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인어의 노래 (5)
크라켄 사체가 쓰러지자 에일리는 곧장 인어의 마법으로 허공에 물의 창을 만들어 말크렘의 부하들을 겨누었다.
나는 람의 힘으로 물의 창을 허물어트리며 그녀를 말렸다.
“모처럼 재미있는 구경하는데 초 치지 마세요.”
“저들은 크라켄을…!”
“이미 승리한 전투입니다. 절 은인으로 여긴다면 가만히 계세요.”
내가 항의를 일축하자 에일리는 마음에 안 드는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들의 갑작스러운 기습에 대처할 수 있었던 것도, 나아가 이길 수 있던 것도 나와 내 일행 덕분이다.
게다가 크라켄의 근원인 바다의 부정한 기운을 정화하는 시간을 단축하려면 내 정령의 힘이나 게오르의 연구가 필요했다.
에일리가 침묵하자 나는 원한 가득한 처절한 혈투를 관전하며 길버트에게 물었다.
“다친 데는?”
“겉만 베였습니다. 이 정도는 침 바르면 낫습니다.”
“괜히 허세 부리지 말고 당장 치료받아. 제이드, 치료 마법과 해주(解呪) 부탁할게.”
말크렘의 검은 악명 높은 저주검(詛呪劍) 창백한 부패(Pale Rot)였다.
말크렘이 초인도 아니면서 제국 암흑가를 괜히 지배하게 되는 게 아니었다.
저주검과 일정 영역 안에 위치한 주인에게 무한한 마력을 보충해 주는 탐식의 구(球)는 자신의 영역에서는 초인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괴물로 만들어 주었다.
생각해 보니 탐식의 구는 크라켄의 보옥으로 만든 물건이었겠구나.
하기야, 뒷골목 깡패 새끼가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 과한 물건이다 싶었는데 출처가 여기였구만.
크라켄의 보옥이라면 충분히 납득이 된다.
제한이 많은 힘이라 비록 넘버즈라 불리는 대간부는 되지 못했지만, 말크렘을 넘버즈의 자리를 위협하는 고위 간부 중 하나로 만들기에는 차고 넘쳤다.
내가 주워 든 검을 본 제이드는 즉시 마법 지팡이를 들었다.
“심상치 않은 마검이군요. 회복 반전과 부패의 저주인가? 바로 해주하겠습니다.”
치료 마법은 물론 자연 회복마저 막아 실혈사를 유도하는 저주와 상처를 썩게 만드는 저주였다.
‘창백한 부패’라는 이름 그대로다.
그래도 연구 욕심보다 동료부터 우선하는 게 제이드다웠다.
아니, 내가 연구를 시켜줄 거라고 믿고 굳이 부탁도 하지 않는 건가?
나는 저주검을 아공간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 검은 일단 내가 보관할게.”
저주검의 힘은 내가 프레시아에게 준 칠성검보다는 못하지만 길버트에게 준 순백의 난쟁이제 검보다는 훨씬 좋았다.
길버트에게 저주검을 줘도 괜찮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 한참 성장해야 하는 녀석에게 이런 의존하기 좋은 검은 일렀다.
내가 검을 챙기자 프레시아가 눈을 반짝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살짝 상기된 표정을 보아하니 내게 검을 가르칠 구실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프레시아는 내가 마법서를 뒤적일 때마다 안달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어떻게든 내게 검의 매력을 알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왜인지 제이드가 일행이 되고 난 다음부터 그런 경향이 더 심해진 느낌이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프레시아의 시선을 피했다.
난 아직 죽고 싶지 않다.
차라리 길버트에게 검을 배웠으면 배웠지, 프레시아에게 배울 생각은 없다.
처절하리만치 치열한 사투의 끝에 숨통이 붙어 있는 건 여섯 명이었다.
“넷밖에 안 죽다니, 다들 몸 사렸네.”
네 명 중 한 명은 내게 덤벼들다가 질리안 시리즈에게 죽은 녀석이니 자중지란 끝에 죽은 건 셋뿐이었다.
그마저도 셋씩 나눠져 싸운 녀석들 중 어느 한쪽이 전멸한 게 아니었다.
사망자 중 한 명은 친구의 연인을 빼앗기 위해 친구를 죽인 오소독스였으니 말이다.
내 비웃음 섞인 조롱에도 살아남은 이들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다들 중상을 입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병든 닭 덕츠가 죽은 건가, 아쉽네.”
노회한 깡패라면 써먹을 데가 많았을 텐데 말이다.
물론 이 쓰레기들 사이에서 그나마 이용해 먹을 데가 있다는 거지 전부 죽여버려도 상관없었다.
내 말에 덕츠를 죽이고 살아남은 왜소한 긱과 고양이 귀 체펠은 흠칫하며 떨었다.
눈치가 목숨 줄인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이 자신들의 목을 틀어쥐고 있는 게 누구인지 모를 리 없었다.
긱이 피가 배어나오는 복부를 부여잡으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 저라면 덕츠 이상의 성과를 드릴… 커억! 커르르륵!”
긱은 내 바람의 화살에 목이 꿰뚫려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누가 허락도 없이 주둥이를 나불거리라 했지? 재활용도 못 할 쓰레기가.”
이놈은 이용 가치가 있고 없고를 따지기 이전에 재활용 불가의 폐기물이었다.
여기서 죽는 게 이 세계에 보탬이 되리라.
“도련님!”
프레시아가 날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고쳐먹지도 못할 쓰레기에게 기회를 줄 수 있을 만큼 강하지도, 도량이 넓지도 못하다.
이런 놈은 치울 수 있을 때 치워둬야지.
긱의 죽음에 그들 사이에도 희비가 갈렸다.
늙은 어미의 치료비를 훔쳐 시기를 놓친 외다리 저크소스는 기뻐하고 있었다.
반면, 자신에게 저주를 건 저주술사의 위치를 유일하게 아는 긱이 죽자 썩은 팔 덱보블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기뻐하는 이도, 안타까워하는 이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그런 멍청이들에게 한마디 했다.
“쓸데없이 자신의 가치를 어필하려 하지 마라.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할 수 있는 일 따위를 들어봤자 듣는 귀만 썩을 테니까.”
내 신랄한 말에 살아남은 쓰레기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대로 죽는 건가 싶겠지.
“그리고 적을 앞에 두고 서로를 죽이려 드는 병신들을 어디에 써먹으란 말이야?”
물론 앞뒤 가리지 않고 싸울 만한 원한 관계기도 했고, 서로 죽이라고 이간질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다.
내 말에 몇 명은 체념을 했는지 눈을 감았고, 몇 명은 살길을 찾기 위해 눈알을 굴렸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음 같아선 깔끔하게 죽이는 게 편하지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마. 내게 목숨을 바쳐라, 그럼 살려주지.”
내 제안에 체펠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내가 발언을 허락하자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목숨이라 함은 저희의 충성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물음에 나는 대놓고 비웃었다.
“하! 너희 같은 쓰레기들의 충성 따위는 필요 없다. 어차피 충성하라 해도 입발림 소리만 할 것들이 헛소리하지 마라.”
사실에 기반한 혹평에 이번에는 덱보블이 손을 들었다.
“그, 그럼 설마 흑마법적인 의미에서의 그런 목숨입니까?”
그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다.”
그러자 다들 안색이 파리해졌다.
“비슷하다고 했지, 같다고는 하지 않았어. 정확히는 너희들의 영혼에 저주를 걸어둘 거다. 너희는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하고, 나는 원할 때 고통을 주거나 죽일 수 있는 저주지.”
당장 죽지 않는다는 말에 이 파리 목숨 같은 삶은 사는 녀석들은 안도했다.
지금 상황만 벗어날 수 있으면 저주는 어떻게든 풀 수 있다고 여기는 거겠지.
멍청한 놈들, 고대 마법과 마법 암호에 능통한 현자급 마법사가 아니라면 푸는 건 불가능할 거다.
“이곳을 벗어나서 풀 수 있으면 풀어봐. 그럼 푼 놈은 자유다. 물론 저주를 풀겠다고 내 명령을 등한시하는 놈은 저주를 풀기도 전에 죽을 테지만.”
내 경고에 쓰레기들은 다시 긴장했다.
나는 그들을 치료한 다음, 아퀼라의 마도서에서 가장 지독한 저주를 고르고 골라, 제이드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다섯 명에게 걸었다. 그러고는 명령을 내렸다.
“체펠, 네가 새로운 스카 페이스 패밀리의 보스다. 말크렘의 모든 것을 이어라.”
“추,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체펠은 패밀리 간부들 중 가장 경력이 짧은 자신이 보스가 되자 기뻐하면서도 동료들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제대로 된 마법사답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지, 이내 여기 있는 이들이 절대 배신할 수 없다는 것을 눈치 채고 미소를 지었다.
“제국으로 돌아가 모든 암흑가를 정복해. 너희에게 건 저주가 담긴 목줄을 몇 개 줄 테니 쓸모 있어 보이는 쓰레기가 보이면 채워서 종놈으로 부려. 정복 방법은 일임하겠지만 적당한 선은 지켜라, 괜히 황실 같은 데 찍혀서 토벌당하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원래라면 아르카나의 명령으로 말크렘이 수행하게 될 일을 앞당기기로 했다.
“덱보블, 지금부터 네가 체펠의 오른팔이다. 제국으로 돌아가거든 아즐란의 홍등가로 찾아가 아즈도그라는 포주를 찾아가 죽여라. 그리고 비밀 금고를 차지해.”
“알겠습니다.”
“거기의 긱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네가 찾는 정보도 들어 있으니 짬 날 때 복수하는 건 눈감아 주마.”
내 말에 그는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숙였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앞으로 내게 보고할 방법, 스카 페이스 패밀리 간부들의 약점과 대략적인 암흑가 통일 전쟁 시작 방법, 그리고 아르카나가 이곳에 있었던 일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을 때의 시나리오 등을 일러주었다.
당연히 우리에 대한 정보를 입에 담을 생각만으로도 저주가 발동해 죽을 거다.
이로써 아르카나 밑에 비수를 하나 심어두었다.
이 비수가 은밀하게 스며들어 적의 숨통을 끊을 치명적인 비수가 되어줄지, 아니면 별것 아닌 시도에 그치게 될지는 지금으로서 알 수 없다.
이건 일단 들어두는 보험일 뿐이다. 끝까지 사용할 일이 없다면 그것도 좋다.
“자, 그럼 이제 이 섬에서 꺼져! 이 쓰레기들아!”
내 호통에 다섯 명은 타고 왔던 배에 올라타 도망치듯 섬을 벗어났다.
멀어지는 배를 보며 에일리는 허탈하게 웃었다.
“처음의 정중한 모습, 적을 상대할 때 장난스럽게 이죽거리는 모습, 방금 전처럼 무자비하고 강압적인 모습. 어느 게 네 본 모습이야?”
그녀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모두 제 본 모습입니다. 인어와 달리 인간은 다면적인 생물이거든요.”
그러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고갈된 마력에 전신이 뻐근해 곡소리를 냈다.
“아이고, 이제 좀 쉴 수 있겠네. 정화는 좀만 쉬었다가 합시다. 쉬는 김에 노래나 들려줄 수 있겠습니까?”
내 너스레에 에일리는 키득거리며 목을 풀었다.
“내 목숨을 구해주고 평생의 소원을 이루어 준 은인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드려야지.”
인어의 노래는 너무나 감미롭고 아름다웠다.
* * *
“후아~! 살 것 같다.”
크라켄의 썩은 비린내가 나던 옷을 전부 태워버리고 샤워를 하니 상쾌했다.
내가 씻고 온 사이 에일리가 크라켄 사체를 다시 수조 안에 집어넣고 주변 정리를 끝내놓았다.
나는 다시 사다리를 타고 수조 위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날 지키겠다고 프레시아와 제이드도 따라 올라왔다.
“이제 크라켄이 다시 일어날 일은 없는데?”
내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단호히 일축했다.
“만약을 대비하는 겁니다.”
“그럼요, 주의해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평소에는 라이벌 의식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이럴 때 보면 죽이 잘 맞는 것 같단 말이야.
나는 피식 웃으며 마력을 끌어 올려 에일리의 인도를 따라 정령의 힘을 퍼트렸다.
사방으로 퍼진 정령의 힘은 근방의 부정한 기운을 정화했고, 한곳으로 몰았다.
구멍이 난 천장으로 동이 터 오르는 모습이 보일 무렵, 모든 부정한 힘이 크라켄의 보옥으로 모이자 인어는 노래하기 시작했다.
노래는 인어의 힘이자 마법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퍼져나갈 때마다 그녀의 감정과 기억이 눈에 아른거리듯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