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125화 (125/214)

제125화. 드래곤과 내기 (4)

점심시간이 되자 여관으로 모인 일행들은 다 같이 방에서 식사를 했다.

프레시아는 식사하며 길버트에게 오전 훈련 중 있었던 지적 사항을 읊어줬고, 길버트는 채할 듯한 얼굴로 빵을 우물거리며 프레시아의 말을 들었다.

제이드와 실루아는 내가 구해다 준 마도서와 마법서의 내용으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바하무트는 반짝이는 눈으로 두 번째 내기 내용이 뭐냐고 계속해서 재촉했다.

이렇게 북적거리는 것도 좋지만, 이 정도로 시끄러우니 전의 고요했던 식사 시간이 살짝 그리워졌다.

왕궁에 있을 때는 조용히 식사하며 계획 구상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식사를 간단히 끝낸 다음, 나는 빨리 내기하자고 엉겨 붙는 드래곤을 밀어버리고 천천히 신문을 읽었다.

“오, 드디어 붉은 눈 토벌 사실이 대대적으로 공표되었나.”

붉은 눈을 사냥한 것은 저번 달이었지만 여러 이유로 발표가 늦어졌다.

아마도 왕후를 둘러싼 정쟁과 제국의 아사자하드 후작의 방문 때문이겠지.

길버트가 프레시아의 훈계를 피해 내게 다가왔다.

“그렇습니까? 붉은 눈이 죽었다는 게 알려지면 축제 분위기겠네요!”

훈련 복기나 열심히 하라고 말할까 하다가 길버트가 불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신문에 따르면 왕이 붉은 눈 토벌의 공을 치하하고자 후작을 수도로 불러들인다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빠르다.

데미웨이가 물밑에서 왕과 접선을 시도했나?

하긴, 10년간 바스타유 산맥에 겨울이 온다는 것을 알렸으니 영주로서 이런저런 대비를 해둬야지.

역설적이게도 몬스터 지옥이 없으면 그의 군단은 유지할 수 없었으니까.

왕실의 보물고에서 보물을 하나 하사한다고 하니 내가 칠성검과 저울질했던 귀도(鬼刀)가 제 주인을 찾아갈 듯했다.

거의 4년은 빨리 검귀의 손에 들어가겠군.

귀도는 주인을 가리는 요도(妖刀)라 데미웨이가 귀도를 길들이는 데 애 좀 먹겠어.

“유안! 유안, 유우우우아아아안~!”

바하무트는 내가 정한 두 번째 내기 내용이 궁금해 안달복달했다.

“거, 조용히 해. 최소한 내기 내용을 생각할 시간은 줘야지.”

“어젯밤에 시간 있었잖아!”

“밤에는 자야지! 그렇게 떼쓰면 한 달 뒤에 내기할 줄 알아.”

어차피 바하무트와 친분을 쌓는다는 최소한의 목표는 이뤘다.

“히이잉~!”

앓는 소리를 하며 침대 위에 엎어져 버둥거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대충 뭘 할진 정했으니까 저녁 먹고 알려줄게.”

“지금 알려주면 안 돼?”

“지금 알려주면 지금 당장 하자고 떼쓸 거잖아. 나도 볼일은 봐야지.”

내 내기는 꽤나 길게 이어질 거다.

최대한 바하무트를 뜯어먹, 아니 즐겁게 해줄 생각이었으니까.

“무슨 볼일인데?”

바하무트의 물음에 나는 항구 쪽을 바라봤다.

“그냥 이것저것.”

휴양 도시에 왔으니 제대로 즐겨봐야지.

* * *

바하무트가 떼를 쓰다 떠난 이후, 나는 꽤나 바쁘게 돌아다녔다.

우선 얼굴을 바꾸고 종합무역상공회의소(綜合貿易商工會議所)로 가서 바하무트 덕분에 값이 폭등한 무역선 세 개의 권리 증서를 여러 상단에 나누어 팔아치웠다.

제대로 된 이득을 생각하면 무역선의 물건에 직접 값을 매겨 파는 게 최고였지만, 나는 상인이 아니었으니 적당한 가격에 팔아치웠다.

적당한 가격이라 해도 내가 산 무역선들의 권리 증서의 값을 떠올리면 각 무역선마다 적게는 수천 배, 많게는 수십만 배의 수익을 챙겼다.

고작 세 무역선만으로도 수수료와 세금을 제외하고 내가 전체 투자한 돈의 214배를 얻었다.

앞으로 내가 얻을 수익은 그야말로 억만금이리라.

“바하무트가 괜히 지난 15년 동안 작전질로 번 돈이 천 년간 번 돈보다 많다고 말한 게 아니었구만.”

실제 돈으로 만지니 체감이 확 되었다. 금화가 큼지막한 상자에 가득 담겨져 있다.

“…꿀꺽.”

“와아… 이렇게 많은 돈은 처음 봅니다.”

내 일행들도 상자에 담긴 금화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민적 감성의 소유자인 길버트뿐만 아니라 돈에 초탈한 제이드와 실루아도 같은 반응이었다.

아무리 돈에 관심이 없어도 이 돈이면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을 테니 당연했다.

사실 지난밤 악마 숭배자인 백작의 저택을 털었던 재화가 눈앞의 금화 상자보단 훨씬 많긴 했지만, 그건 비밀로 하기로 하자.

“앞으로 도련님께서 돈으로 무언가를 하실 때는 무엇이든지 군말 없이 따르겠습니다.”

내가 휴지 쪼가리에 투자하는 걸 말렸던 프레시아는 내게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마치 독실한 신자와 같은 눈이었다. 부담스럽구만.

심지어 이것도 전부가 아니었다. 나는 대륙 5대 상단의 신용 어음을 따로 받기도 했다.

비록 가벼운 종이 쪼가리지만 어음에 적힌 돈은 상자 속 금화의 몇 배는 되었다.

절로 웃음이 나오는 걸 삼키고는 금화 상자와 어음 다발을 아공간에 넣었다.

“유안! 사실 어제 네슬릭 상단에서 사고 싶었던 비싼 마법 재료가 있었는데…!”

“유안 오빠! 마탑에서 팔던 것 중에 사실 사고 싶었던 시약이 있었는데요…!”

제이드와 실루아는 눈이 금화가 된 것 같이 보일 정도로 반짝이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달라붙었다.

무한하게 돈이 샘솟는 투자자를 본 마법사의 표정이었다.

확실히 마법을 익히는 데 돈이 많이 들긴 하지.

“좋아, 이 돈으로 이것저것 사자!”

일단 프레시아와 길버트에게도 아공간 마도구 하나씩 사줘야지.

아니, 마도구는 사는 것보다 아바스엘에게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게 나은가?

어중이떠중이보다는 무려 10년간 각인사로 일한 아바스엘을 믿을 수 있다.

마도구는 워낙 사기 치는 놈들이 많아서, 원.

그럼 만들 재료를 사야겠네.

“음, 뭘 사야 할까.”

나는 종합무역상공회의소에 상주하는 상단들을 통해 금화 일부를 동화와 은화로 환전했다.

그러고는 일행들을 이끌고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마탑에서 마석을 쓸어 담고 실루아가 원했던 더럽게 비싼 마법 시약과 약초를 샀다.

그리고 각종 상단을 돌아다니며 쓸어 담듯이 제이드가 사고 싶어 했다던 마법 재료와 내 두 호위 기사에게 투자할 마법 금속 및 강철을 구매했다.

이후에는 시장 거리를 돌아다니며 소설 속에서 나온 이상한 잡화점, 뒷골목 약 가게, 허름한 고서점등을 들렀다.

전날 내가 길버트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의 연장선상이었다.

길버트에게 사 오라 시킨 것들은 비교적 찾기 쉽고 마법적 안목이 없어도 되는 것들이었다면, 지금 찾는 건 안목을 필요로 했다.

“유안, 이 나이프 왠지 조금 이상합니다.”

“유안, 이 시약병, 마력이 독특합니다.”

“유안, 이 책은…!”

제이드는 나를 따라다니면서 소설 속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특이한 물건들을 알아봤다.

소설에서 나오지 않은 건 사기 조금 찜찜했지만 일단 모두 구매하기로 했다.

애초에 여기서 물건을 구매하는 건 일행들을 강화하는 목적보다는 적에게 물건들이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막는 의미가 컸다.

우리는 활용을 못 해도 적에게는 히든피스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내 적이 강해질 바에는 보물을 썩히는 게 옳았다.

슬슬 하늘이 붉어질 무렵, 우리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놀랍게도 그렇게 돈을 펑펑 사용했는데도 금화 상자는 반도 비워지지 않았어.”

내 말에 다들 놀랐다.

“아니, 몇 시간 만에 그 많은 돈을 반 가까이나 썼다는 데 놀라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이드의 지적에 나는 키득거렸다.

“그런가? 그럼 더 놀라게 해줄게.”

내 말에 제이드는 흥미로워했다.

“어떤 식으로 놀라게….”

“늦어! 늦어! 늦어! 벌써 저녁 시간인데 내기는 언제 할 거냐!”

먼저 여관에 도착해 있던 바하무트가 침대 위에서 버둥거리며 투정을 부렸다.

그녀의 왼쪽 눈가에는 붉은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잘 보니 테이블 위에 붉은 휴지 뭉치가 쌓여 있었다.

“뭐야, 피?”

내 물음에 대답한 건 제이드였다.

“아, 자하룡 님께서 계속해서 염탐을 시도하시길래 모두 막았습니다. 눈가의 피는 그 반동 탓일 겁니다.”

“쯧쯧, 하여간 관음증은.”

내가 혀를 차자 바하무트는 억울해했다.

“관음증 아니야! 야! 회색 머리! 그냥 어디쯤 있나 위치나 알아보려 했던 건데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막을 건 없었잖아!”

내가 제이드를 보자 제이드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고작 103번 정도 막았을 뿐입니다.”

103번이나 염탐을 시도하는 바하무트도 바하무트지만, 그걸 막고도 말 한마디 없던 제이드도 무서웠다.

나는 그런 제이드의 귓가에 나비의 힘으로 속삭였다.

-저 피 묻은 휴지 꼭 챙겨. 저거 용혈(龍血)이다.

드래곤의 피는 한없이 쓸모가 많았다.

드래곤이 아니라 드래고니안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용혈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내 말에 제이드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흘끗 보고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법으로 대답했다.

-반드시 챙기겠습니다.

세상에나, 소설 속의 그 순진하고 정의로웠던 제이드는 어디 갔을까?

나랑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낸 것도 아니니 내게 물들었을 리는 없으니 숨겨진 탐욕스러운 마법사로서의 본성이겠지?

암, 그렇고말고.

절대 내게 물든 게 아닐 거야.

나는 확신을 가지고 웃으며 밖에서 사 온 포장도 뜯어지지 않은 트럼프 카드 뭉치를 테이블 위에 쏟아냈다.

“그렇게 오래 기다렸다니 마음이 아프네. 그래서 내게 주기로 한 마석과 성수는 가져왔어?”

내 말에 바하무트는 툴툴거리며 아공간에서 사람이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자들을 꺼냈다.

“이게 마석, 이게 성수.”

나는 마석보다 성수를 먼저 확인했다.

아직 이 나라의 악마 숭배자들이 토벌당하기 전이란 걸 알았으니 재수 없으면 언제든 만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대비책부터 챙겨둬야지.

“이게 신성력인가? 꽤나 기운이 진한데?”

성수가 담긴 병의 코르크 마개를 따고 한 모금 마셔봤다.

전신에 찌르르한 청량한 감각이 퍼졌다.

소설 속 묘사와 같다. 진품이군.

게다가 하루 종일 돌아다닌 피로가 한 방에 사라지는 게, 최상등품의 성수인 듯싶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성수는 보통 하등품이었는데, 하등품 성수로는 약간의 치료와 사기(邪氣)를 몰아낼 뿐이고, 소비 기한도 짧았다.

막 신성력을 터득한 견습 사제가 훈련용으로 만드는 물건이니 어쩔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성수인 중등품 이상부터는 신전에 막대한 기부를 해야 살 수 있었는데, 최상등품은 단순히 기부하는 수준으로는 얻는 게 불가능했다.

돈과 시간, 그리고 신앙심을 증명해야 했다.

“내가 그거 얻으려고 추기경한테 얼마나 아쉬운 소리를 했는지 알아?”

마치 칭찬해 달라는 듯이 으스대는 그녀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반쯤 강탈했을 거면서 앓는 소리는.”

내가 그녀의 성격을 모르지 않는데 헛소리를 하고 있다.

아, 바하무트와는 어제 만났지?

그럼 모를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구나.

나는 마석과 성수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테이블 앞에 앉으며 반쯤 비어버린 금화 상자를 꺼냈다.

“도박 좋아해? 두 번째 내기는 포커야.”

지금부터 비워진 상자가 다시 채워지는 마법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