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주가 조작 드래곤 (5)
보랏빛 머리칼의 드래고니안 소녀.
아니, 드래곤 바하무트는 자신의 이름을 듣자 놀라며 동공이 뱀처럼 길어졌다.
마찬가지로 드래곤이라는 말에 내 일행들도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그런데 가지고 오신 건 정보지가 다입니까? 신문도 구독했는데요.”
내 능청스러운 물음에 바하무트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석간신문을 건넸다.
“여기 있다.”
“감사합니다. 아, 무역선 투자 권리 증서 거래할 때 내 이름은 사용할 수 없어서 네 이름 사용했어. 괜찮지?”
저질러 놓고 괜찮으냐고 묻는 나를 보며 제이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는 말씀하시고 사용해 주세요.”
내가 이름을 마음대로 사용했다는 것보다 바하무트의 존재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뭐라고? 마도서 더 읽기 싫다고?”
“아니요, 언제든 마음껏 사용하라는 걸 잘못 들으신 모양입니다. 귀 파드릴까요?”
내 농담에 제이드가 능글맞게 받아치자 나는 낄낄거리며 바하무트를 테이블 앞으로 안내했다.
넓지는 않지만 스위트룸으로 빌린 덕분에 손님을 맞이할 공간은 있었다.
내 일행들은 하나같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실루아, 질리안 시리즈를 꺼내서 차 좀 내주겠어? 좋아하시는 차가 있습니까?”
바하무트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며 대답했다.
“커피가 좋겠군. 최근에 맛 들려서 말이야.”
“커피로 부탁할게.”
실루아는 말없이 긴장하며 바로 질리안 오리지널을 꺼냈고, 질리안 오리지널은 바로 마법 주전자로 물을 끓였다.
바하무트는 재미있다는 듯이 날 보며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이 제이드가 아니라면 자기소개부터 하지, 인간 정령술사.”
바하무트는 드래곤답게 내 몸에 달라붙어 숨어 있는 정령들을 알아봤다.
“유안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원래는 바알이라 소개하려 했지만, 바하무트다.”
그녀는 질리안 오리지널이 내온 커피를 음미하며 나와 내 일행들을 훑어봤다.
“재미있군. 초인에 현자에 버금가는 마법사, 완벽한 마법 생명체에 극히 희귀한 인간 정령술사, 그리고 평범한 인간이라.”
각각 프레시아, 제이드, 실루아, 나, 길버트를 의미했다.
여기서 내가 제일 평범할 줄 알았는데 드래곤의 눈에는 아니었나 보다.
나는 정령을 다루는 것 외에는 보잘것없는데 말이다.
길버트와 일대일로 싸우면 3초도 안 돼서 모가지가 썰릴 자신 있을 정도로 최약체가 바로 나다.
“그래, 유안. 내가 가볍게 장난치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바하무트가 말한 장난이란 이른바 주가 조작이었다.
그녀가 한 짓은 간단했다.
무수히 많은 무역선 중 썩거나 상하지 않는 상품을 실은 것들로 몇 개 골라 몬스터, 표류 등의 이유로 제 시간에 돌아오지 못하게 해 권리 증서의 가격을 폭락시켰을 뿐이다.
아니면 사재기 후 자연재해로 무역선을 침몰시켜 특정 무역품의 희소성을 높인다거나.
그녀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었다.
“당신이 장난을 치고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오호, 내 이름까지 알고 있었으면서 나인지 몰랐다?”
“당신의 정체는 당신을 보고 알았을 뿐입니다. 저는 그저 드래곤이나 그에 준하는 존재가 장난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뿐이죠.”
사실 드래곤이 굉장히 강한 존재인 건 사실이지만, 이 세상에는 드래곤 못지않은 괴물들로 득실거린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게 천하십검과 마도팔현이었다.
그 괴물들은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드래곤 못지않은 괴수들이었다.
“보랏빛 머리의 드래고니안이 흔한 존재는 아니지 않습니까. 차라리 뿔을 가리고 왔다면 저도 긴가민가했을 겁니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뿔을 가리고 왔어도 나는 그녀의 이름을 말했을 거다.
“오호, 그래도 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던 모양이군.”
“여러 소문에 귀를 기울여 두는 편이라서요.”
자하룡(紫霞龍) 바하무트는 이 대륙의 드래곤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드래곤 중 하나였다.
누가 뭐라 해도 그녀는 대륙의 드래곤들을 대표하는 드래곤 로드였으니까.
물론 드래곤의 숫자라고 해봐야 해츨링을 포함해도 쉰 마리가 넘지 않지만 말이다.
내가 싱긋 웃자 그녀는 더더욱 흥미롭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그럼 나와 같은 존재가 장난질치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간단합니다. 서류상의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죠. 서류를 살펴보다 보면 특정 패턴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게 지속적으로 큰 이익을 본 사람이라면 더더욱 눈에 띄죠.”
내 말에 바하무트는 날 취조하듯 바라봤다.
그녀의 강렬한 시선에서 무의식 깊숙이 자리한 생존 본능이 자극되었다.
마치 포식자 앞에 선 피식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래서 여러 이름으로 분산시켜 놨다만?”
나는 살짝 눈을 감아 날뛰는 생존 본능을 억누르고는 다시 눈을 떠 싱긋 웃어 보였다.
그저 시선에 불과한 이 정도는 검귀 데미웨이가 날 시험하겠다고 날린 투기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었다.
제아무리 바하무트라도 프레시아와 제이드를 앞에 두고 도심 속에서 전투가 벌어질 만한 짓은 하지 않을 거다.
그 정도 상식이 있으니 드래곤의 대표자가 된 것이기도 하다.
“예, 충분히 용의주도했습니다. 권리 증서를 쓸어 담을 수 있었으면서도 혹시 모를 시선을 피하기 위해 그러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지나치게 패턴화 되어 있더군요. 마치 한 사람의 명령에 따라 의무적으로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사실은 내가 권리 증서를 사면서 확인해 놨다.
내 대답에 바하무트는 깨달은 듯 고개를 주억였다.
“음, 확실히 내가 너무 관성적이 됐나 보군. 주의해야겠어.”
그러고는 재미있다는 듯이 악동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류상으로 나와 같은 존재의 장난질을 눈치챘다라…. 확실히 맹점이었네. 항상 거래할 때 담당 사무원에게 최면을 걸어서 정체가 드러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휴지 조각과 관련된 모든 서류를 뒤적이는 미친놈이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못했겠지.
실제로 나 역시 귀찮게 서류를 전부 뒤적이지도 않았고, 소설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들통 난 게 아니었다.
소설에서는 제이드가 실종된 선원의 가족의 부탁으로 표류한 무역선을 찾는 것이 계기였다.
제이드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면서 바하무트의 주가 조작이 들통 난 것이다.
그녀는 꼰 다리를 풀고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려놓았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일부러 눈에 띄게 내 장난질에 숟가락을 얹은 걸 보면 내가 찾아와 주길 바란 것 아닌가? 장난질을 그만두라고 할 셈인가?”
이런 주가 조작이 합법일 리 만무했지만, 놀랍게도 이곳엔 관련 법안이 없었다.
원래 법이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의 표본 같은 것.
사건이 터지지 않으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가장 최저한의 도덕이 법이었다.
사실 법이 없다 해도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왕국은 당장 바하무트를 멈추기 위해 군대를 움직일 거다.
아무리 그녀가 조절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명백히 물류의 흐름이 늦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장 경제가 어그러질 위험이 있었다.
멈추지 않는다면 드래곤 로드고 나발이고 호레이즌과 데미웨이, 그리고 위즐 백작을 비롯한 왕국의 괴물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와 그녀를 토벌하겠지.
어쩌면 국가 차원을 넘어 합종군이 편성될지도 몰랐다.
그녀가 이곳에서만 이런 짓을 벌였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그럴 리가요. 단순히 당신을 초대하겠다고 막대한 돈을 쓴 게 아니라서 말입니다. 겸사겸사죠.”
그녀의 장난질로 큰 피해를 본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 말은 반대로 큰 수혜를 입은 사람도 있다는 의미였다.
이번에는 그 수혜자가 내가 되겠지만 말이다.
“범죄나 다름없는 짓을 하는 날 막을 생각이 없다?”
“세상에 자연재해를 물리치겠다고 설치는 개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 같은 자연재해를 막는 건 국가가 할 일이지, 저 같은 미약한 개인이 할 일은 아닙니다. 개인은 그저 재해를 읽고 시류를 탈 뿐이죠.”
그녀는 능히 자연재해라 부를 만했다.
내가 하는 짓은 해일 위로 서핑 보드를 타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무려 드래곤의 뒤통수를 치고 이용해 먹는 일이었으니까.
이는 삐끗하면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짓이 될 수 있다.
사실 날 보호해 줄 프레시아와 제이드가 없었으면 나도 이런 시도는 하지 않을 거다.
아, 당연히 바하무트의 정보를 이용해 돈벌이는 했을 거다.
그저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야금야금 처리해 자금을 모았을 거란 소리다.
내 대답에 의미 없이 무게를 잡던 바하무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푸하핫! 아하하하하! 감히 날 이용해 먹겠다니, 이런 악당을 보았나! 영웅은 못 될 녀석이군!”
악당이라니 너무하네. 아무도 모르게 무역선을 납치해 표류시키는 게 누구인데.
“영웅이라니 큰일 날 말씀을.”
나는 절대 선역이 될 생각이 없었다.
내가 정의로웠다면 어스름 상회와 거래를 트지도 않았을 거다.
어스름 상회는 명백히 세금을 탈루(脫漏)하는 사회 암적인 존재였으니까.
“제가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하자는 주의라 말입니다.”
바하무트는 내가 마음에 든 듯 히죽거리며 날 바라봤다.
“마음에 드는군.”
그럴 줄 알았다.
지나치게 오래 사는 드래곤은 통상적으로 둘 중 하나다.
미쳤거나, 권태롭거나.
바하무트는 오랜 권태 속에서 잠깐의 재미를 줄 존재를 사랑한다.
지나가는 개미와 같은 내가 갑자기 그녀의 의표를 찔렀으니 마음에 들 수밖에.
“뭐, 들켰으니 이제 여기서 이런 장난질은 그만둘 거야. 꽤나 벌이가 쏠쏠했는데 아쉽네. 15년간 장난질로 벌어들인 돈이 지난 천 년간 벌어들인 것보다 훨씬 많았거든.”
바하무트는 숨바꼭질에서 술래에게 잡힌 사람처럼 투자판에서 손을 털기로 했다.
소설과 같은 반응이었다.
돈보다도 유흥이 목적이었기에 아쉬워는 해도 미련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벌이는 사업은 이것 외에도 많았고, 충분히 벌 만큼 벌었으니 그녀다웠다.
“아, 걱정하지 마. 표류시킨 무역선은 침몰하지 않고 차차 돌아올 거야.”
“그거 다행이군요. 손해는 안 보겠습니다.”
손해가 아니라 막대한 이윤을 보겠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지 대답을 못 들었는데? 일부러 날, 아니 나 같은 존재에게 눈에 띄는 흔적을 남겨 찾아오게 했으면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니야.”
바하무트는 기대감 섞인 눈으로 날 바라봤다.
마치 내가 재미있는 제안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태도였다.
“한 가지 정정하죠. 저는 당신 같은 존재가 아니라 자하룡 바하무트, 당신이 찾아올 것을 기대했으니까요.”
“오호, 나 같은 존재들 중에서도 날 특정했다는 건가?”
“확신은 없었지만 다른 드래곤들은 거리가 멀거나, 너무 어리거나, 이런 발상을 못 할 테니까요. 물론 당신이 아닐 가능성도 열어두었고, 그에 대한 대처들도 생각해 두긴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나는 어느새 비어버린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의 궁금증에 대한 대답을 했다.
“제가 당신과 만나고 싶었던 이유가 몇 가지 있긴 한데, 가장 큰 이유는 당신과 친해지고 싶어서입니다.”
내 대답에 바하무트는 놀란 얼굴을 했다가 다시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아하하하하! 이런 건방진 인간을 보았나! 감히 나, 자하룡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한낱 인간이?”
“뭐, 못 될 것도 없죠. 역사서를 읽다 보면 종종 나오지 않습니까, 드래곤의 친구가 된 사람들이. 아! 용기사 같은 게 되고 싶다는 말이 아니니 오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용기사가 되는 건 내 쪽에서 사양이다.
바하무트와 영혼의 계약을 한다면 당장 빠르고 쉽게 그녀의 힘을 빌릴 수 있지만 그 대가 또한 만만치 않았다.
내 말에 바하무트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으흠, 너라면 나의 용기사가 되어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거 참, 위험한 소리 하시네.
내가 미쳤다고 드래곤 같은 것들과 일생을 함께할 리 없지 않은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 마시죠.”
“우후후후, 아예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아닌데? 뭐, 네 육신은 아주 별로지만, 그건 대부분의 인간이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거든.”
그녀의 시선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의 의미는 알고서 하는 거야?”
바하무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내기 한판 하시죠.”
그녀의 친구가 되고 싶다면 그녀와의 내기에서 승리해야만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