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주가 조작 드래곤 (2)
땡땡땡땡-!
여객선 객실장이 열심히 종을 치며 승객들에게 내릴 준비를 시켰다.
닷새간의 항해가 끝나고 휴양 도시에 도착했다.
“날씨 좋네.”
질리빌은 휴양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름다운 해변가와 활기찬 도시 풍경으로 우리를 반겼다.
“걱정하시던 것과 달리 아무 일도 없었군요.”
제이드의 농담에 나는 쓰게 웃었다.
“그러게 말이야.”
내 예상과 달리 프레시아는 연공법을 전수하는 내내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분명 처음 승마를 배웠을 때 장애물 경주시킨 것처럼 미친 스파르타 교육법을 실시할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다.
물론 어느 정도 엄한 모습이 있기는 했지만 통상적인 범주 안이었다.
괜히 공포에 떨었다.
내 말에 프레시아는 뾰로통하게 말했다.
“너무하십니다! 마력을 다루는데 제가 무리시킬 리 없잖아요!”
길버트에게는 그런 무리를 시키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시선에 닷새간 사용했던 짐들을 챙기던 길버트는 왜 자신을 보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방을 메고 하선 준비를 하는 길버트는 지금도 자연스럽게 연공 중이었다.
얼마나 험하게 단련시켰는지, 잠자는 시간 외에는 생활하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공을 하고 있었다.
웃긴 건 제이드도 프레시아와 길버트에게 감명받아 생활하면서 마력 회로를 단련시키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소설에서도 미친 짓이라고 안 따라 했었는데 말이다.
한 사람이 하면 미친 짓이고, 두 사람이 하면 새로운 시도라나?
내가 보기에는 죄다 미친놈들 같았다.
내 시선의 의미를 눈치챈 프레시아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길버트와 도련님은 목적이 다르잖아요.”
길버트는 타인을 지키는 호위 기사고, 나는 스스로를 보호하는 호신 목적이니 틀리진 않았다.
“뭐, 그건 그렇지.”
내가 납득하고 넘어가려는데, 프레시아는 무시무시한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직 하루 종일 하기에는 숙련되지 않았고요.”
잠깐, 불길하게 왜 나를 바라봐? 나도 길버트처럼 저런 미친 짓을 시킬 건 아니지?
내가 묻기도 전에 프레시아는 도망치듯 탐험을 하고 있는 실루아를 챙기러 멀어졌다.
따라가서 묻기에는 무서워서 묻지 못했다.
* * *
담배 가게 위층, 생활 공간이자 각종 약초가 보관된 연구소 모습에 예카트리체는 신기한 듯 구경했다.
“콜록! 앤트의 여린 잎, 우담바라의 꽃잎, 아각다리의 겹날개…. 이 기름은 설마 공청석유인가요?”
겨울나무의 현자였던 그녀도 구하기 힘들 갖가지 재료에 눈을 반짝였다.
마치 희귀한 보석과 장신구를 바라보는 귀부인같이 들뜬 모습에 아라드리네는 피식 웃었다.
“예, 그렇습니다. 구할 수 있는 산지(産地)는 알고는 있지만 더 이상 못 가는 곳이라 아끼는 기름이죠.”
각종 약재가 나는 산지는 과거 그녀가 속했던 독원이 지배하는 땅이었다.
독원의 제거 리스트 최상단에 위치한 아라드리네는 더 이상 구할 수 없었다.
“걱정 마세요. 제 병만 다 낫는다면 제가 구해다 드릴 테니.”
“그거 말만 들어도 든든하네요.”
예카트리체의 말에 아라드리네는 웃으며 유안이 보낸 추천서를 읽었다.
천천히 읽은 아라드리네는 마법으로 추천서를 불태워 버리면서 물었다.
“디지즈 마스터, 말레콥 제프리즈의 질병이 심어져 있으시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놈을 죽이셨고요?”
예카트리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라드리네는 마른세수를 했다.
“왜 그러시나요? 혹시 친했던 사람인가요?”
예카트리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레콥 제프리즈는 아르카나의 간부면서도 독원이라는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눈앞의 아라드리네와, 아직 만나지 못 한 디벳이라는 노인이 과거 독원 소속이었다는 걸 유안에게 들었다.
예카트리체의 물음에 아라드리네는 쓰게 웃었다.
“친했던 사람이라…. 예, 친했었죠. 그가 제 가족과 디벳의 가족을 죽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말에 예카트리체는 왜 유안이 말레콥을 반드시 죽이라 했는지 알아차렸다.
말레콥의 죽음은 눈앞의 명의에게 지불하는 치료비였던 것이다.
“여기, 그자가 가지고 있던 아공간 마도구입니다. 이 안에 그가 사용하던 마법 지팡이와 시체를 넣어 왔습니다.”
팔찌 형태의 마도구를 받아든 아라드리네는 안에 든 것들을 확인하고는 놀랐다.
“이건… 너무 귀한 것들이군요. 말레콥이 다른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모든 연구 자료를 들고 다닐 줄이야.”
약재사나 의원이 아니라면 크게 가치는 없었다.
아니, 약재사나 의원이어도 제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나 다름없는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아라드리네와 디벳은 말레콥과 같이 젊은 시절을 보내며 절차탁마했으며, 그 실력에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물론 말레콥은 주술의 달인이라 연구 자료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주술에 능통해야 했지만, 아라드리네는 말레콥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주술에 능했다.
“과한 진료비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이 진료비면 당신을 치료하는 시간이 극명하게 단축될 겁니다. 빠르면 한 달, 늦어도 올해 안에는 완치될 테죠.”
아라드리네의 말에 예카트리체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더 빨리 은공께 은혜를 갚을 수 있겠군요.”
병이 다 낫는다고 하더라도 유안 일행과 합류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있으면 제자인 제이드의 성장에 방해가 될 게 분명했으니까.
그러니 다른 사계의 현자들을 돕고, 아르카나의 비밀 지부들을 전부 세상에서 지워버릴 생각이었다.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이들에게 한 방 먹여줄 생각에 신이 나서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그런 예카트리체의 모습에 아라드리네는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우선 병이 낫는 것부터 생각하세요. 다행히 환자분의 마력이 심후해서 저주성(詛呪性) 질병이 몸을 잠식하는 게 더디지만 안심할 순 없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치료에 전념하고, 소일거리로 새로 제자를 들인 친구나 도와줘야겠네요. 그 친구가 제자 복이 없어서 첫 제자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예카트리체도 일생에 제자라고는 제이드 한 명뿐이었지만 으스댔다.
그녀의 말에 아라드리네는 드미트리트론을 떠올리고는 쓰게 웃었다.
그녀가 검은 머리의 파릇파릇한 젊은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노년의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는 사실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참, 로니아는 뭘 좋아하나요?”
“디벳의 말로는 사과파이를 좋아한다고 하던데, 아직 사과가 나기에는 계절이….”
아라드리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예카트리체가 아공간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사과를 꺼냈다.
“마침 사과가 있으니 다행이네요!”
“설마 이든의 황금 사과?”
불로의 영약이자 신들의 과실로 유명한 신화 속 사과였다.
예카트리체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진품은 아니고 제 사조(師祖)께서 만든 모조품이라 효과는 진품만 못해요. 기껏해야 노화를 늦추고 마력을 쌓는 데 도움이 되는 정도?”
그 효과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이들이 눈 돌아가서 탐을 낼 만한 보물이었다.
당장이라도 연구실에 있는 모든 귀한 약재들과 바꾸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맛은 좋은 사과니 로니아도 좋아하겠죠?”
효과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태도에 아라드리네는 기절할 뻔했다.
* * *
“이 도시에서는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제이드는 기대 어린 눈으로 날 바라봤다.
스승에게서 독립하여 떠나는 여행의 처음이 인어와 크라켄이 얽힌 모험이었으니 기대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나는 그의 물음에 품 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끼며 대답했다.
“휴양 도시에서 뭘 하긴, 쉬어야지.”
“아… 그렇습니까?”
살짝 실망하는 그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너는 몰라도 다른 친구들은 꽤나 오랫동안 강행군이었거든.”
특히 길버트는 꽤나 무리해서 긴장을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휴식은 꼬박꼬박 챙겨주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다음 전투를 위한 것이지, 회복을 위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래도 덕분에 길버트가 많이 성장했고, 프레시아도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아바스엘도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니 기다려야 하고.”
질리빌에 가까워지니 아바스엘이 질리빌로 보낸 전서구가 내 마력을 감지하고 내게로 날아왔다.
답신에 따르면 무사히 마법을 되찾았고, 슬라반 서커스단과 함께 질리빌로 오는 중이라 며칠 걸린다고 했다.
“아, 그래도 걱정하지 마. 전투가 없을 뿐이지 재미있는 경험은 꽤 할 테니까.”
질리빌은 왕국의 귀족, 상인들은 물론 외국의 높은 사람들도 방문하는 명성 높은 휴양지다.
게다가 그 역사가 건국 이전에도 있으니 숨겨져 있는 것들도 꽤 많은 편이었다.
“우선 할 일이 많으니까 길버트는 숙소를 잡아줘. 바다거북의 요람이라는 여관에서 방을 빌린 다음에 여기 적힌 상점을 돌면서 물건 좀 사다 줘. 없으면 무리해서 사지 않아도 돼.”
나는 심부름 품목과 약도가 그려진 쪽지를 건넸다.
도시가 오래돼서인지 골동품 속에 보물들이 꽤 많이 숨어 있었다.
내가 부탁한 건 그런 물건들이었다.
“여기 돈이랑 공간 확장 가방. 딱히 급한 일은 아니니까 적당히 군것질도 하고 놀면서 해.”
내가 가진 정보는 소설이 시작한 이후의 것들이다.
내 행동으로 미래가 꽤나 바뀌었을 테니 못 구하면 인연이 아닐 뿐이다.
“예, 알겠습니다.”
길버트에게 나비를 붙여 보내고 제이드와 실루아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대장간을 전세 내줘. 한 여섯 곳이면 되려나?”
둘은 내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차렸다.
“산맥에서 캐낸 금속들을 재련하려고 하는 거죠?”
실루아의 추측에 나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똑똑하구나. 이곳같이 대도시가 아니면 좋은 설비가 있는 대장간들을 찾기 힘드니까.”
실루아의 저택 안에 있는 공방에도 관련 설비가 있긴 하지만, 한곳에서 처리하기에는 캐낸 원석이 너무 많았다.
“대충 듣기로 대장간이 모여 있는 구역이 북쪽 외곽 지역이라 했으니 그쪽으로 가봐. 그리고 괜히 눈에 띄지 않게 인형들 얼굴 가리고, 비밀 엄수 명심해.”
내가 주의를 주자 제이드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도 언제나 탐욕을 주의하라 하셨죠.”
“남는 돈으로는 사고 싶은 걸 사도 돼. 저기 도시 중앙에 보이는 탑이 마탑의 질리빌 지부니까 구경만 해도 꽤 재미있을걸?”
내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본 제이드와 실루아는 눈을 반짝였다.
“둘 다 일은 다 하고 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나는 제이드의 어깨에 누니를 앉혔다.
“네~!”
“걱정 마십쇼.”
두 사람은 신이 나서 달려갔다.
그렇게 좋은가? 아마 좋아하는 것도 그리 오래가진 않을 거다.
본탑도 아니고, 민간에 공개하는 정보나 파는 마도구 따위는 둘을 만족시키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미리 알려줘도 괜찮았지만, 이런 건 직접 겪고 실망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우후후후.”
프레시아는 내 생각을 눈치채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격 나쁘세요, 도련님.”
“이것도 다 여행의 묘미 아니겠어? 이렇게라도 세상 살아가는 걸 알아야지.”
“그래서, 저희는 어디로 가나요?”
프레시아는 나와 떨어질 거라는 가정은 아예 안 하는지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물론 나도 홀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돈을 쓴 만큼 벌러 가야지.”
내 말에 프레시아는 걱정스레 물었다.
“설마 카지노를 말씀하시는 건 아니시죠?”
“오, 눈치 빠른데? 카지노도 후보 중 하나야.”
질리빌에는 왕국뿐만 아니라 외국의 부유층이 한데 모인다.
그런 만큼 질리빌의 카지노는 상당한 호황이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식 카지노는 물론, 사설 도박장도 수를 세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그 말은 곧 털어먹을 호구들이 한가득하다는 의미였다.
“도련님!”
프레시아의 외침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후보 중 하나일 뿐이야. 오늘은 카지노에 갈 생각 없으니 안심해.”
“그럼 어디로 가나요?”
“질리빌 종합무역상공회의소(綜合貿易商工會議所).”
세상은 대(大) 주식의 시대, 나는 주식왕이 될 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