.
내 말은 왕을 포함해 총 다섯 개만 남았고, 바하무트의 말은 열한 개나 남았다.
하지만 이건 많은 말을 살리는 게임이 아니라 왕을 죽이는 게임이다.
간단히 빈틈을 만들어 찌를 시도를 해봤을 뿐인데, 설마 이렇게 바로 왕의 목을 내어줄 줄은 몰랐다.
“음, 이게 바로 내다 버린 1300년인가.”
내 중얼거림에 바하무트는 순수하게 충격을 받았는지 말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가련히 소리 없이 우는 아름다운 그녀를 보자니 생각했다.
드래곤의 눈물은 마법 재료로 사용하지 못하나?
사용 가능하면 지금 채취하고 싶은데.
“으으윽…! 유안은 바보야! 멍청이! 똥개! 으아아앙~!”
바하무트는 자존심이 뭉개진 충격 탓인지 나이에 맞지 않게 유아 퇴행적인 어휘를 내뱉으며 창문으로 도망쳐 버렸다.
“조금 말이 심하셨습니다.”
“그러게요, 내다 버린 1300년이라니….”
게임을 관전하던 제이드와 길버트도 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몰아갔다.
“아니, 고작 게임 가지고?”
내가 억울해하자 제이드와 길버트는 힐난의 시선을 보냈다.
“고작 게임이어도 1300년이나 시간을 들였으면 충격이 크겠죠.”
“도련님이 열 살 때부터 마법 차투랑가를 했다고 해도 경력이 7년뿐이니 더 충격이 클 거예요.”
아니… 난 이번이 처음인데.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의 원래 몸 주인은 해봤을지 몰라도 나는 처음이었다.
물론 그렇게 룰이 어려운 전략 게임도 아니어서 간단히 익숙해졌지만.
“내가 잘못한 거야?”
내 물음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냥 적당히 접대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게임 한 판 한 것뿐인데!
적당히 해줬는데도 진 녀석이 잘못한 거잖아!
억울했지만 푸념해 봤자 나를 천하에 둘도 없을 악인으로 몰아갈 것 같아 말을 돌렸다.
“그런데 이 콜로세움 환영은 언제 사라진대? 우리 이 콜로세움에서 자야 하는 건가?”
환영 속의 콜로세움에서 바람이 불며 얕게 흙먼지가 일었다.
이거 환영 맞지?
* * *
“으어어엉~!”
바하무트는 울었다. 정말로 다른 감정 없이 순수하게 짓밟힌 자존심 때문에 서러워 눈물을 흘렸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녀에게 이렇게 충격적인 패배는 처음이었다.
사실 그녀가 패배를 모르는 존재였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세상에 무서울 것 없다는 드래곤이라 하지만, 그녀도 미숙하고 어렸던 해츨링 시절이 있었다.
역사라는 이름의 거대한 강줄기 속에선 심심치 않게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괴물 같은 존재들도 나왔다.
그런 만큼 무수히 많은 패배를 겪으며, 그 패배를 딛고 성장해 나갔다.
그녀는 때때로 패배를 즐기기도 했다.
긴 세월은 그녀에게 미숙함을 앗아가고 능숙함과 요령을 선물했다.
처음 접하는 것이더라도 경험적 추론은 순식간에 미흡함을 없애고 익숙함을 선사했다.
때문에 나이를 먹어갈수록 패배란 그녀에게 경험하기 힘든 특별한 경험이 되어갔고, 그녀가 ‘내기’라는 것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흑흑! 그럴 리 없어!”
하지만 방금 그녀가 겪은 패배는 그녀가 추구하던 ‘특별한 경험’과는 궤를 달리했다.
창술의 달인이 검으로 검사에게 패배하는 것은 그저 좋은 경험일 뿐이다.
하지만 창술의 달인이 검사에게 창으로 패한다는 건 단순히 좋은 경험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흡사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감각일 것이다.
원형이 되는 차투랑가부터 온갖 변형이 일어난 마법 차투랑가까지.
모든 차투랑가가 바하무트에게는 창술의 달인의 창과 같은 존재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
이름난 마법사부터 장생족인 드래곤, 요정, 인어, 그리고 그랜드 마스터 타이틀에 이름을 올린 이들까지.
그런 자들에게 모두 승리한 세계 챔피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차투랑가라는 게임은 그녀의 자부심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크흥~! 흡! 유안이란 녀석, 대체 뭐 하는 놈이지? 내 마법에 간섭하는 건 정령왕도 못 하던 건데 아무렇지 않게 하더니, 내게 차투랑가로 이기기까지 하고.”
마법에 간섭한다는 것은 언제든 상대의 마법을 파훼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정령이 강해도 정령의 힘을 다루는 정령술사가 뛰어나지 않으면 시도조차 못 하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정령왕 ‘리즈벳’이 아끼던 정령도 데리고 있던 것 같은데, 훌쩍! 정령왕을 신앙시하던 정령대공 ‘가빌렛’도 아는 건가?”
지금은 리즈벳이 많이 잊혀 세간에선 가빌렛을 정령왕이라 부르는 듯했지만, 가빌렛을 아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하리라.
그 충성심에 미쳐버린 순혈 엘프가 듣는다면 감히 자신의 주인을 모독했다고 찢어 죽여버릴 테니까.
잠시 다른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차투랑가의 패배가 떠오르자 바하무트는 다시금 서럽게 울었다.
정령으로 자신의 마법에 간섭한 일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감정을 추슬렀다.
“패애앵-! 훌쩍, 이렇게 순수하게 감정에 매몰된 적은 처음인 것 같네. 또 게임하자고 해야지.”
손수건으로 코를 푼 바하무트는 충혈된 눈으로 어기적어기적 자신의 레어 중심부에 위치한 보물고로 향했다.
보물 교환권은 줬지만 유안을 초대하기 전에 그럴듯해 보이는 가짜들로 가득 채우기 위함이었다.
물론 잠시나마 권태를 잊게 해주고 재미를 준 포상이었으니 진짜 보물들을 빼진 않을 생각이었다.
자존심이 무참히 박살 나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 일로 질병같이 정신을 잠식하고 있던 권태감에서 오랫동안 벗어나 있을 수 있을 듯했다.
추기경이 악마 숭배 교단을 토벌하는 걸 구경하면서 재도전을 위해 마법 차투랑가를 연마할 걸 생각하면 살짝 설레기도 했다.
“도전자의 입장이 되는 게 얼마만이지? 역시 용기사로 삼을까?”
유안이 들었다면 질색팔색 할 생각을 하며 그녀는 겉만 그럴듯한 보물들을 양산해 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