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주가 조작 드래곤 (4)
어스름 상회 질리빌 지부에서 예상치 못한 소비를 한 나는 몇몇 값비싼 장신구와 패물을 팔 수밖에 없었다.
지부장인 조르딕은 내가 판매한 것들을 보며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좋아 죽으려 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내가 판매한 것들은 부티크에서 뜯어낸 최고급품이다.
일개 지부에서 판매하는 것보다 이후 있을 대륙 경매에 출품하면 몇 배는 더 받을 수 있을 물건들이었다.
그의 안목이라면 분명 고이 보관했다가 대륙 경매에 내놓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시중에 흘러나가는 시기도 늦출 수 있을 뿐더러 부티크의 추적도 막을 수 있다.
대륙 경매에 출품된 물건의 출처를 캐고 다니는 건 그림자 상회와 전쟁을 하겠다는 선전 포고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좋은 거래였습니다.”
내 인사에 조르딕은 영업용 미소를 잃지 않으며 인사를 받았다.
“저희야말로 좋은 거래였습니다. 질리빌에 있을 때는 언제든 방문해 주십쇼. 성심성의껏 응대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프레시아와 어스름 상회를 벗어났다.
프레시아는 혹시 추적이 있나 신경 썼지만 내 정령들의 감지 범위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빛의 정령인 은하가 있는 이상 빛이 닿는 곳에서 내 눈을 속일 수 없다.
상회에서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프레시아는 야드의 천변가면을 벗으며 물었다.
“돈은 충분히 버신 것 같은데 정말 주식을 하실 겁니까?”
오늘 내가 번 돈이면 흥청망청해도 어지간해서 올해 안에 돈이 떨어질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일주일이면 못해도 수십 배로 불릴 수 있는데 안 하는 사람이 바보지.”
물론 돈만 목적인 건 아니었다.
내 자신감에 프레시아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천변가면을 씌우고는 원래 목적지인 질리빌 종합무역상공회의소(綜合貿易商工會議所)로 들어갔다.
이 시대의 주식은 회사에 투자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투자의 대상은 바로 무역선(貿易船).
정확히는 무역선이 싣고 올 무역품이었다.
투자 방법은 약 17세기 대항해 시대와 유사했다.
투자자를 모아 돈을 걷은 다음, 걷은 돈으로 사치품을 사서 원거리 무역선을 보낸다.
무역상은 해당 나라에서 물건들을 비싼 값에 팔고, 다시 그 돈으로 무역품을 구매해 돌아온다.
돌아온 물건의 판매 수익금을 투자한 퍼센티지만큼 돌려받는다.
아무리 마법이 있는 세상이라지만 증기 기관이 없는 세상에서 무역선의 항해는 굉장히 길다.
마법이 있어도 해적과 해양 몬스터라는 위험 요소를 감안하면 대항해 시대의 무역보다 위험한 항해일 게 분명했다.
그런 만큼 종합무역상공회의소에서는 무역품에 대한 권리 증서를 발급하고, 그 권리 증서의 거래를 중개한다.
일종의 주식 거래소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굉장히 북적거리네요.”
프레시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거대한 건물의 1층은 중앙의 창구와 곳곳의 건물 기둥들을 제외하면 탁 트여 있었다.
구역마다 유명 상단이 자리 잡고 간판을 세우거나 무역품 경매를 했다.
“여긴 단순히 권리 증서 거래만 하는 곳이 아니라 도착한 무역품 경매나 상단 간의 거래도 중개하는 곳이니까. 이곳에 관세청도 있을걸?”
“그렇군요.”
이 나라로 들어오는 수입품의 절반 이상이 이곳을 거쳐 들어오는 만큼 북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중앙을 가로질러 벽면에 빼곡히 적혀 있는 무역선 입항 현황과 투자 목록, 그리고 투자자 명단을 훑어봤다.
“윽, 어지럽네요.”
프레시아는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지 인상을 썼다.
확실히 숫자도 많고, 읽기 어렵게 작은 글씨로 이 넓은 벽면을 매웠다. 그리 친절한 현황판은 아니었다.
나는 갓 출항한 무역선과 도착 기한이 많이 남은 무역선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기간이 많이 남은 것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했지만, 리스크도 크고 오래 기다려야 했다.
내가 주목한 무역선은 예상 도착 기한이 지나 권리 증서가 폭락해 반쯤 휴지 조각이 되어버린 것들이었다.
즉, 회의소에서 투자 실패 낙인을 찍어버린 배였다.
내 투자 신조는 어디까지나 쓰레기더미에 투자해 보물을 건져 올리는 것이다.
“도련님…?”
프레시아는 더더욱 불안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확실히 여기 적혀 있는 목록에 투자하는 건 돈을 버리는 짓이었다.
내게 소설 속 정보가 없었다면 말이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언제 틀린 선택을 한 적 있어?”
물론 소설에서 투자하라고 떡상 할 무역선 이름과 떡락 할 무역선 이름을 가르쳐 준 건 아니다.
그딴 재미없는 걸 일일이 서술하는 소설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설령 가르쳐 준다고 해도 지금 시점에서는 써먹을 수 없는 정보다.
…아니, 생각해 보니 그건 그것 나름대로 써먹을 수 있었겠는데?
잠시 잡생각에 빠졌다가 고개를 도리질 치며 무역선 투자 정보에 집중했다.
“욥 아이시클, 바알 시클레에롭, 아브 홀로그리라, 젤리 커즈민, 검블 졸로필린….”
나는 이름들을 중얼거리며 투자자 명단에 집중했다.
내가 중얼거린 이름들은 모두 한 사람의 차명(借名)이었다.
정확히는 위조 신분이라 할 수 있었다.
예상 도착 시간에서 적게는 5개월, 많게는 2년 정도 지체된 무역선들의 투자자 명단에서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노트에 도착 시간이 오래 지연된 순서대로 받아 적었다.
“여기 중 몇 개나 적중하려나?”
투자자 이름에서 발견했다고 해도 100퍼센트 적중하는 건 아니다.
적중률은 대략 70퍼센트 남짓.
물론 모두 구매한다고 해도 이미 헐값이 된 투자 권리이니 손해는 미미했다.
그래도 가급적 많이 맞았으면 좋겠네.
노트에 메모를 끝낸 나는 프레시아를 데리고 2층의 ‘무역선 투자 권리 증서 거래소 창구’로 갔다.
“위탁 판매가 되어 있는 무역선 권리 증서를 구매하고 싶은데요.”
권리증서의 거래는 둘 중 하나다.
언제든 팔 수 있도록 회의소에 위탁 판매를 맡겨놓은 매물을 사거나, 회의소를 통해 권리 증서 주인에게 구매 의사를 전해두거나.
내가 구매하려는 건 전자였다.
내 말에 서류 작업에 열중하던 창구 사무원은 영업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혹시 보신 무역선 등록 번호가 있으실까요?”
사무원의 물음에 나는 메모를 살펴보며 대답했다.
“조금 많습니다. 우선 A34-0023497, B12-0000459, B23-006….”
“아, 잠시만요. 천천히 부탁드립니다.”
사무원은 내가 말한 것들을 받아 적었다.
다 받아 적은 사무원은 목록표에서 내가 말한 무역선을 찾으며 물었다.
“얼마나 구매하실 생각이신가요?”
“있는 매물 전부 구매할 생각입니다.”
“제정신… 크흠! 죄송합니다.”
사무원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한눈에 봐도 휴지 쪼가리인 것들을 돈 주고 사겠다는 멍청이가 찾아왔으니 나 같아도 제정신이냐고 물었을 거다.
당연히 나는 제정신이다.
“요청하신 위탁 증서를 가져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사무원은 옆자리의 동료에게 방금 전까지 하던 일을 맡기고 메모지와 목록표를 가지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으로 향했다.
워낙 드나드는 무역선이 많다 보니 하나하나 찾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지 꽤 오래 기다렸다.
전산화가 되어 있었다면 검색 한 번에 금세 나왔을 텐데. 이런 데서 현대 문물이 아쉽다.
기다리는 동안 프레시아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창고로 들어갔던 사무원이 서류가 담긴 상자를 들고 왔다.
“이게 무역선의 계획서이고, 이게 투자 권리 증서 거래 계약서입니다. 신분증은 가지고 계십니까?”
“여기 상행 허가증이 있습니다.”
내가 내민 상행 허가증을 본 사무원은 능숙하게 몇 가지 서류를 추가 작성했다.
“네, 제이드 하이트필 님. 확인되셨고요. 각 거래 서류의 이곳에 인적 사항을, 이곳, 이곳에 사인 부탁드리고, 이곳에 현재 거주지를 기입해 주시면 됩니다.”
나는 사무원이 시킨 대로 열심히 사인을 했다.
워낙 많은 양을 구매하다 보니 중간부터는 손이 저려올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서류를 작성하고 창구 위에 매입금과 거래 수수료를 올려놓았다.
하나하나는 헐값에 불과했지만 모두 계산하니 어스름 상회에서 번 돈의 절반 이상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워낙 무역선 투자가 거금이 왔다 갔다 하는 투자 상품이다 보니 헐값이 되어도 비싼 탓이었다.
거래 수수료가 비율 정산이 아니라 건당이라 거래 수수료가 더 많이 들었다.
사무원은 돈을 확인하고는 날 호구 보듯 바라보며 물었다.
“이것으로 모든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권리 증서 위탁 여부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위탁한다는 것은 중개소에서 마음대로 팔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위탁하지 않고 가져가겠습니다. 그럼 고생하세요.”
프레시아가 투자자용 권리 증서가 담겨 있는 상자를 챙기자 나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도련님, 역시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하하하!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야. 나만 빼고.”
프레시아의 걱정에 나는 키득거리며 항구 근처의 신문사에 들러 신문과 무역선 입항 정보지를 구독했다.
이제 신문사에서 한 달 동안 매일 아침저녁으로 내가 머물 숙소로 신문과 정보지를 배달해 줄 거다.
마음 같아선 일주일만 구독하고 싶었으나 한 달 단위 계약이 기본이었다.
별것 아닌 돈이지만 왠지 아까웠다.
* * *
내 일행들이 숙소에 모인 시간은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다들 시킨 일은 다 했어?”
내 물음에 실루아가 활기차게 대답했다.
“네! 말씀하신 대로 대장간을 완전히 전세 냈어요.”
“싫어하진 않고?”
제이드는 마탑에서 산 마석 자루를 침대 위에 올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안이 돈을 꽤 많이 챙겨 줬잖습니까, 유급 휴가라고 다들 좋아하더군요. 지금쯤 한창 질리안 시리즈가 재련을 하고 있을 겁니다.”
좋은 소식임에도 한숨을 내쉬는 걸 보아하니 마탑 물건들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 유명한 마탑이라 기대했는데, 실망했습니다. 대외 공개에는 정보 제한이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너무 심하더군요.”
“맞아요! 기껏해야 기초 마법서나 팔고! 그런 건 어머니가 쓴 게 훨씬 더 자세하고 좋다고요!”
나는 그런 두 사람에게 어스름 상회에서 구한 마도서를 던져줬다.
“큭큭큭, 그럴 줄 알았다. 자, 옛다.”
마도서를 받아 든 제이드와 실루아는 마도서에서 풍기는 마력에 눈을 반짝였다.
마탑에서도 못 구할, 아니 마탑에서도 눈이 벌게져서 달려들 물건이었다.
“역시 유안입니다! 잘 보겠습니다!”
“앗! 저부터 볼래요!”
한 권뿐이라 제이드와 실루아는 서로 먼저 보겠다고 다투기 시작했다.
“싸우지 말고 조용히 봐. 안 그러면 또 안 구해다 준다!”
나는 제이드의 엉덩이를 걷어차 방구석으로 밀어넣고 프레시아와 길버트에게 말했다.
“마법 금속 재련이 끝나면 그걸로 두 사람 갑옷부터 맞추자. 내 호위 기사면 그럴듯한 갑옷 정도는 있어야지.”
앞으로를 생각하면 제일 앞에서 검을 휘두르는 두 사람을 보호해 줄 좋은 갑옷 정도는 있어야 했다.
재료도 충분하고 이 근방에 숨어 사는 난쟁이가 하나 있으니 꽤 괜찮은 걸 만들 수 있을 거다.
“도련님…!”
두 사람은 감동한 듯 날 바라봤다.
나는 별것 아니라며 손을 내저으며 길버트에게 시켰던 심부름을 확인하려 했다.
똑똑!
“제이드 하이트필 있습니까?”
방문을 두드리며 제이드를 찾는 목소리에 구석에서 실루아와 마도서를 읽던 제이드가 귀찮다는 얼굴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노크를 한 이는 옅은 보랏빛 머리카락에 머리에 뿔이 달린 드래고니안 소녀였다.
드래고니안은 전 대륙에서도 손을 꼽을 정도로 희귀한 종족이었다.
그녀의 등장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제이드 하이트필인데, 무슨 볼일이십니까?”
제이드의 물음에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이 제이드를 바라봤다.
“흐응, 네가 제이드란 말이지? 축하해. 무역선 ‘수정 물고기호’가 방금 입항했어. 부자 되셨네.”
드래고니안 소녀는 제이드에게 무역선 입항 정보지를 건넸다.
내가 구독한 정보지였다.
나는 제이드 대신 정보지를 받으며 싱긋 웃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욥 아이시클 씨.”
그녀는 뭐냐는 듯이 날 바라봤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욥이 아니면 뭐라 불러 드릴까요? 바알? 아브? 젤리? 아니면 바하무트 님이라 불러 드려야겠습니까? 위대한 드래곤이시여.”
눈앞의 소녀는 위대한 마법의 주종이자, 이 대륙 모든 드래곤의 대표자.
그리고 대(大)주식의 시대에 왕성히 활동하는 과감한 작전 사기꾼, 자하룡(紫霞龍) 바하무트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