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드래곤과 내기 (5)
간단한 저녁 식사 후 나와 바하무트는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았다.
나는 새 트럼프 카드의 포장을 뜯으며 내기 규칙을 설명했다.
“규칙은 간단해.”
첫째. 내기는 포커로 하며, 포커 룰은 조커를 제외한 ‘파이브 카드 스터드’로 한다.
둘째. 내가 딜러, 바하무트가 플레이어가 된다.
셋째. 내기가 진행되는 공간의 기준은 테이블로부터 반경 10미터로 정한다. ‘자의’에 의해 내기 공간을 벗어나면 내기의 패배로 간주한다.
타의에 의해 내기 공간을 벗어난 경우, 내기를 일시 중지한다.
넷째. 게임에 베팅하는 칩은 금화로 한정하며, 베팅 칩의 한도는 무제한이다. 단, 한 측이 올인을 선언한 시점에서 다른 측은 그 이상의 칩을 베팅할 수 없다.
다섯째. 한번 ‘잃은 칩’은 딜러와 플레이어 양측 모두 사용을 금지한다. 게임에서 이겼다면 승자가 건 칩은 다시 사용이 가능하다.
여섯째. 지닌 칩을 모두 소진하였을 경우, 양측의 합의 아래 내기 공간을 떠나 칩을 보충할 수 있다.
이때, 합의가 되었다면 합의 내용에 한해서 세 번째 규칙은 무효화된다.
일곱째. 내기 공간에서 마법 사용은 금지되며 마법 사용이 적발 시 적발된 측은 해당 ‘게임’을 패배로 간주하고 베팅 금액의 열 배를 벌금으로 상대에게 지불한다.
벌금은 다섯 번째 규칙에서 규정하는 ‘잃은 칩’으로서, 승자가 따낸 칩으로 취급한다.
여덟째. 게임은 최소 두 시간 동안 진행되며, 그 이후에는 딜러와 플레이어 둘 중 하나가 게임 종료를 선언한 시점에서 내기는 종료된다.
아홉째. 내기의 승패는 게임 종료 시, 더 많은 칩을 따낸 자가 승리하며 양측이 딴 칩은 상대에게 반환하지 아니한다.
열째. 내기의 승자가 내가 되었을 경우, 바하무트는 보물 교환권, 혹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게 지급한다.
“어때. 이해했어?”
내 물음에 바하무트는 금화가 담긴 상자를 꺼내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공평한 조건 아니야? 나는 백작이 악마 숭배자라는 거나 초인급 데스나이트가 숨어 있다는 것도 비밀로 했는데.”
공평하다고 하기에는 마지막 규칙 조항이 굉장히 불공평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하면 이건 굉장히 공평한 규칙이었다.
바하무트와 내기 자체를 하는 게 그녀에게 있어서 권태를 지울 수 있는 황금과도 같은 시간이 될 테니 말이다.
그녀는 이미 이득을 보았는데 나는 이겨야 이득을 보는 조항이니 나름 공평했다.
그녀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었다.
사실 내가 내건 조건이 공평하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이미 글러먹었다.
내기 조건이 온통 독소 조항 투성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이상 그녀는 호구 그 자체였다.
“친구와 노는데 최대한 공평해야 재미있지 않겠어?”
“그런가?”
“그럼 동의한 걸로 알고, 제이드.”
내 부름에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하룡 님께서 마법을 쓰는 순간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좋아, 아주 든든하다.
내가 백날 노력해 봐야 드래곤의 마법을 읽어낼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나는 능숙하게 트럼프 카드를 펼쳐 카드에 이상이 없음을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펼친 카드를 뭉쳐 카드 뭉치를 섞었다.
여기서 내기 규칙의 독소 조항 하나, 내가 ‘딜러’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플레이어’인 바하무트는 내기가 벌어지는 내내 이 카드 뭉치를 섞을 일이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밑장 빼기나 숨겨둔 카드를 사용하지는 않을 거다.
내 손이 아무리 빨라도 드래곤의 눈을 피할 정도로 빠르지는 못했으니까.
내가 할 일의 핵심은 카드 섞기에 있었다.
흔한 마술 트릭 중에서 마술사는 손 감각을 통해 원하는 카드를 원하는 위치에 놓는 셔플법이 있었다.
전문적으로 마술을 배우면 가장 흔하게 배우는 게 카드 마술인 만큼 셔플법은 꽤 다양했는데, 이걸 이용하면 상대와 내 손 패를 조절하는 것쯤은 눈 감고도 가능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이 셔플법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면 그 좋은 눈을 뜨고도 대놓고 코 베이는 상황이 벌어질 거다.
어쩌면 ‘천 가지 기예의 광대’ 야드나 ‘아르카나 00, 광대’ 유밀 자반이라면 서른 번쯤 뒤통수 맞고 눈치챌지도 몰랐다.
“자, 카드 배분할게.”
바하무트 한 장, 나 한 장, 바하무트 한 장, 나 한 장….
다섯 장의 카드가 배분되고, 패를 공개하기 전에 나와 바하무트는 테이블 위로 금화 한 장을 앤티(Ante:의무적 베팅 기본금)로 올려놓았다.
“패 한 장 공개하지.”
나와 바하무트는 스터드 룰대로 다섯 카드 중 한 장을 공개했다.
나는 하트 10, 바하무트는 클로버 5.
내가 배분한 대로라면 바하무트의 패는 트리플, 나는 투 페어다.
호구를 물 때는 첫판은 져주는 게 예의지 않겠는가?
초반에는 접대 게임을 하며 엎치락뒤치락하게 해줄 거다.
나는 당당하게 금화를 올려놓으며 선언했다.
“베트(Bet:판돈을 올리겠다는 선언).”
바하무트는 바로 따라붙으며 선언했다.
“콜(Call:베팅에 응하겠다는 선언).”
받고 돈은 더 얹는 레이즈(Raise)가 아니라 그냥 내가 올려둔 만큼만 따라오다니.
초반이라고 간을 보겠다는 건가?
지금 많이 따둬야 그나마 체면치레 정도는 할 텐데.
“다음 패를 공개하지.”
그렇게 나와 바하무트는 패 한 장을 공개할 때마다 테이블 위에 금화를 쌓아갔다.
바하무트는 나름 영악하게 버림패를 공개하며 판돈을 올리더니, 네 번째 패 공개 때 투 페어 이상임을 밝혔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 척했다.
“이것 참, 첫 끗발이 개끗발이네. 다이(Die:게임 포기).”
내가 포기하자 바하무트는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금화를 쓸어갔다.
그녀가 베팅했던 돈은 다시 옆에, 내게 따간 돈은 테이블 밑에 놓인 빈 상자에 넣었다.
저 상자에 들어간 금액의 차이로 내기 승패가 정해지는 규칙이었다.
“하하, 생각보다 재미있네.”
바하무트는 흥미가 붙으려 하는 건지 뺨이 살짝 상기되었다.
“이런 도박은 처음이야?”
의외였다. 그녀처럼 긴 세월 탓에 권태감에 빠진 사람이라면 카지노에서 살았던 적도 있었을 것 같은데.
“응? 아니, 예전에 카지노에서 잠깐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
“아, 이런 제약이 걸린 상태로 게임하는 건 처음이구나.”
하기야 카지노에는 나름 마법 방지 대책이 세워져 있었겠지만 드래곤의 마법을 감지할 수준은 아닐 터였다.
당연히 상대 패가 궁금하면 자연스럽게 상대 패를 엿봤을 거다.
다른 게임인 룰렛이나 주사위 같은 거야 굳이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드래곤의 감각으로 알아맞힐 수 있었을 거다.
마법으로 돌아가는 슬롯머신이야 뻔히 보일 거고 말이다.
참고로 바하무트라면 내 눈동자에 비친 카드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는 그녀에게 보이지 않게 눈을 살짝 가리고 카드를 확인했다.
“자, 아직 판돈은 많아. 못해도 두 시간은 계속 쳐야 하니 바로 다음 게임으로 넘어가자.”
“좋아.”
나는 자연스럽게 카드 뭉치를 나열해 원하는 카드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섞었다.
한 판 하고 뒤죽박죽이었던 카드 뭉치라 다른 셔플법으로 카드를 섞은 후 카드를 분배했다.
초반에는 바하무트의 승률을 높게 해서 초반 흥미를 끌고, 그다음에는 승부가 팽팽하게 조작해 조금씩 흥미를 몰입으로 바꿔갔다.
그녀의 눈이 카드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나는 슬슬 내 승률을 높이기 시작했다.
물론 중간중간 치열한 심리전과 팽팽한 승부, 그리고 아주 가끔씩 대승리를 맛보여 줬다.
바하무트의 눈이 벌게지기 시작하는 게 살짝 무섭긴 했지만, 설마 이번 일로 도박 중독에 빠지거나 하진 않겠지.
그럼, 괜히 드래곤 로드겠냐고.
살짝 불안하긴 했지만 아니라고 믿기로 하자.
그렇게 게임을 진행하다 보니 어느새 최소 시간인 두 시간이 훌쩍 넘어가고 창밖의 해가 완전히 져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칩이 모두 바닥나고 말았다.
“돈이 다 떨어졌네. 그만할 거야?”
규칙 다섯째, ‘잃은 칩’은 재사용 불가.
바하무트가 게임을 계속하고 싶다면 새로운 금화를 가져와야 했다.
참고로 나는 아직 여유로웠다.
상자가 꽤나 비긴 했지만 그녀에게 딴 돈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다.
내 물음에 그녀는 흥분했다.
“그럴 리가! 이제 시작인데!”
그렇게 외친 그녀는 금화를 꺼내고자 아공간을 열려 했다.
“제이드.”
파지직-!
제이드는 바하무트가 아공간을 열려는 걸 막았다.
갑자기 방해받자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나와 제이드를 번갈아 바라봤다.
“규칙 일곱째, 내기 공간에서 마법 사용 금지. 게임 중이 아니니 벌금은 없어.”
“아니! 그래도 금화를 꺼내는 것 정도는 봐줘야지!”
그녀의 항의에 나는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였다.
“규칙을 잘 봐. 내기 공간만 벗어나면 마법을 사용해도 괜찮아.”
“그럼… 잠깐! 세 번째 규칙! 자의로 내기 공간을 벗어나면 내가 내기에서 패배하잖아!”
그녀의 외침에 나는 싱긋 웃었다.
“다섯째 규칙, ‘협의’를 하면 괜찮지.”
드디어 내가 내건 내기 조건의 독소 조항을 눈치챘는지 바하무트는 발끈했다.
하지만 내게 뭐라 따질 수 없었다.
“약속된 최소 시간은 이미 지났어. 그만하고 싶으면 그만해도 괜찮아.”
내 아무렇지 않은 말에 그녀는 초조해했다.
“내가 그냥 금화를 꺼낸다면?”
“그 순간부로 나는 여덟째 규칙으로 내기 종료를 선언하겠지.”
여기서 끝낸다고 해도 내 승리다.
내 미소를 본 바하무트는 역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하! 한 방 먹었네! 협의를 하자. 이대로 끝내는 건 말도 안 돼. 뭘 원하지?”
“레어 보물고 교환권은 요구해도 들어주지 않을 거지?”
“물론.”
단호한 대답에 나는 살짝 떠봤다.
“그럼 왓슨의 거울 방패를 요구하면?”
거울 방패는 그녀의 보물고에 있는 보물 중 하나다.
내 물음에 바하무트는 깜짝 놀랐다.
“내가 그걸 가지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냥 유명한 보물로 찍은 거야. 드래곤 로드씩이나 되니 가지고 있을 법하잖아.”
간단히 둘러댔지만 그녀는 믿지 않는 듯 흥미로운 얼굴로 날 바라봤다.
“아쉽지만 그건 보물고 안에 있는 물건이라 이런 협의로는 넘길 수 없어.”
역시 이런 편법은 먹히지 않는 건가.
“이야기를 할수록 너란 인간에게 흥미가 끊이지 않는군.”
“너무 과한 관심은 사절이야. 그럼 적당히 줄 수 있는 보물이나 마도구 하나를 줘. 가능하다면 아공간 스왑이 되는 방패가 좋겠어.”
길버트에게 주면 비상시에 잘 써먹을 수 있겠지.
프레시아에게는 거울 방패를 줄 생각이었다.
실력을 생각하면 길버트에게 주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성능이 너무 좋아서 의지하기 좋은 보물은 길버트에게 아직 일렀다.
내 요구에 바하무트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승낙했다.
“좋아, 창고를 뒤져보면 하나쯤 있겠지. 없다면 난쟁이에게 의뢰를 해서라도 하나 구해줄게.”
내가 마음대로 하라고 손짓하자 바하무트는 재빠르게 나갔다가 금화 상자 다섯 개를 가져왔다.
“빨리! 빨리 다시 시작하자!”
바하무트의 살짝 충혈된 눈에 나는 가볍게 웃으며 새 트럼프 카드를 뜯고 카드 뭉치를 섞었다.
과몰입 하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다.
호구가 되기 위한 준비가 모두 끝난 듯하니, 이제 본격적으로 털어먹기 시작할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