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드래곤과 내기 (3)
내 말에 바하무트는 벙찐 얼굴로 날 바라봤다.
설마 내가 비리 장부로 거래를 제안할 줄은 생각도 못 한 모양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녀에게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왜? 이거 필요 없어? 필요 없으면 파기하고.”
필요 없을 리가 없다.
내기 내용인 백작의 비리 장부 탈취는 나로 하여금 일부러 백작의 저택에서 소란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다.
그 다음 ‘악마 숭배자가 숨어들었다.’ 같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대놓고 수색을 벌일 셈이었을 거다.
아마 내가 비리 장부 탈취에 실패할 것을 계산하고 움직였겠지.
하지만 그저 악마 숭배자인 백작만 족치자고 이런 일을 벌이진 않았을 터.
이 비리 장부에 적힌 것들을 타고 뿌리내린 악마 숭배자들을 엮어 소탕할 생각일 거다.
떠올려 보면 소설 속에서 악마 숭배자들의 세력이 유독 왕국에선 약했던 것 같다.
읽을 때는 작가가 편의주의적으로 초반에 적을 약하게 설정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소설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바하무트가 왕국 내 악마 숭배 교단을 한번 토벌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 비리 장부는 넘겨줘야겠다.
적당히 대가를 받고 말이다.
내 제안에 바하무트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부여잡았다.
“푸핫! 푸하하하핫! 드래곤을 협박하는 인간이라니! 아하하하! 아~ 이렇게 재미있는 녀석은 정말 오랜만이야. 정말 용기사가 될 생각 없어? 너라면 기꺼이 너의 드래곤이 되어줄 수 있는데.”
끔찍한 소리 하는구만.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용기사 따윈 쳐다보지도 않을 거다.
“필요 없어.”
“그렇게 단호하게 말할 것까진 없잖아. 아아, 아쉽네.”
자신에게 집착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편집증 변덕쟁이와 한평생을 살라는 건 고문이다.
그나마 바하무트라 변덕쟁이라고 한 거지, 다른 드래곤이었으면 미치광이라 표현했을 거다.
“그래서 이걸 넘겨주는 대가는? 설마 친구의 물건을 힘으로 강탈하려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니야. 내 명예가 있지, 어떻게 그러겠어.”
잠시 고민하던 바하무트는 물었다.
“돈은 어때?”
“마침 누구 덕분에 벼락부자가 되어서 별로.”
그 누구가 바로 내 앞에 있는 보라색 뿔의 소녀였다.
“그럼 마석은?”
마석은 조금 혹한다.
아직 아공간에 여유롭게 있지만, 마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다른 동료들은 몰라도 내 전투력은 마석에 의존하는 부분이 큰 만큼무시할 수 없는 제안이다.
“보물 교환권은 안 되나?”
아무리 마석이 좋아도 웃돈을 줘서라도 돈으로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하무트의 보물 컬렉션은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녀의 보물을 얻을 수 있다면 훨씬 이득이었다.
내 물음을 바하무트는 단호히 잘랐다.
“비리 장부의 가치가 그 정도는 아니야. 방금 준 교환권은 내 권태를 달래줄 정도로 재미있는 구경을 시켜준 대가에 가까웠지, 하찮은 악마 뒤나 빠는 것들의 물증을 잡는 걸 돕겠다고 선물한 게 아니야.”
그녀의 말에 나는 가볍게 입을 다셨다.
“그럼 마석으로. 아, 백작의 저택으로 태양신의 성기사들도 들어가던데. 아까 말한 지인이 그쪽 사람인가?”
“맞아.”
“그럼 아세드 추기경이겠군.”
바하무트가 알고 지내는 성직자라면 태양신의 사제, 아세드 아한 에드가드 정도였다.
드래고니안의 모습으로 알고 지내는 성직자라면 더 있을 수도 있었지만, 드래곤이라는 정체까지 아는 성직자는 극히 드물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마석에 성수(聖水)까지 얹어줘. 받는 마석량은 줄여도 되니까 성수를 가능한 많이 줬으면 좋겠어. 추기경이면 충분히 잉여분을 빼낼 수 있잖아?”
당장 일행 중에 전문 치료 사제가 없었다.
실루아와 제이드가 치료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지만 성수만큼 범용성이 좋지도, 효과가 뛰어나지도 않았다.
나중에 사제가 동료로 들어온다고 해도 성수는 꽤나 중요했다.
“으흠, 알았어. 그 정도는 해줄게. 그런데 내가 아세드랑 알고 지낸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바하무트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으며 비리 장부를 건넸다.
“비밀은 때때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법이지. 너무 많은 것을 알면 사는 재미가 없잖아?”
“아하하하, 그럼 내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서 삶이 재미가 없는 건가?”
그녀는 너스레를 떨며 비리 장부를 받았다.
“아, 이왕 악마 숭배자들을 토벌하는 거 허공에 드래곤 환영을 만든 것도 그놈들 탓으로 하자.”
내 제안에 바하무트도 그것까지는 생각 못 했는지 감탄했다.
“아하! 악마 숭배에 필요한 부정한 사념을 모으기 위한 짓으로 꾸미자는 말이지? 그거 좋은 생각인데? 대대적인 토벌 명분으로 좋겠어.”
“이렇게 대놓고 저질렀으니 정계, 재계 할 것 없이 숨어든 놈들이 방해하기는 쉽지 않겠지.”
명분의 힘이란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데 탁월할 뿐더러 쓸데없이 이런저런 권력자의 눈치 역시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 싶으면 명분에 엮어 마녀사냥식으로 숙청할 수도 있었다.
덤으로 내가 한 짓도 없던 일이 될 거다.
저지른 건 나였지만 지금부로 새벽별 교단의 짓이 될 테니까.
바하무트는 감탄의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설마 그렇게 일을 크게 벌인 게 그걸 노리고?”
“뭐, 겸사겸사?”
겸사겸사는 개뿔, 내가 터는 놈이 악마 숭배자인지도 몰랐구만.
내 허세에 바하무트는 물론 내 일행들도 역시나라며 탄성을 내뱉었다.
너무 과한 신뢰에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저 정도로 신뢰를 줄 만한 일을 했던가? 잘 모르겠다.
바하무트는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다음 내기는 뭐로 할 거야? 네가 정할 차례야.”
다음 내기부터는 이기면 선물이 걸려 있었다.
그녀가 말한 선물이라면 아마 보물 교환권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반드시 이길 만한 내기를 해야지.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자고 나서 생각할게. 하암~! 피곤하다.”
자정을 넘기다 못해 달이 중천에 떴다. 슬슬 밤도 짧아져 몇 시간 뒤면 동이 틀 시간이었다.
“쩝, 아쉽지만 내일을 기대해야겠네. 잘 자.”
바하무트는 걸터앉았던 창가에서 일어나 들어왔던 창문으로 다시 나갔다.
나는 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제이드에게 말했다.
“다시 못 들어오게 결계 치고, 저 관음증 환자가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니까 방해 마법도 부탁해.”
내기 중이 아니라 훔쳐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무엇보다도 불쾌하니까.
* * *
바하무트는 높은 석조 탑 위에서 도시를 둘러봤다.
원래였다면 항구 인근과 몇몇 상회에나 불이 들어왔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하늘에 떠 있던 드래곤 환영 탓에 늦은 새벽에도 도시는 어수선했다.
“정말이지, 영웅은 못 될 악당이라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키득거렸다.
이렇게 인간에게 관심이 가는 것도, 마음에 짙게 깔린 권태감을 해소시켜줄 만큼 재미있던 것도 오랜만이었다.
생각난 김에 바하무트는 자신과 친구가 된 인간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지직-! 파르르…! 픽!
유안의 모습을 화면처럼 띄우려 했지만, 실패하며 마법이 붕괴했다.
그 탓에 그녀의 마력이 살짝 역류하며 왼쪽 눈에서 피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방해 마법인가? 정말이지 방심할 수가 없구나.”
유안의 마법이 아니다.
바하무트는 누가 자신에게 카운터를 날렸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제이드 하이트필. 으하하하하! 재미있는 인간이 하나 더 있었구나!”
자하룡이라 불리는 그녀의 마법에 제대로 카운터 칠 수 있는 건 이 세계에서 극히 드문 괴물들뿐이었다.
그녀의 동족 중에서도 가능한 건 한 손에 꼽으리라.
한바탕 유쾌하게 웃은 그녀는 금세 차분해졌다.
“현자에 가까운 인간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현자급 마법사였군.”
강한 인간은 언제나 흥미로웠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녀가 봐온 강자는 너무나 많았다.
흥미를 끌지언정 권태를 해소시켜줄 정도로 재미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본 유안이라는 존재는 너무나 귀했다.
약해빠진 인간이었지만 예상을 뒤집고 의표를 찌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한참을 바닷바람을 맞으며 분주함이 사그라지는 도시를 구경하고 있자니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여기 계셨습니까? 한참 찾았지 않습니까.”
탑 위로 올라온 노년의 사내는 석장(錫杖)을 짚으며 바하무트에게 다가왔다.
“카디날(Cardinal:추기경) 아세트 왔는가? 고생 많았네.”
돌아보지도 않는 바하무트의 치하에 태양신의 사제 아세트는 간단히 눈인사를 하며 답했다.
“직접 움직이지도 않는 늙은이가 고생이라고 할 게 무어 있겠습니까. 열심히 밑에서 움직여 주는 이들이 고생했지요.”
담담하게 공을 돌린 아세트는 그녀의 옆에 섰다.
“그런데 소동이 있을 거라는 언질을 받긴 했지만 너무 심했습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벌써부터 골머리가 아프군요.”
그의 푸념에 바하무트는 키득거렸다.
“머리 아플 게 뭐 있나? 그냥 악마 숭배자들이 한 짓으로 꾸미면 되지.”
바하무트의 말에 아세트는 잠시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좁혔다가, 어떤 식으로 이용해 먹을지 떠오르자 표정이 환해졌다.
“그거 명안이군요. 이번에는 일찍 알아서 다행입니다. 저번처럼 까먹었다며 며칠 뒤에 언질 주셨다면 명분도 약해지고 꼴이 우습게 됐을 겁니다.”
바하무트는 여러 이유로 일을 벌이고 난 다음, 뒷수습을 할 때 뒤늦게 다른 방안을 제시하고는 했다.
“크흠! 거, 지난 일은 왜 꺼내고.”
당황하는 바하무트를 보며 아세트는 싱긋 웃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뒷수습 방안은 생각하고 일을 벌여서 다행입니다. 갑자기 하늘에 드래곤이 나타났을 때는 너무 놀라서 머릿속이 새하얘졌지 뭡니까.”
“그래서 놀라지 말고 작전대로 하라고 연락해 줬잖아.”
“가급적 그런 짓을 벌일 거면 사전에 귀띔이라도 해달라고 하는 말입니다.”
웃으며 핀잔 주는 아세트를 보며 바하무트는 비리 장부를 건넸다.
“이걸로 재미있는 구경을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녀의 관심사는 오롯이 권태를 삭일 흥밋거리뿐이었다.
장부를 받은 그는 한번 훑더니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아주 좋아요. 악마의 뒤나 빨아재끼는 더러운 쓰레기들을 이 나라에서 드디어 치워버릴 수 있겠군요.”
새벽별 교단의 은밀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눈을 떠보니 정오가 지난 시간이었다.
나는 어제 많이 움직여 경미한 근육통이 생긴 다리를 스트레칭하며 부스스한 머리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슬슬 깨울까 했는데 잘됐군요. 점심 뭐 드시겠습니까?”
제이드의 물음에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내 물음에 제이드는 싱긋 웃었다.
“프레시아와 길버트는 배에 있는 동안 제대로 훈련을 못 했다며 훈련하러 갔고, 실루아는 인형을 데리고 대장간을 확인하러 갔습니다.”
“실루아 혼자 보낸 거야?”
“제 사역마도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유안은 실루아를 너무 감싸고도는 경향이 있는데, 실루아 정도면 어엿한 한 사람의 마법사입니다.”
실루아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아직 지닌 힘의 반절도 못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그 반절도 어지간한 마법사 따위는 감히 고개도 못 들 수준이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아직 세상 경험이 부족하다 못해 없다는 점이었다.
“아직 어린아이잖아.”
“자기는 다 컸다고 하던데요?”
“스스로 다 컸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어른인 사람은 없는 법이야.”
뭐, 사역마도 보냈다고 하니까 걱정할 건 없겠지.
똑! 똑!
기지개를 켜며 잠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는 바로 문이 열리며 보랏빛 머리의 드래고니안, 아니 드래곤이 환하게 웃었다.
“점심 아직이지? 같이 먹자. 아, 그리고 축하해. 아침에 무역선 ‘황금 오리호’와 ‘푸른 인어호’가 도착했어.”
그녀는 내게 소식지와 신문을 건넸다.
욜로! 난 부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