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인어의 노래 (2)
정령왕(精靈王) 가빌렛.
나라 없는 아홉 왕인 무국구왕(無國九王)의 하나이자 요정 중 꽤나 드문 엘프 순혈로, 정령 군세(群勢)를 이끄는 괴물 중의 괴물이다.
소설에서는 이름만 나올 뿐, 제이드가 본격적으로 아르카나와 전쟁을 벌일 때 사계의 현자의 이름으로 힘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했었다.
하지만 그는 속세와 연관하고 싶지 않다며 부하 몇 명만 보낸 인물이었다.
물론 정령왕이 파견한 정령공(精靈公) 하프 엘프 제스로드와 정령후(精靈侯) 쿼터 픽시 아빌론을 비롯한 부하들의 힘은 작은 나라 하나를 초토화 시킬 수 있을 만큼 대단하긴 했다.
참고로 정령왕의 부하의 말에 따르면, 가빌렛은 정령왕이라 불리는 걸 싫어한다고 했다.
하지만 원래 별명은 좋든 싫든 다른 사람이 붙이는 법이었다.
인어는 나를 돌아보며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럼 여기 정령을 다루는 사람이 너밖에 더 있어?”
“그건… 없죠.”
그녀의 착각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는 정령왕과는 관계없이 정령술사가 된 사람입니다. 괜히 다른 데 가서 그런 헛소리 하지 마십쇼. 그 충성심에 미쳐버린 정령왕의 부하들이 절 찢어 죽이려 들 겁니다.”
정령왕의 부하들의 숫자는 고작해야 백 명이 넘지 않는다.
그럼에도 왕이라 불리는 것은 본인을 포함하여 부하들이 사역하고 있는 정령들의 숫자가 일국의 군대와 비견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정령공 제스로드가 홀로 사역하는 정령 군대는 2만이 넘었다.
내 말에 프레시아가 검을 잡으며 내게 말했다.
“어떤 적이 온다 하더라도 제가 도련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길버트도 힘차게 외쳤다.
“저도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거 참 든든하네.”
음, 정령 군대와 싸워보게 하면 둘 다 더 강해지긴 하겠지?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번 해볼까?
내 상념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호위 기사는 의욕을 다졌다.
에일리는 그런 날 보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군주급 정령을 넷이나 사역하길래 정령왕의 후계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면 실례했어.”
“아니요. 듣고 보니까 오해할 만했네요.”
정령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내가 만나본 마법사들도 하나같이 신기해하긴 했다.
확실히 오해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확실히 정령왕과 관계가 없다면 그 충성심 강한 정령대공(精靈大公)이 가만 둘 리 없긴 하네. 그 미치광이의 명성은 우리 인어들에게도 유명하니까. 정령대공 밑의 정령공이나 정령후도 만만치 않게 미쳐 있고 말이야.”
정령대공? 그 놈은 또 뭐야?
뭐, 소설에서 이름도 나오지 않은 엑스트라니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애초에 정령왕은 저 멀리 남부 마경에 은둔하고 있어서 접촉하는 것도 힘들었으니까.
“그래도 군주급 정령의 힘이라면 충분히 정화에 도움이 될 테니 부탁할게.”
“그러죠. 애초에 그러려고 찾아온 거니까요.”
겸사겸사 감사 인사로 인어에게 비늘과 피와 꿍쳐놓은 보물 좀 얻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물 창고를 찾아야 제대로 뜯어먹을 수 있는데. 영 찾기가 쉽지 않았다.
“크라켄의 보옥이 있는 곳으로 안내할게.”
인어의 안내에 나는 돌아다니며 마법 현상을 관찰하고 있는 제이드와 실루아를 불렀다.
크라켄을 보러 간다는 말에 두 사람은 호다닥 뛰어왔다.
* * *
어부들을 납치해 어선을 탈취한 검은 후드 망토를 쓴 괴한들은 어촌 도시가 멀어지자 갑갑한 후드와 마스크를 벗었다.
뱃머리에 걸어둔 등불에 비친 그들은 꽤나 다양한 나이와 종족이 섞여 있었다.
“곧 있으면 배가 도착하겠군.”
그들이 탄 배는 일반적인 어선보다 훨씬 빠르게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그들 중 망토 아래 고양이 꼬리를 살랑거리는 검은 머리의 반수인족(半獸人族)이 바람 마법을 다룰 수 있어 원하는 방향으로 바람을 만든 덕분이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체펠, 너는 수인인데 얼굴은 인간이고 귀는 고양이 귀가 달려 있다니 말이야.”
왜소한 체구의 사내의 말에 고양이 반수인인 체펠은 지겹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나는 수인이 아니라 반수인이라고 몇 번을 말해. 수인은 완전히 동물의 형상을 한 사람들이고, 반수인은 나처럼 동물의 신체적 특징을 가진 사람이라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대장인 흉터의 사내는 그녀를 진정시켰다.
“체펠, 네가 이해해 줘라. 긱은 견문이 짧아서 그런 거니까. 그리고 긱, 적당히 해라. 분란을 일으킬 말을 계속한다면 제재하겠다.”
흉터의 사내가 이끄는 무리 중에서도 체펠처럼 쓸 만한 마법사는 몹시 드물어 귀중했다.
어디에서나 마법사는 귀한 인재였다.
대장의 말에 왜소한 체구의 사내, 긱은 움찔했다.
“죄, 죄송합니다. 대장.”
“알면 되었다. 마법사는 집중하고 있을 때 말을 걸면 싫어하니 주의하도록.”
우두머리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고양이 반수인은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지었고, 왜소한 사내는 대장의 눈치를 보면서 구시렁거렸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납치되었던 어부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소용돌이 때문에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어부는 혹시라도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소용돌이로 배를 몰라고 할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그를 납치한 이들의 대장은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저 주머니에서 작은 구슬을 하나 꺼내 들고 뱃머리로 향할 뿐이었다.
“지금부터 길을 열거다. 폭풍이 몰아칠 테니 닻을 내리고 돛을 접어라. 그리고 바다에 빠지지 않게 난간이라도 잡고 있어 봐.”
대장의 명령에 부하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어부들은 선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흉터의 사내는 구슬을 높이 치켜들며 구슬에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도 암흑가가 아닌 양지로 나갈 때가 되었다!”
그러자 그의 말대로 거센 바람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 * *
에일리의 안내를 따라 간 곳에는 바위로 가려진 비밀 동굴이 있었다.
지하 깊숙이 들어가는 굴에는 빛의 마법이 걸린 돌멩이가 촘촘히 박혀 있었는데, 그 끝에는 거대한 공동이 나왔다.
“인간이 사는 곳 같네요. 인어도 이런 식으로 인테리어하나 보죠?”
거대한 공동은 흡사 대저택의 방 같기도, 마법 공방 같기도 하게 꾸며져 있었다.
“아니, 내가 꾸민 게 아니라 마스터 제이올린이 만든 공간이야. 실제로 그 부부가 이곳에 머물렀지.”
에일리의 대답에 실루아는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너무 넓은 공간이라 한 번에 못 알아차렸는데 벽에는 에일리와 젊은 시절의 필립 부부가 같이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 그런데 마스터라니. 언제 적 일입니까? 두 분 다 마스터는 진작 넘었습니다.”
내 지적에 에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두 사람이라면 더 위로 올라 갈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럼 오노러블? 아니, 둘이라면 슈프림 메이지까지도 달성했을지도 모르겠네.”
그녀의 물음에 실루아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어머니는 슈프림이셨고, 아버지는 만병의 현자라 불리셨어요!”
실루아의 대답에 인어는 크게 놀랐다.
“마스터, 아니 게오르가 현자가 되었다고? 마도팔현의 그 현자? 하하하하! 그 정도로 대단한 마법사가 되다니, 내가 다 영광인걸?”
지난 4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세상과 단절되어 지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원한다면 당시 현자 게오르와 슈프림 제이올린이 남긴 것들을 줄게. 딸에게는 상속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정말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천천히 챙겨 가고, 지금은 크라켄부터 보여줄게.”
에일리가 아무것도 없는 벽에 다가가 마력을 불어넣자 벽이 투명해지며 거대한 인어의 사체가 물속에 담겨져 있는 모습이 비쳤다.
“이건….”
“크라켄, 정확히는 바다의 부정한 기운을 받아들인 어리석은 나의 일족이야.”
크라켄이라고 하면 통상적으로 거대한 문어를 떠올리기 쉽지만, 정확한 해석은 거대 문어보다는 ‘바다의 부정한 괴물’이 옳았다.
17세기 이전 유럽의 크라켄 그림만 봐도 거대한 문어보다는 주로 리바이어던같이 사악한 해룡의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다.
아마 서양에서 사악한 것의 이미지하면 드래곤이란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 것이었겠지만 말이다.
“크라켄 전승을 보면 두족류에 대한 것이 많은데 인어라니 의외입니다.”
제이드의 말에 실루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 촉수 같은 건 뭔가요? 원래 인어에게도 있는 기관인가요?”
언듯 무례할 수도 있는 실루아의 질문에 에일리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나나 내가 아는 인어들은 저런 게 없었는데, 크라켄이 되면서 생겼더라고.”
크라켄의 물고기 꼬리와 인간의 상체 사이에는 수십 가닥의 거대한 촉수가 돋아 있었다.
본체는 해수면 아래 있고 촉수만 보면 문어를 떠올릴 법도 했다.
“내 의무는 부정한 기운에 손을 댄 일족을 처단하고 바다에 부정한 힘이 다시 흘러들어 가지 않도록 정화하는 것이야. 토벌 과정에는 현자 게오르와 슈프림 제이올린의 도움을 받았지.”
크라켄이 된 인어의 흉부가 반으로 갈라져 갈비뼈와 심장 위로 작은 구슬이 떠 있었다.
구슬은 크라켄의 크기에 비하여 작다는 거지,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였다.
“저 열린 가슴에서 꺼내진 구슬이 크라켄의 보옥이야. 크라켄이 죽고 나서도 저기서 끊임없이 부정한 기운이 나오고 있어서 아직까지도 해결하지를 못했어.”
물론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정화한 거라며 그녀는 쓰게 웃었다.
에일리의 설명에 나는 게오르의 연구 일지를 살펴보며 물었다.
“정화는 어떤 식으로 진행합니까? 효과가 없으면 제 스승님이 남겨둔 이론 연구가 있는데 그것도 한번 사용해 보시겠습니까?”
“현자 게오르의 연구? 그의 연구라면 내 방법보다 더 확실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무려 대양(大洋)의 군주께서 계시니 일단 내 방법대로 했으면 좋겠어.”
에일리는 내 어깨 위에 앉아서 하품하고 있는 작은 다람쥐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부디 힘을 빌려주시겠습니까? 위대한 군주시여.”
-삑삑!
람의 울음소리에 내가 대신 통역하듯 대답했다.
“좋다고 합니다. 대신 정화한 저 보옥을 가져가고 싶다고 하네요. 가능하다면 사체 일부도.”
-삑?
람은 제가 언제 그랬냐고 물었지만 나는 무시하며 싱긋 웃었다.
“꼭 가져가고 싶네요.”
완벽히 정화하면 힘이 약해지긴 하겠지만 크라켄의 보옥이라면 그래도 어디 가서 쉽게 구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방법만 해도 떠오르는 게 네 가지나 된다.
차분히 연구한다면 알차게 활용할 수 있을 거다.
내 말에 에일리는 허리를 펴며 대답했다.
“위대한 군주께서 원하신다면 기쁘게 바치겠습니다.”
-삑?
그러고 보면 인어도 요정처럼 정령 신앙을 근간으로 두고 있었던가?
“꼭입니다!”
-삑?
협상을 마친 나는 에일리가 원하는 대로 사다리를 타고 크라켄의 사체가 담긴 수조 위로 올라가 바로 섰다.
그리고는 마력을 끌어 올려 람과 동조하며 인어의 마법이 이끄는 대로 물의 정령의 힘을 유도했다.
내 마력의 유일한 장점인 밀도가 높다는 것은 다른 기운을 억누르고 세상과 공명이 쉽다는 말이었다.
과연 군주(君主)라는 명칭이 허명이 아닌지 람의 힘이 퍼져 나갈수록 부정한 기운이 서려 있는 바다와 땅이 빠르게 정화되고 있었다.
과연, 에일리가 현자의 연구보다 람의 힘을 빌리길 원한 이유가 있었다.
굳이 번거로운 작업보다는 상극인 힘이 직빵이구만.
속으로 감탄하며 정령의 힘을 조율하고 있는 그때 수조가, 아니 우리가 있는 군도 전체가 흔들렸다.
촤아악-!
그리고 분명 죽었을 크라켄이 움직여 내 앞에 바로 섰다.
거, 목욕 좀 하지. 비린내가 너무하네.
아니, 그보다.
“어…? 나 X된 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