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드래곤과 내기 (1)
자하룡(紫霞龍) 바하무트.
이 대륙의 모든 드래곤을 대표하는 드래곤 로드이자 왕국의 건국 신화에도 등장하는 성스러운 용.
그녀가 내뿜는 보랏빛 노을과 같은 마력은 모든 사악한 것들을 사멸시키고 올바른 것을 수호한다.
…고 알려져 있었다.
뭐? 마력이 사악한 것을 사멸시켜?
정말로 바하무트의 마력이 사악한 것을 사멸시켰으면 그 정신머리부터 사멸했을 거다.
애초에 올바른 것을 수호했으면 주식판에 작전질을 하며 주가 조작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 짓을 떠올리는 사고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허무맹랑한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건데, 이 소설에서 드래곤치고 제정신을 가진 녀석은 단 한 놈도 없었다.
물론 드래곤이 모두 등장한 것도 아니고 등장한 드래곤 대부분이 묘사 하나 없는 엑스트라였다.
하지만 도마뱀 놈들의 지나가는 대사 하나하나가 정신 나간 수준이었다.
놀랍게도 그나마 바하무트 정도면 드래곤치고 나름 정의롭고 괜찮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었다.
무역선을 납치해 주가 조작을 하는 녀석이 괜찮은 정신 상태란 말이다.
바하무트는 적어도 잔학룡(殘謔龍)이나 성희룡(聲戱龍) 같은 미친 광룡(狂龍)은 아니었다.
그저 권태에 빠져 쾌락주의가 된 것 뿐이니까.
“내기라, 오랜만에 듣는 아주 좋은 울림이네.”
바하무트는 순간 광기 어린 눈동자로 날 바라봤다.
음, 아까 광룡이 아니라는 말은 취소할까?
아니, 그래도 선은 지키니까 미친 드래곤까지는 아닐 거다.
…아니겠지?
“내기는 세 번 중 두 번 이기면 됩니까?”
바하무트와의 내기는 기본이 삼판 이선승제였다.
내기의 내용은 각각 하나씩 정한다.
다만 마지막 내기 승부는 이 세계에서 유명한 게임인 마법 차투랑가(Chaturanga:체스, 장기 등의 기원이 되는 보드게임)로 고정되어 있다.
이 세계의 차투랑가는 원래 세계의 차투랑가와 룰이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랐다.
마법 차투랑가는 마법적 요소가 더해진 만큼 기존의 룰이 꽤 변경된 게임이었다.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에 귀를 기울인다더니 잘 아네. 아, 내 장난질을 알아차리고 날 불러들인 것도 한 번의 내기로 쳐줄게. 네가 1승이야.”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내가 그녀의 장난질을 눈치채고 이용해 먹은 게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나였으면 어디 음습한 야산에 아무도 모르게 파묻어 버렸을 텐데. 참 다행이다.
“아, 그래도 내기 세 번은 그대로 하자. 대신 네가 더 이긴다면 그에 걸맞은 선물을 주겠어.”
한마디로 나랑 더 놀아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제가 마음에 든 모양이군요.”
내가 의외라며 묻자 바하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 속에서 제이드가 그녀의 장난질을 알아차렸을 때도 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당혹스러웠다.
소설 속에서는 직접적인 힘겨루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아니, 차후 바하무트의 힘이 필요해질 수도 있을 때를 생각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
하지만 드래곤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다.
“먼저 내기 종목을 선택하시죠. 가급적 서로 해가 될 만한 건 피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양보에 바하무트는 팔짱 끼며 고민했다.
“으음~ 뭐로 내기를 해야 재미있을까.”
소설 속에서는 제이드와 마법 대결을 펼쳤는데, 설마 나한테도 마법 대결을 신청하는 건 아니겠지?
고민하던 바하무트는 내기 종목을 정했는지 악동처럼 웃었다.
* * *
나는 어두운 골목길 가로수에 등을 기대고 환하게 조명이 켜져 있는 대저택을 바라봤다.
프레시아는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정말 자하룡이 말한 대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나는 야드의 천변가면과 머리끈을 쓰고, 그 위로 수도에서 산 하회탈같이 생긴 가면을 얹었다.
두건 형태라 어지간해서 탈이 벗겨질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당연하지. 무려 자하룡의 비호라고? 친해져 둬서 나쁠 건 없잖아?”
우려 건국 신화에서 건국왕을 돕는 드래곤의 비호였다.
내 왕자라는 지위를 생각하면 바하무트의 비호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정치적 쓸모가 무궁무진했다.
그녀의 비호로 내 정통성을 강화시킬 수 있을 뿐더러, 가십거리에 환장하는 사교계에서 입지를 다질 수도 있다.
사교계에서의 입지는 정치적 세력 구축에 큰 도움이 될 거다.
다른 것들을 다 차치하더라도 바하무트의 무력만으로도 친해질 가치는 충분했다.
내 대답에 제이드도 걱정스럽게 날 바라봤다.
“하지만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에이, 이 정도가 뭐가 위험하다고. 바하무트와 일대일로 싸워서 하루를 버티라는 것도 아니고.”
제이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아니, 드래곤 로드와 싸우라니. 아무리 내기꾼으로 유명한 바하무트라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내걸 리 없지 않습니까?”
아닌데? 소설에서는 내걸던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당한 사람이 바로 제이드였다. 심지어 제이드가 내기에서 이기기도 했다.
“그나저나 도울 수 없다니, 바하무트도 너무하는군요.”
제이드의 푸념에 나는 키득거렸다.
“너희들이 도우면 내기 자체가 성립 안 하잖아.”
바하무트가 제시한 내기는 간단했다.
동이 트기 전까지 저 휘황찬란한 대저택에 숨어들어 저택의 주인인 백작의 비리 장부를 훔쳐 오는 것.
당연히 나 혼자만의 힘으로 도전해야 했다.
그런데 바하무트는 비리 장부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아낸 거지?
음, 내가 알 바 아니니 신경 끄자.
“나비, 은하.”
내 호명에 나비와 은하가 투명해지더니 내 곁에서 떨어져 저택으로 향했다.
공기가 있는 곳이나 빛이 닿는 곳이라면 정령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심지어 정령은 자연 그 자체의 형상화라 어지간한 감지 마법에는 걸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십여 분을 기다리자 두 정령은 저택의 구조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음음, 비밀 공간은 1층에 두 군데, 2층에 한 군데, 3층에 다섯 군데, 지하에 열두 군데. 비밀 공간이 뭐 이리 많아?”
게다가 경비가 보통 삼엄한 게 아니었다.
정원에만 경비견 수십 마리에, 중요한 공간은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도 사용인이 돌아다니는 데다 각종 보안 마법까지 깔려 있었다.
“에휴, 귀찮구만.”
내가 머릿속으로 동선을 짜고 저택으로 향하자 프레시아와 제이드가 말했다.
“조심하세요.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시면 신호 주세요.”
“바로 구하러 달려가겠습니다.”
검과 마법 지팡이를 든 두 사람의 모습은 든든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결코 내 털끝이라도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알았어, 다녀올게.”
나는 빛의 정령인 은하의 힘으로 몸을 투명하게 만들고 저택 대문 앞에 섰다.
나는 원래 세계의 내 친구처럼 도벽이 있진 않았지만 어쩌랴.
주님, 오늘도 정의로운 도둑놈이 되는 걸 허락해 주세요. 아니면 신전을 털어 버릴라니까.
“하암~! 피곤하네. 빨리 끝내고 자러 가야지.”
대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대놓고 하품하는 날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람의 정령인 나비의 힘으로 소리도 막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나는 간단한 정령 마법으로 하늘을 날아 대문을 넘었다.
저택을 둘러싼 정원에는 온갖 위험한 보안 마법들이 가득했지만, 대문과 현관으로 향하는 중앙길에는 아무런 함정이 없었다.
설마 침입자가 정문으로 대놓고 들어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했겠지.
찰칵.
여유롭게 정원을 지나 대저택에 도착한 나는 당당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현관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하지만 나비의 힘으로 마법도 걸려 있지 않은 잠금장치를 푸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기척을 느낀 대로 대저택의 중앙 홀은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사람들에게 내가 안 보인다고 해도 문이 저절로 열리는 건 부자연스러웠으니 조심했다.
나는 나비와 은하가 탐색한 정보대로 사람이 없는 1층의 비밀 공간부터 살폈다.
비밀 공간이 있는 방까지 가던 중 밤늦게까지 일하는 사용인들을 마주쳤지만, 아무런 단련되어 있지 않은 사용인들은 날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 그림 멋지네.”
나는 첫 번째 방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며 마법이 걸려 있지 않은지 살펴봤다.
그림은 물론 그림 뒤에 있는 비밀공간에도 보안 마법은 걸려 있지 않았다.
나는 그림을 들춰내고 비밀 공간에 놓여 있는 금고를 꺼냈다.
“쳇, 차라리 마법 금고였으면 편할 것을."
발견한 금고는 철저한 기계식 금고였다.
나는 이래 봬도 현자의 의발제자(衣鉢弟子:모든 것을 물려받은 제자)다.
그 과정이 심히 벼락치기였지만, 핵심과 뼈대는 생전에 모두 이어받았다.
지금도 틈틈이 실루아를 통해 게오르의 영혼 파편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내게는 차라리 마법 금고가 더 뚫기 쉬웠다.
사실 기계식 금고도 터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에 비리 장부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이상 시간 낭비를 할 순 없었다.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까보도록 하자.
나는 금고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금고를 대신할 선물을 놓은 뒤 다시 원래대로 그림을 얹었다.
“좋아, 다음으로 넘어갈까.”
1층의 다른 곳을 털고 2층의 비밀 공간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2층의 방은 아이 방이라 방문 앞을 경비병이 지키고 있었다.
나는 별 수 없이 아래층에서 창문을 통해 몰래 들어갔다.
방 안에는 어린아이가 인형을 끌어안고 곤히 잠자고 있었다.
나는 꼬마가 깨지 않게 비밀 공간을 확인하고 재빨리 나왔다.
꼬마가 있는 방에는 선물 대신 작은 인형을 놓아두었다.
1층과 2층을 훑은 나는 경비가 심한 3층이 아니라 지하로 향했다.
지하에는 들를 곳이 많았지만 귀한 걸 보관하는 곳은 아닌 듯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챙겨야지.
“오, 이 집주인 술 좀 마실 줄 아네!”
지하실에는 와인 저장고가 있었는데, 하나같이 이름난 귀한 술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술은 당연히 전부 챙겨야지.
퐁!
“크으~! 이 향기! 최고구만.”
와인 저장고 옆에는 온갖 명주들이 가득했다.
식자재 창고가 다시 두둑해진 기분이다.
다 챙기고 지하의 숨겨진 비밀 공간들을 살펴보니, 공간 자체가 하나의 금고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보안 마법이 걸려 있기는 했지만 몰래 뚫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쯧쯧, 이렇게 허술해서야. 어지간히도 싼값에 마법사들을 부린 모양이구만. 음, 안에 있는 것들은 일단 챙겨둘까.”
각각의 비밀 공간에는 금괴와 각종 미술품, 보석, 그리고 희귀한 마법서와 마도구까지. 꽤나 종류가 다양했다.
이 부정 축재한 것들은 내가 알차게 사용하기로 하고 대신 선물을 놓아두었다.
지하에서 올라온 나는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고민했다.
다른 층과 달리 3층은 백작 본인이 기거하는 층이라 그런지 계단에서부터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냥 경비병들만 있다면 모를까, 정령의 눈으로 확인해 본 결과 제대로 된 기사들이 교대하며 지키고 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나 혼자 뚫고 지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럼 평범한 방법이 아니면 되지.
“루루팡, 루루피, 루루얍!”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쾅-! 쾅-! 콰과과과광-!!
동시에 내가 비밀 공간에 놓아둔 선물, 마법 폭탄이 터지며 지축이 흔들렸다.
“아하하하하! 폭발은 예술이다!”
거기에 저택 위로 은하의 힘으로 드래곤의 환영을 만들어냈다.
우르르르… 콰과광-!
그리고 그 주변에 누니의 힘으로 만든 벼락이 비산하며 분위기를 잡아냈다.
“끼에에에에엑-!!”
드래곤 환영이 입을 벌리며 나비의 힘으로 만들어낸 우렁찬 울음소리가 도시 전역에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