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늙은 어부의 사랑 (9)
낚싯대가 움직이며 줄이 팽팽해졌다.
나는 빠르게 휠을 감아 내 팔뚝만 한 물고기를 낚았다.
내 팔뚝만 하다고 해봤자 고등어보다 얇았지만 말이다.
“이야, 여기가 노다지네.”
“도련님, 노다지가 뭔가요?”
내 옆에서 같이 낚싯대를 드리운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잠시 뭐라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어… 대충 이득이 되는 것이 많은 지역이라는 말이야. 지금 경우에는 물고기가 많다는 뜻이지.”
물의 정령인 람의 힘으로 물고기의 위치를 알아내고, 그 앞으로 미끼를 아른거리게 해서 잡는 것이었지만 물고기가 많은 건 사실이었다.
“그렇군요. 여기가 노다지네요.”
“확실히 노다지군요.”
프레시아와 길버트도 계속해서 물고기를 낚았다.
수조는 금방 물고기로 가득 찼다.
나중에 손질해서 식자재 창고에 넣어 둬야겠다.
“낚시도 생각보다 수련이 되네요. 해류를 거스르고 줄을 움직이는 게 꽤나 힘들어요.”
프레시아의 말에 그녀가 쥐고 있는 낚싯대를 보니 은은하게 마력이 느껴졌다.
지금 프레시아는 낚싯줄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세상에나. 미스릴로 만든 실도 아닌데 저게 가능한 짓이었다니. 놀라워라.
길버트도 알아봤는지 내게 속삭였다.
“프레시아 경은 참 무, 대단한 것 같습니다.”
“방금 무섭다고 하려 했지?”
“하하, 도련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신 것 아닙니까?”
“아니라고 할 순 없지.”
나와 길버트의 수군거림에 프레시아는 헛기침을 하며 우리를 흘겨봤다.
나는 다급하게 화제를 돌리기 위해 실루아와 제이드에게 물었다.
“분석은 언제쯤 끝나?”
“거의 다 끝나갑니다."
“인어의 마법은 처음이라 구조 해석부터 해야 해서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제이드와 실루아 둘이나 붙어서 분석하는 데 오래 걸리는 걸 보면 인어도 대단한 존재였던 것 같다.
“그래? 천천히 해.”
아직 해가 저물려면 시간이 꽤 많이 남았다.
해가 져도 은하가 있으니 대낮처럼 밝게 만들 수 있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건 아그니밖에 없었다.
“그렇게 초조해해 봤자 더 빨리 들어갈 수 있거나 하진 않으니 낚시라도 하시죠.”
내 권유에 늙은 어부는 웃으며 낡은 낚싯대를 잡았다.
“그도 그렇군. 하지만 이해해 주게. 40년을 늙어버린 사내가 어찌 그녀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겠나. 게다가 그녀는 아직도 크라켄과 싸우고 있다고 하질 않았는가.”
그의 말에 은연중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인어는 노화가 느리기로 유명했다.
그의 입장에서 아직도 젊을 연인 앞에 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해석 끝났습니다. 길을 열겠습니다.”
때마침 제이드와 실루아가 마법 해석을 끝마쳤다.
제이드가 마법 지팡이를 휘두르자 군도를 감싸고 있던 소용돌이에 틈이 벌어지며 좁은 바다길이 만들어졌다.
늙은 어부는 늙음을 무서워하던 것과 달리 거침없이 노를 저어 그 틈새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늙은 어부가 지난 세월 동안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던 섬으로 배를 몰았다.
* * *
노을이 지다 못해 어두워지기 시작한 아크라의 항구에 열 명의 후드를 눌러쓴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장, 준비 끝났습니다.”
선착장에는 한 왜소한 사내가 커다란 어선 위에서 그들을 불렀다.
배 위에는 어부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 셋이 묶여 있었다.
“말씀하신 배와 배를 몰 수 있는 뱃사람입니다.”
왜소한 사내의 보고에 대장이라 불린 거구의 사내가 배 위로 올라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우두머리인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사내의 뒤를 따라 부하들도 배에 올라탔다.
부하들은 닺을 올리고 검을 뽑아 묶여 있는 어부들을 풀어주었다.
어부들은 갑자기 자신들을 납치한 무장 괴한들에게 반항할 엄두도 내질 못했다.
흉터의 사내가 검을 뽑아 한 어부의 목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하얀 파랑(波浪) 군도까지 배를 몰아라.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
“예…? 하, 하얀 파랑 군도가 어디입니까? 이 배는 어선이라 너무 먼 바다는 갈 수가, 히익!”
어부의 말에 흉터의 사내는 검을 더 깊숙이 대었다. 어부의 살갗이 갈라지며 피가 흘렀다.
“지금 반항하는….”
“저, 대장. 보고서와 달리 하얀 파랑 군도는 현재 소용돌이 군도라 불린다고 합니다.”
먼저 도시를 탐색했던 왜소한 사내의 말에 흉터의 사내는 머쓱해하며 검을 회수했다.
“그러냐? 쯧, 정보부는 정보 갱신 좀 빠릿하게 할 것이지. 소용돌이 군도까지 배를 몰 수 있겠지?”
흉터의 사내의 물음에 어부들은 열심히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럼 빨리 몰아.”
어부들은 빠릿빠릿하게 돛을 펼쳐 육풍을 받아 바다로 향했다.
빠르게 항구와 멀어지는 것을 본 흉터의 사내는 난간에 걸터앉았다.
“저, 대장.”
왜소한 사내가 머뭇거리며 말을 걸자 흉터의 사내는 후드를 벗으며 부하를 바라봤다.
“왜 그러지?”
“이번 임무 말입니다. 괜찮은 겁니까?”
부하의 물음에 흉터의 사내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물어본 부하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그 있잖습니까. 정보부에 따르면 소용돌이 군도에는 크라켄이 있다지 않습니까. 대장이야 문제없겠지만 저나 다른 놈들은 방해만 되지 않겠습니까?”
두려워하는 부하를 본 흉터의 사내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다. 크라켄의 본체는 벌써 40여 년 전에 만병의 현자와 인어에 의해 죽었고, 지금 우리가 회수하러 가는 것은 크라켄이 남긴 보옥 ‘바다의 부정한 기운’이니까.”
지금 소용돌이 섬에는 인어가 남아 바다의 부정한 기운을 정화하고 있는 중일 터였다.
“인어가 위험하기는 하지만 크라켄의 보옥 회수가 어려운 일은 아니야. 하고자 했다면 진작 할 수 있었다.”
대장의 말에 왜소한 체구의 사내는 의아해했다.
“그럼 왜 이제 와서야 회수하려는 하는 겁니까?”
“만병의 현자의 죽음이 이제야 밝혀졌으니까.”
과거 크라켄을 처리한 건 만병의 현자 게오르 필립과 그의 아내 제이올린 필립, 그리고 인어 에일리였다.
슈프림 메이지 제이올린의 죽음은 10여 년 전 그녀를 은사(恩師)로 둔 두 제자를 통해 밝혀졌지만, 게오르 필립의 죽음이 밝혀진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아무리 병으로 은퇴하여 현자의 자리를 반납하였다고는 해도 현자는 현자였다.
과거 마스터 메이지였던 게오르를 오노러블 메이지로 승격시킨 업적인 크라켄 토벌에 흠집을 내면 게오르 필립과 적이 될 테니 지금까지 함부로 회수를 시도하지 못한 것이다.
“정말, 만병의 현자가 스스로 죽음을 알렸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저 쉬우면서 평가가 높은 임무를 두고 몇 년을 더 두고 봤어야 했을 테니 다행이지.”
흉터의 사내의 말에 부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그럼 대장도 이번 임무로 대간부, 아르카나 넘버즈가 되는 겁니까?”
아르카나의 핵심 간부진이라 할 수 있는 넘버즈가 된다면 아르카나가 목표로 하는 ‘신세계’에서 높은 지위와 신분을 약속받을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굳이 언제 이루어질지 모를 신세계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넘버즈쯤 되면 아르카나의 연줄과 힘을 이용해서 부와 권력을 갖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흉터의 사내도, 그의 부하들도 전자보다는 후자를 더 기대하고 있었다.
설레발치는 부하의 모습에 흉터의 사내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마 이 정도 가지고는 부족하겠지.”
“아, 그렇습니까?”
“하지만 최근에 아리사와 니벨이 아주 큰 실수를 했으니 이번 일만 성공하면 끌어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넘버즈가 가시권 안에 들어오는 건 확실하겠지.”
흉터의 사내는 야심 가득한 눈으로 불타올랐다.
다른 핵심 간부의 자리라면 공석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리 공적을 쌓는다고 해도 무리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의 아리사나 어리숙한 니벨을 비롯한 몇 명은 충분히 끌어내리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경쟁해야 하는 건 상사라고 할 수 있는 넘버즈만이 아니다.
그와 동류의 중간 간부 중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괴물들은 차고 넘쳤다.
“바다의 부정한 기운만 있다면 나는 최강이 될 거다. 더 이상 이 세상에 내 적은 없겠지.”
흉터의 사내는 그렇게 확신했다.
* * *
섬에 배를 정박하자 늙은 어부는 회한과 그리움 섞인 눈으로 천천히 섬을 둘러봤다.
“이곳은 변하지 않았군. 마치 평생을 그리던 꿈속에 들어온 것 같아.”
아그니는 해변가에 놓인 바위를 쓸어 만졌다.
그의 손끝에 걸린 음각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의 심장을 이곳에 두고 떠나다. 금방 다시 돌아와 나의 심장을 찾으리라.’
젊은 시절의 그가 이 섬을 떠나기 전 새겨놓은 맹세였다.
“금방일 줄 알았건만, 너무나 긴 세월이었구려.”
젊었던 어부의 손은 주름졌고, 총기 넘치던 눈에는 깊은 한이 서렸으며, 짙은 갈색의 머리는 하얗게 새어버렸다.
“과연, 인어가 노익장을 섬 밖으로 보낸 이유가 있었군요.”
내 말에 늙은 어부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나를 돌아봤다. 내 대신 제이드가 설명했다.
“이 섬은 부정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크라켄은 바다의 부정한 기운에서 태어나는 괴물입니다. 에일리란 분이 크라켄을 죽였다면 당연히 그 부정한 기운이 새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많이 정화된 듯하지만 감각이 그리 뛰어나지 못한 나도 느낄 정도였다.
아마 막 크라켄을 죽였을 때라면 그 부정한 기운에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죽어버렸을 거다.
나와 아그니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다른 일행들은 꽤나 괴로운 듯했다.
기감(氣感)이 너무 좋은 것도 안 좋을 때가 있네.
이 망한 몸뚱이를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섬에 둘러진 소용돌이는 부정한 기운이 새어 나오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한 모양입니다.”
“부수지 않길 잘했네.”
낚시에 질린 프레시아가 그냥 베어버리면 안되냐고 속삭일 때는 그러라고 말할 뻔했는데. 기다리길 잘했다.
아니었으면 향후 몇 년간 이 근방의 어업이 죄다 망할 뻔했다.
뭐, 결계를 부쉈어도 제이드라면 알아서 수습할 방법을 찾아냈을 거다.
미친 인어를 죽이고도 부정한 기운을 잘만 처리했으니까.
“도련님.”
프레시아가 나를 자신의 뒤로 보내며 검을 뽑을 준비를 했다.
“이 섬을 지키고 있는 주인이 벌써 알고 왔군요.”
제이드도 마법 지팡이를 꺼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 가득 물방울이 맺히며 사방에 물의 창이 만들어졌다.
동시에 살 떨리는 중압감이 섬을 지배했다.
“옛말에 좋은 뜻을 지닌 이는 함부로 오지 않고, 제 발로 온 자는 좋은 뜻을 지니지 않다(善者不來 來者不善)고 하였다. 물러가라, 침입자들이여. 그렇지 않는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해안 절벽에서 작살을 들고 내려오는 여인은 무시무시한 투기를 내뿜었다.
인어의 힘이 이 정도인가?
과연 전설의 괴물인 크라켄을 죽일 만한 괴물이었다.
“만나자마자 죽인다니, 노익장의 사모님께선 화끈하신 분이군요.”
내 농담에 아그니는 가볍게 웃었다.
“바다의 여걸답게 성격이 불같긴 하지.”
“은하야.”
내 부름에 몸을 숨기고 있던 빛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며 사위를 밝혔다.
이제는 늙어버린 어부와 아직도 아름다운 미모를 잃지 않은 인어는 서로를 바라봤다.
“에일리.”
“아그니?”
그리고는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두 사람은 한눈에 알아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