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113화 (113/214)

제113화. 인어의 노래 (3)

저 아래에서 다급하게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자님!!”

아니, 프레시아. 아무리 다급해도 도련님이라고 부르라고.

그런 생각보다 빠르게 비델의 갑옷을 활성화하고 정령의 힘으로 날 보호했다.

다시 일어선 크라켄의 사체는 내가 도망치기도 전에 날 촉수로 휘감았다.

으드드드-!

“커흑! 왕실 보물고에서 갑옷을 가져오길 잘했네.”

왕국 역사상 최고의 기사라 불린 비델이 꿍쳐놓은 비장의 수단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촉수에 압사당할 뻔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하고 슬쩍한 건 아니다만 살았으면 된 거지, 뭐.

날 움켜쥔 촉수는 정령 넷의 힘과 비델의 갑옷을 뚫고 내 복부를 압박했다.

“크윽! 이 비린내 나는 새끼야, 그렇게 압박하니까 지리겠다. 이 썩을, 아니 썩어버린 새끼가.”

내 농담에도 크라켄은 반응이 없었다.

아니, 반응이 없는 수준이 아니다.

크라켄의 흉부는 여전히 열려 있고 심장과 갈비뼈가 훤히 내보였다.

대답이 없다, 평범한 시체 같다.

“우욱, 냄새.”

50년 가까이 동안 부패한 크라켄의 사체에서는 심각한 냄새가 풍겼다.

디벳 영감이 만든 영양제로 단련되지 않았다면 당장 토하고 난리도 아니었을 거다.

음, 생각해 보니 디벳 영감의 영양제보다는 나은데?

그때 크라켄이 입을 열자 염통이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나비야! 크윽!”

날 보호하던 나비의 힘이 사라지자 날 쥐고 있는 촉수의 압박이 심해졌다.

-아아아아~!

하지만 덕분에 크라켄이 내지르는 음파 공격에 나와 동료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길버트와 아그니는 막지 못했을 힘이다.

썩어버린 몸뚱이 주제에 폐와 성대는 멀쩡하군.

“으아, 마력 살살 녹는다. 프레시아! 이 촉수를 베고! 제이드! 대마법 한 발 날려서 이 비린내 나는 것을 밖으로 쫓아내!”

내 지시에 프레시아는 높이 뛰어올라 검강으로 날 붙잡은 촉수를 베어 날 구해냈다.

그리고 제이드는 내가 동료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공격 마법에 오롯이 집중해 마법을 날렸다.

“차가운 눈길을 뚫고 찾아온 방문자여, 그 눈길에 서린 서리 맺힌 함성을 내질러라! 서리 폭풍!”

휘몰아치는 블리자드가 크라켄 사체를 얼리며 높은 동굴 천장에 부딪쳤다.

쩌저적-! 콰앙-!

동굴이 무너지며 크라켄 사체를 섬 위로 날려버렸다.

마치 용천수에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프레시아의 걱정에 나는 웃어 보이며 프레시아에게 딱밤을 먹였다.

“도련님이라고 부르라고. 갑작스러워서 마력 소모는 많았지만 몸은 괜찮아.”

역시 비델의 갑옷이다. 전설의 괴물의 촉수에 닿고도 어디 흠집 하나 없네.

“제이드! …아, 알아서 잘하는구나.”

제이드는 내 지시가 없어도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크라켄 사체를 쫓았다.

“실루아, 아그니 씨를 보호해 줘.”

“알겠어요! 어부 할아버지는 제가 지킬게요!”

실루아는 인형을 소환하며 힘껏 경례를 했다.

“에일리 씨.”

내 부름에 에일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연인에게 말했다.

“나 걱정하지 말고 몸 사리고 있어.”

“알았어. 기다리는 데는 이골이 났으니까.”

뼈가 있는 농담에 인어와 늙은 어부는 키득거렸다.

“에이, 그냥 기다리기만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야 그럴 수 있….”

끝도 없이 염장질을 할 것 같자 나는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농담 따먹기는 나중에! 우선 저 괴물부터 처리하고 해!”

“아이쿠, 미안!”

에일리도 하늘을 날아 크라켄 사체의 뒤를 쫓았다.

“어흠… 심각한 상황에 미안하네.”

아그니의 사과에 나는 피식 웃었다.

“괜찮습니다. 괜히 나서다가 다치지 말고 실루아랑 조심히 있으세요. 기껏 소원 성취했는데 오래 사셔야죠.”

“그래야지.”

실루아라면 노인 하나 지키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실루아는 걱정 말라며 각인 펜으로 주변에 결계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핵 방공호를 만드나. 결계 규모가 왜 이래?

“실루아, 적당히 하렴. 프레시아, 길버트, 가자!”

두 호위 기사를 이끌고 계단을 오르니 어두워진 바다에 흐릿하게 배 그림자가 보였다.

“은하야.”

내 호명에 은하는 주변을 대낮처럼 밝혔다.

세상이 환해지자 배 그림자로 보였던 것이 큼지막한 어선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배에서 내리는 한 무리가 있었다.

“복종하라! 부정한 자여!”

웬 검은 구슬을 치켜 든 채 앞장서서 외치는 거한의 얼굴은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큰 흉터가 있었다.

그리고 뒤따르는 왜소한 체구의 사내, 고양이 귀의 반수인, 늙어 보이는 닭 수인, 핼쑥해 보이는 중년 사내….

어딘가 익숙한 조합이다. 이런 느낌이 드는 걸 보면 소설 속에 나온 것 같았다.

딱 봐도 악역으로 보이는데, 메이저한 악역이었으면 바로 떠올랐을 거다.

바로 안 떠오르는 걸 보면 엑스트라들인가 보네.

“누구지?”

나는 아퀼라의 마도서를 열고 전에 기록해 둔 정보를 살폈다.

아리사의 부하들인가? 아니네.

연인, 제프리즈 부부의 부하인가? 비슷한 무리가 있는데….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내가 정보를 뒤지고 있을 때 크라켄이 날뛰며 촉수로 사방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도련님! 피하세요!”

프레시아와 길버트는 검기를 두른 검으로 우리에게 날아드는 촉수를 베어냈다.

그래도 죽었다고 촉수가 재생하거나 하진 않았다.

하기야 살아 있었다면 길버트의 불완전한 검기로는 흠집만 나지, 이렇게 잘 베이지도 않았을 거다.

“감히 이곳에서 정화 의식을 방해하다니! 그 죄악, 죽음으로 갚아라!”

에일리는 분노하며 우리가 처음 섬에 도착했을 때처럼 허공에 무수한 물의 창을 만들어 적들을 공격했다.

“체펠! 덕츠! 막아라!”

흉터의 사내의 외침에 고양이 귀 소녀와 늙은 닭 수인이 앞에 나서서 쏟아지는 물의 창을 막았다.

“아악! 내 마력!”

“크윽! 오래는 못 버티오!”

고양이 귀는 제대로 된 마법 장벽을 펼쳐 막았고, 닭 수인은 마력을 담은 날갯짓으로 창의 궤도를 틀었다.

“복종하라! 부정한 자여! 달의 이름으로, 죽음 너머에서 오라! 복종하라! 부정한 자여! 복종하라!”

흉터의 사내가 계속해서 검은 구슬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명령을 반복하자 크라켄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거대한 촉수로 그들을 감싸 에일리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아! 고양이 귀 체펠! 병든 닭 덕츠! 왜소한 긱! 그래, 찾았다! 스카 페이스 패밀리! …저놈들이 왜 여기 있지?”

아르카나의 하부 조직 중 하나인 제국 북동부의 암흑가를 장악한 갱단의 보스가 왜 ‘지금’ 이곳에 있지?

소설 속에서 이 섬에 문제가 일어나는 건 약 2년 7개월 정도 뒤의 일이다. 그런데 왜 지금?

“아! 설마!”

내 깨달음과 동시에 흉터의 사내, 말크렘이 검은 구슬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어째서 이곳에 인어 외의 잡놈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모조리 죽여버리면 되겠지! 죽여라!”

저놈 손에 들려 있는 검은 구슬은 분명 ‘아르카나 18, 달’과 전대 ‘아르카나 13, 죽음’이 힘을 합쳐 만든 것으로, 시체를 언데드로 만드는 마도구였다.

정확히는 마법사의 힘을 능가하는 힘을 지닌 시체를 언데드로 만들어 사역하는 물건이다.

제한 시간이 있는 일회용이고 전대 ‘죽음’이 죽고 난 이제는 만들 수 없어 어지간하면 사용하지 않는 물건일 텐데 잘도 주웠군.

“죽여라! 죽이라고! 죽여!”

흉터의 남자가 악을 쓰며 마력을 담아 몇 번이고 명령을 내려야 크라켄의 사체는 명령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하, 하자품이었군.”

그럼 그렇지.

그 인색한 수전노 같은 여자가 넘버즈도 아닌 놈에게 저런 걸 그냥 줄 리가 없지.

그럼에도 구슬의 힘은 진짜였다.

-아아아아아~!

크라켄 사체는 명령에 따라 우리를 죽이려 움직였다.

주요 목표는 크라켄을 죽인 에일리였지만 계속해서 내가 있는 쪽으로도 촉수를 휘둘러서 프레시아와 길버트가 나를 보호해 줬다.

“제이드, 프레시아! 에일리 씨를 도와 크라켄을 처리해!”

내 지시에 제이드는 전력으로 서리 폭풍으로 크라켄 사체를 얼리며 물었다.

“유안! 괜찮겠습니까? 저 검은 구슬이 원인인 것 같은데 저자를 먼저 처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날뛰는 크라켄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언데드는 생전에 비해 육체적 능력이 떨어지지만 지닌 마력은 강화되는 성질이 있었다.

저 크라켄은 생전과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괴물일 거다.

“저놈들은 나랑 길버트가 처리할 수 있어.”

“도련님.”

프레시아의 걱정에 나는 아공간에서 질리안 시리즈 셋과 마석 자루를 꺼내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나는 지원만 하고 인형과 길버트가 처리할 거니까.”

마석이 아깝긴 하지만 저놈들을 쓰러트리고 주머니를 털면 충분히 보충할 수 있을 거다.

내 대답에 길버트는 당당하게 검을 치켜들었다.

“저만 믿으십쇼!”

길버트의 말에 프레시아는 못미덥다는 눈초리로 흘끔 보고 단호히 말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그리고는 촉수를 베어내며 날뛰는 크라켄의 사체를 향해 달렸다.

그녀의 시선에 길버트는 상처를 입은 표정을 지었다.

불쌍한 길버트, 어서 무시당하지 않게 더 굴려 줘야겠다.

“이게 무슨?! 분명 정보부에는 인어 외에는 크게 신경 쓸 게 없다고 했는데!”

흉터의 사내, 말크램은 당황했다.

에일리 혼자 있다는 계산이었다면 저런 하자품 마도구로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대비였을 거다.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은 흉터의 사내는 나를 노려봤다.

“저놈들을 빨리 처리하고 크라켄을 돕는다!”

인력을 분산시켰다가는 뒤치기를 당할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물론 현명했다면 일이 틀어진 시점에서 당장 도망쳐야 했지만 말이다.

“길버트, 저 세숫대야에 흠집 난 살인마 새끼만 죽여. 나머지는 내가 막고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방심하지 마라. 저래 보여도 검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파직(罷職) 기사니까.”

내 말에 길버트는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범죄를 저지르고 쫓겨난 기사 출신인 말크렘은 쫓겨나기 전에는 대영지의 기사단장에 오를 거라 여겨지던 촉망받던 이였다.

주정뱅이 부모를 잘못 만나 발목 잡혀서 끝내 범죄에 손을 대게 된 것이 그의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하지만 쫓겨나고 저지른 짓거리들을 보면 딱히 동정은 가지 않는다.

길버트가 적 우두머리를 노리고 달리자 적들은 길버트를 죽이려 들었다.

“질리안 34호! 35호! 길을 뚫어!”

나는 마석에서 마력을 뽑아내 번개의 화살을 난사하며 길버트를 엄호했다.

질리안 시리즈가 큼지막한 대검을 휘두르며 길을 트자 길버트가 말크렘에게 도착했다.

적 우두머리에게 도달한 즉시 검기를 두른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불의를 저지르는 악당! 너를 처단하겠다!”

길버트가 영웅 소설을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듣는 내가 다 부끄러워지는군.

“이 애송이가!”

길버트가 자신과 맞먹으려 들자 말크렘은 화를 내며 길버트와 검을 맞부딪쳤다.

말크렘의 동료들은 그와 협공하려 길버트에게 달려들었지만, 질리안 시리즈와 내 정령 마법 세례에 막혔다.

“너희들 상대는 나야. 애가 모처럼 좋은 교보재와 훈련하는데 방해하지 말고 나한테 덤벼, 이 병신들아.”

내가 오만하게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적들은 당황했다.

“너 혼자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 있다는 거냐?”

왜소한 체구의 사내, 긱이 어이없어하자 나는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여느 대마법보다도 효율적이고 위대한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고양이 귀 체펠! 네 아버지를 죽인 자가 바로 옆에 있는 병든 닭 덕츠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

자, 이제부터 서로 죽여라!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