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주가 조작 드래곤 (3)
나는 종합무역상공회의소에 방문하기 전에 야드의 천변가면과 머리끈으로 얼굴과 머리색을 바꾸었다.
그러고는 시드 머니(seed money)를 구하고자 블랙마켓인 어스름 상회로 향했다.
질리빌의 어스름 상회 지부는 왕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답게 그 규모가 굉장히 컸다.
“행복 상회라. 아예 대놓고 가게를 차렸구만? 들어가자.”
동네 구석 술집에 차렸던 이전 도시의 어스름 상회 지부와는 달리 아예 4층짜리 빌딩 전체를 사용하며 양지에서 규모 있는 상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렇게 번화가에서 대놓고 장사를 한다는 건 이 지역 호족과 관리들이 묵인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수도에서도 이렇게 크게 운영하지는 못했을 텐데 지부장이 누구인지 몰라도 참 대단하다.
아니, 수도에는 부티크 때문에 세를 확장하지 못한 건가?
가게 1층은 만물상을 꾸려놓고 일반 손님들을 받고 있었는데, 장사가 꽤 잘되는지 사람으로 붐볐다.
나는 책자에 적힌 방법대로 접선을 위해 후박(厚朴)엿 두 개를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후박엿의 개수는 입장 손님 숫자였다.
“영수증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부탁에 점원은 말없이 종이 위에 수기로 영수증을 작성했다.
“사인 부탁드립니다.”
나는 고객용과 가게용 사인란에 대충 휘갈기고 끝에 별 두개를 추가해 그렸다.
내가 사인을 마치자 점원은 가위로 영수증을 반으로 잘라 나누었다.
고객용 영수증을 들고 가게를 나서 건물 뒤로 향했다.
그러자 뒷문이 열리며 정장 차림의 사내가 들어오라 손짓했다.
양아치 집단답지 않게 신사같이 생겼다.
“처음이십니까?”
대뜸 묻는 문지기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곳은 가봤지만 이곳은 처음이군요.”
“사러 오셨습니까? 팔러 오셨습니까?”
“팔러 왔습니다. 아, 이것도 있습니다.”
내가 임시 VIP 카드를 보여주자 사내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바로 안내드리겠습니다.”
나와 프레시아는 4층으로 안내받았다.
안내받은 방은 저번 도시와 달리 굉장히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마치 어스름 상회가 아니라 부티크에 온 기분이었다.
“웰컴 드링크입니다. 편히 앉아 계시면 곧 담당자가 올 겁니다.”
우리를 안내한 사내가 음료와 다과를 내려놓고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구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와 맞은편에 앉으며 명함을 꺼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스름 상회 질리빌 지부 매입처 4부장 보팔 어빗이라 합니다. 무엇을 팔러 오셨습니까?”
나는 명함을 확인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얼마 전에 봤던 공갈 사기꾼 양아치 놈과 달리 퍽 정중했다.
재미없는 녀석이구만.
“몬스터 사체와 보석 몇 개를 팔러 왔습니다. 몬스터가 꽤 많은데 괜찮겠습니까?”
“네, 몬스터 사체와 보석 말씀이시죠. 우선 양이 많은 몬스터 부산물부터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아, 부산물 감정팀 들어오도록.”
통신 마도구에 대고 말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장정 다섯이 들어왔다.
그들의 등장에 나는 아공간에서 몬스터 사체를 하나씩 꺼냈다.
바스타유 산맥에서 사냥한 것들 중 그다지 가치 없는 것들이지만 일단 꺼냈다.
당연히 마석은 내가 사용할 거라 아공간에 고이 보관하고 있었다.
바스타유 산맥의 몬스터들은 유독 강한 대신에 마석의 품질이 좋았다.
사체가 점차 쌓여가자 매입처 4부장은 사색이 되며 손을 들었다.
“그, 그만! 더 이상은 저희로서 매입이 어렵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아직 반도 안 꺼냈는데. 곤란하군요.”
정말 곤란하다. 길버트와 제이드에게 돈을 많이 쥐여줘서 당장 돈이 부족했다.
“그럼 우선 이것들부터 감정 시작해 주시고, 더 높은 분 계십니까?”
내가 임시 VIP 카드를 흔들어 보이자 4부장은 몬스터 사체를 흘끔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앞으로 꺼낼 것들도 이 정도 품질입니까?”
사체가 신선하고 상처가 적다.
매입처의 부장씩이나 되는 사람답게 대략적인 견적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물론입니다. 더 희귀한 것들도 있죠.”
“처장님, 아니 지부장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너희들은 감정 시작해.”
4부장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사내를 데려왔다.
나는 지부장을 보며 피식 웃었다.
“지부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입구를 지키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그는 입구에서 우리를 안내하던 정장의 사내였다.
젊어 보이는 그가 이 커다란 곳의 지부장이었을 줄이야.
“제 작은 취미입니다. 항상 지켜보는 것은 아니고, 관심이 있는 분의 방문이 예상될 때나 지키고 있죠. 아참, 아크라의 제 친동생이 신세를 졌습니다.”
아하, 그 양아치 공갈범이 동생이었나?
그러고 보면 머리색이나 눈매가 닮아 있었다.
인상은 양아치와 신사, 정반대였지만.
그의 인사에 프레시아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검에 손을 가져다댔다.
아마 뒤를 밟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감각이 뛰어난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내 정령이나 초인, 현자의 감각을 피할 수 있는 강자라면 어스름 여왕을 보필하고 있지, 이런 지부에 있을 리 없다.
나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 말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어스름 상회가 뒤도 밟습니까?”
내 물음에 그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그저 멍청한 동생 녀석 밑에 있는 제 부하가 고객님이 질리빌로 향하는 여객선을 탔다는 정보를 보내왔을 뿐입니다.”
지부장쯤 되면 어느 날 여객선이 도착할지 아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얼굴이 다를 텐데요?”
지금 나와 프레시아는 인상착의를 바꾼 상태다.
“그래서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방문 때마다 얼굴을 바꾸는 고객님은 드물지 않게 있답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암거래상이다 보니 말이죠. 제가 알아본 것은 임시 VIP 카드 덕분입니다.”
생각해 보니 발급에 제한 횟수가 있다고 했었다.
발급자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는 듯했다.
“고객 창구 위치를 구매하신 고객님이라면 분명 저희 매장에 찾아주시리라 믿고 기다렸습니다.”
“오호, 날 기다렸다라. 동생의 복수라도 하실 겁니까?”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다시 한번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지부장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리가요. 오히려 제 멍청한 동생을 사지 멀쩡히 놔두시고 교육시켜 주신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답니다.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질리빌 지부의 지부장 조르딕 데펠로호그라고 합니다.”
지부장이 건네는 명함을 받아든 나는 중얼거렸다.
“조르딕 데펠로호그?”
조르딕이라면 어스름 여왕의 왼팔로 측근들 중에서도 최측근일 텐데?
아니, 그것도 지금 시점에서는 거의 5년 뒤 정보구나.
미래의 부티크 수장이 되는 율리안 슐츠도 아직 어린 꼬맹이였으니, 미래의 어스름 여왕의 왼팔이 이런 데서 지부장을 하고 있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절 아십니까?”
조르딕의 물음에 나는 능청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제 알게 되겠죠.”
“그거 좋은 말씀이시군요.”
“그래서, 절 기다린 이유는?”
내 물음에 조르딕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새로운 임시 VIP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고객님의 풍문을 듣고 생각했습니다. 아! 고객님께서는 우량 고객이 되실 분이다. 제 우둔한 동생 녀석은 멍청하게도 고객님을 알아보지 못했죠. 저라면 고객님의 가치를 우습게 보지 않을 겁니다.”
나는 이미 임시 VIP 카드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같은 카드를 내놓는다?
어째서일까….
3초 정도 고민해 본 결과 나는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비정하군요. 동생의 실적을 가로채겠다는 겁니까?”
내 물음에 조르딕은 놀라는 한편 진한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미 가지고 있는 카드를 내놓는 이유는 하나뿐이죠. 이 카드를 대고 구매하거나 판매하면 카드를 발급한 사람의 실적이 되는 구조 아닙니까?”
즉, 조르딕은 내가 가진 동생의 임시 VIP 카드를 회수하고 자신의 카드를 쥐여줌으로써 앞으로 내가 어스름 상회를 이용하는 모든 실적을 갖겠다는 의미였다.
이런 카드를 고작해야 비싼 값에 호구 잡으려던 동생과는 다른 시선이다.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군요. 맞습니다. 그래서 제 카드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이 카드를 받지 않는다면 몬스터 사체 판매는 여기까지인 겁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임시지만 카드까지 소유하고 계시니 제 재량으로 조금 더 매입해 드리겠습니다. 그 카드는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뿐이겠군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능글맞게 웃는 그를 보며 나는 가지고 있던 카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의 카드를 집어 들었다.
“이러면?”
“몬스터 사체를 마음껏 꺼내셔도 괜찮습니다. 지금 꺼낸 것의 다섯 배여도 매입해 드리죠.”
어차피 소화가 가능하다면 매입도 실적에 들어갈 거다.
몬스터 사체는 공급보다 수요가 높아 고가품에 속한다.
자신의 이득으로 생색을 내는 걸 보면 천생이 장사꾼이었다.
훗날 어스름 여왕이 자신의 왼팔로 삼을 만했다.
“그것 참 마음에 드네요. 그럼 사양치 않겠습니다.”
어스름 상회에 팔고 난 다음에 규모 있는 상단에 나눠 팔려 했는데, 귀찮은 일 없이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겠다.
나는 계속해서 몬스터 사체를 꺼냈고 조르딕이 말한 다섯 배를 넘어 계속 꺼냈다.
“자, 잠시만요. 고객님?”
“왜요? 그만 꺼낼까요? 그냥 여기서 제가 물량을 털어버리는 게 당신한테 좋을 텐데요?”
조르딕은 내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만만치 않으신 분이군요. 저희가 다 소화하지 못하면 다른 상단에 대량으로 풀어 시장 가격을 낮춰 버리시겠다는 겁니까?”
수요 공급의 법칙에 따라, 수요가 유지될 때 공급이 줄어들면 가격은 올라간다.
반대로 공급이 늘어나면 가격이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회사들이 어떻게든 독과점을 하려고 하고, 국가에서는 독과점을 막으려는 이유가 그래서였다.
“임시라지만 VIP의 판매를 거절하진 않겠죠? 아, 물론 한곳에만 파는 만큼 가격을 더 쳐주리라 믿고 있습니다.”
나는 싱긋 웃으며 협박했다.
VIP의 거래를 거절하는 건 어스름 상회 내부적인 신뢰도 평가에서 타격이 크다.
거절한 사실이 알려지면 굶주린 하이에나(타 지역 지부장)들이 그를 잡아먹기 위해 달려들 터였다.
큰 손해를 감안하고 매입을 거절할 거냐, 아니면 이득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손해를 보지 않을 거냐.
손익 계산이 능한 사람이라면 전자는 애초에 고려할 만한 선택지가 아니다.
“…매입하겠습니다. 고객님께선 무서우신 분이군요, 더더욱 친하게 지내야겠습니다.”
“당신과의 친분은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친구가 된 기념으로 귀한 정보를 드리죠. 지금 매입하는 몬스터의 부산물은 못 해도 1년은 묵혀두십쇼.”
내 정보에 그는 미간을 좁혔다.
“어째서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악동처럼 웃었다.
“없겠습니다.”
왕국의 몬스터 부산물의 40퍼센트는 바스타유 산맥에서 나온다.
하지만 향후 10년간은 바스타유 산맥이 얼어붙을 테니 내년부터 부산물 가격이 폭등할 거다.
나야 나중에 필요할 때 얼어붙은 바스타유 산맥에서 얼어 죽은 몬스터 사체를 회수하면 그만이었다.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지금 팔아도 딱히 손해가 아니었다.
물론 내가 가는 건 아니고 냉기 면역인 제이드가 갈 거다.
내 말을 믿는다면 그는 큰 이익을 볼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보다 빠르게 어스름 여왕의 왼팔이 될 수 있겠지.
믿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손해 볼 것은 없다. 통상적인 이익보다 덜 벌 뿐이다.
그저 나중에 배가 아플 뿐이겠지.
“…유념하겠습니다.”
조르딕은 미심쩍은 얼굴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정보를 받아들인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났다.
결국 그는 처음 꺼낸 몬스터 사체의 열 배를 내게서 웃돈을 얹어 매입했다.
이 정도면 여러 곳에 파는 것에 비해 훨씬 많이 받은 데다 시간까지 아꼈다.
속이 많이 쓰려 보였지만 그가 얼마나 큰 행운을 잡은 건지 지금은 알 수 없으리라.
알지 못해 놓쳐도 재미있겠군.
“자금적 압박이 심할 테니 보석 판매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지부장은 능숙하게 카탈로그를 꺼냈다.
“고객님께선 운이 좋으십니다. 마침 귀한 것들이 입고되어 있는데 어떠십니까?”
어쩔까? 이미 초기 자본금의 목표치는 채웠다.
하지만 잉여 자금도 주식에 때려 박는다면 더 큰 이익을 볼 자신이 있다.
“마도서에 관심 없으십니까? 마법서가 아닌 마도서입니다. 얼마 전 탐험가들이 유적에서 발굴한 것들이죠. 매물이 많지도 않은 데다 수요도 넘쳐나는 것 정도는 아실 겁니다.”
“하! 장사 잘하시네.”
마도서는 그 자체만으로도 마도구로 분류되는 귀물이었다.
특히 유적에서 발굴했다면 그 가치는 그저 마법 정보만 적혀 있는 마법서와 비교가 불가능했다.
역시 돈보다는 아이템이 우선이지.
돈이 부족하면 보석도 팔면 된다.
어차피 부티크에서 왕후 이름으로 삥땅 친 것들이 한가득했다.
이 아들놈이 감사히 사용하겠수다! 왕후님!
정말이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