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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109화 (109/214)

제109화. 늙은 어부의 사랑 (8)

“허억!”

젊은 어부 아그니는 눈을 번쩍 뜨며 숨을 들이쉬었다.

거친 바닷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신선한 공기가 폐부를 자극하며 정신을 바짝 들게 했다.

“…섬?”

주변을 돌아보니 어느 섬의 해변이었다.

하늘은 언제 폭풍이 몰아쳤냐는 듯이 변덕스럽게도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르렀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 아주 작게 보이는 소크레 산맥의 봉우리를 보아하니 하얀 파랑(波浪) 군도의 섬 중 하나에 표류한 모양이었다.

젊은 어부는 안도했다.

파도에 휘말렸을 때 그대로 익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았건만,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이 부근에 암초가 많아 어선들이 많이 오지는 않지만, 아예 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두어 달만 살아남으면 구출될 수도 있었다.

“어머니가 걱정이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동료들의 입을 통해 자신이 죽었을 거라 전달될 거란 점이었다.

한숨을 내쉰 젊은 어부는 바람결을 따라 들려오는 희미한 노랫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혹시 이 섬에 사람이 살고 있는 걸까?

그런 기대에 아그니는 노랫소리를 쫓아 움직였다.

조심스레 다가간 그곳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바다 바위에 걸터앉아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한없이 드리운 토끼풀 꽃밭을 거닐어 그대의….”

그가 다가가자 노래하던 여인은 놀라며 바위 뒤로 숨었다.

“아! 놀라게 했으면 죄송합니다! 그저 노랫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생각해 보면 어딘가에서 들어본 노랫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하려는 찰나, 노래를 부르던 여인이 바위 위로 상체를 드러내며 말했다.

“깨어났네요? 안 일어나서 걱정했거든요. 숨은 쉬고 있어서 괜찮다고는 하던데, 바다에서 건진 사람은 종종 멀쩡한 듯 보이다가 육지에서 익사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화사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 젊은 어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여인의 말은 다른 이의 존재를 시사하고 있었으나 과하게 뛰는 심장 탓인지 머리에 피가 몰려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 그렇습니까? 혹시 절 구해주신… 아니, 아닙니다.”

구해준 사람이 당신이냐 물으려 한 아그니는 스스로도 바보 같은 질문이라 생각해 손을 내저었다.

순박한 어부의 모습에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을 구해준 사람이라면 제가 맞아요.”

“네?”

아그니의 얼빠진 되물음에 그녀는 바위에 다시 걸터앉으며 다리를 보였다.

그녀의 다리가 있어야 할 곳에는 큼지막한 물고기 꼬리가 달려 있었다.

“제가 맞다고요.”

“아…!”

전설 속의 인어라면 거친 격랑 속에서 자신 하나 구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일이리라.

그 사실을 깨달은 아그니는 한 가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배는! 저와 같이 빠졌던 어부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의 물음에 인어는 살짝 놀랐다가 이내 배시시 웃었다.

“역시 당신은 생각했던 대로 선량한 분이군요. 그 선배라는 분은 배 위의 동료들이 줄을 당겨 구해냈어요. 한참을 당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자책하긴 했지만 배는 무사히 항구로 돌아갔고요.”

“아, 그거 다행입니다.”

진심으로 안도하자 인어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자신을 걱정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표류하게 되었는데?”

인어의 물음에 젊은 어부는 어깨를 으쓱였다.

“혼자였다면 걱정했겠지만 이리 아리따우신 분이 함께이지 않습니까?”

아그니의 말에 인어는 꺄르르 웃었다.

“보통은 자신의 처지를 걱정하거나, 조심성 많은 인어가 어째서 구해준 것인지 이유를 묻는데. 당신은 그렇지 않으시군요.”

“아! 그렇군요. 저는 왜 구해 주셨는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젊은 어부의 어리숙한 행동에 인어는 마력으로 하반신을 인간의 다리로 만들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당신을 구해준 이유는 당신이 마음에 들어서예요. 저는 종종 어선에 다가가 인간들의 소식이나 노동요를 듣는 걸 좋아해요. 특히 당신의 노래를 좋아합니다.”

“예?!”

얼굴을 가까이하며 좋아한다고 말하자 젊은 어부는 과민하게 반응했다.

당황하는 그의 모습에 인어는 키득거리며 살짝 떨어졌다.

그러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달빛이 드리운 창가에 앉아

누군가 문을 두드려 주길 바라네

나의 성, 나의 방, 나의 창가

용기 있는 자 그 누구일까?

인어는 젊은 어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인어가 부르는 노래는 그도 익히 알고 있는 노래였다.

젊은 어부는 뒤를 이어 노래를 불렀다.

달빛이 비추는 창가 앞에 서서

그녀의 창문을 두드려 볼까

로망스의 기사님처럼 꽃을 들어

용기 있게 고백해 보려 하네

“똑똑똑.”

동시에 입으로 노크 소리를 흉내 낸 인어와 젊은 어부는 꺄르르 웃었다.

그리고는 인어가 먼저 노래를 이어 불렀다.

아아, 나의 창가를 두드리는 사내

희미한 달빛은 얼굴을 비추지 못해

누구일까? 기사님, 왕자님, 아니면 대부호?

붉은 장미는 태양과 잘 어울리니

한낮에 날 만나러 와주세요

거절하는 그녀의 말에 낙담하네

뜨거운 햇빛 아래 나는 바로 설 수 없어

초라한 청년 하나, 내 모습 감추지 못해

그렇다면 달과 잘 어울리는 꽃

안개꽃 들고 그녀를 만나러 가리

허영심 많지만 수줍은 사랑을 동경하는 소녀가 가난하지만 순박한 청년의 계속된 사랑 고백에 마음이 끌리는 노래였다.

그 노래는 멋들어진 백마 대신 당나귀를 탄 청년이 용기를 내 태양 아래 그녀의 집 앞에 와 고백하는 것으로 끝을 맞이한다.

한껏 노래를 부른 둘은 한참을 웃으며 노래 이후의 소녀가 청년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 줬을지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 소녀라면 한 번쯤 더 튕기고 청년의 마음을 받아줬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머, 그래요? 저는 바로 받아줬을 것 같은데요.”

약간의 견해 차이로 즐겁게 떠들던 그때 인어는 섬에서 약간 떨어진 곳의 하늘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높이 솟은 먹구름이 몰려 있었다.

“최근 날씨가 꽤나 변덕스러워서 아마 며칠은 어선도 여객선도 이 근방으로는 오지 못할 거예요. 사실 당신이 타고 있던 어선도 오면 안 됐는데…. 뭐, 덕분에 당신과 직접 만나게 되었으니 괜찮나?”

인어는 낙천적으로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에일리예요. 당신은?”

“아그니입니다.”

에일리, 예쁜 이름이다.

젊은 어부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언가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사실 당신 이름은 알고 있었어요, 아그니. 당신이 바다에 나와 부르는 노래를 듣는 게 제 낙이었거든요. 아! 그렇지, 아침 이슬 피할 만한 곳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인어의 안내에 젊은 어부는 별다른 의심 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어차피 바다에서 죽었을 목숨이었으니 은인을 믿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여겼다.

인어가 안내한 곳은 어느 동굴이었다.

그곳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동물 가죽이 깔려 있고 단검과 부싯돌, 그리고 마른 장작이 마련되어 있었다.

오래도록 살기에는 무리였지만 며칠간 머무는 건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전설 속의 인어와 달리 눈앞의 그녀는 인간의 옷을 입고 있었다.

젊은 어부의 시선을 느꼈는지 인어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딜 보시나요?”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사과에 인어는 꺄르르 웃었다. 대화를 할수록 순진한 어부가 마음에 들었다.

“죄송하면 또 함께 노래를 불러줘요. 전 당신의 노래를 좋아하니까요.”

“저, 저도 당신의 노래를 좋아합니다.”

아그니는 진심을 다해 고백하듯 말했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사랑일까, 아니면 부정맥일까?

젊은 어부의 고백에 인어는 좋아해 줘서 다행이라며 섬을 안내해 주었다.

식수를 구할 수 있는 곳,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자라는 곳, 그리고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곳까지.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외딴 섬에서 인어와 함께 살아가게 된 젊은 어부는 인어와 함께 밥을 먹고, 인어와 함께 노래를 불렀으며, 인어와 함께 잠을 잤다.

날이 흐려질 때면 때때로 인어는 볼일이 있다며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한참 있다가 오곤 했다.

홀로 남은 어부는 열매를 따거나 낚시를 하는 등 필요한 일을 했다.

그렇게 인어가 볼일을 보고 나면 섬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둘씩 가져왔다.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가져와 준 옷을 갈아입고, 악기를 연주하며 젊은 어부는 인어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불효막심한 생각이었지만 젊은 시절의 아그니는 평생을 이렇게 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홀로 남을 어머니가 걱정이 되진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같이 배를 탔던 동료들이라면 십시일반 하여 부양해 줄 터였다.

어느새 자신의 연인이 되어준 인어와 노래를 부를 때면 세상에 대한 걱정 따위는 모두 잊고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행복도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섬에 표류하게 된지 반년 조금 못 미칠 무렵의 일이었다.

“아그니, 이 근방에 어선을 발견했어.”

인어는 애써 웃으며 말했지만 그 미소 속에 담긴 서글픔이 의미하는 바를 젊은 어부는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어머니를,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젊은 어부는 자신의 연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에일리, 네가 원한다면 가지 않을 게. 아니, 내가 네 곁을 떠나는 걸 원치 않아.”

연인의 말에 인어는 너무나 기뻐했지만 동시에 슬퍼했다.

“나는… 네가 떠나길 바라. 네가 네 가족과 함께, 친구들과 함께 행복하길 바라. 어젯밤에도 육지 쪽을 바라보고 있었잖아? 그들을 보고 싶잖아?”

“아니,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인간은 인간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한 법이야. 나 때문에 그 모든 걸 포기하지 않아도 괜찮아.”

단호한 연인의 말에 젊은 어부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인사만 하고 다시 올게. 내 항해 기술이면 작은 배로도 충분히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어.”

그러니 며칠만 기다려 달라 속삭였다.

젊은 어부의 말에 인어는 연인을 끌어안았다.

“알았어, 기다릴게. 몇 년이 지나더라도.”

끌어안고 있던 탓에 젊은 어부는 연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젊은 어부는 평생을 후회할 선택을 하게 된다.

* * *

“여기까지가 내가 겪은 일일세.”

늙은 어부는 회한 섞인 한숨을 내쉬며 얼마 남지 않은 소용돌이 군도를 바라봤다.

“이제는 저곳에 인어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 늙은이는 저 곳에 묻히는 게 소원이라네.”

그의 목소리는 물기 한 점 없이 메말라 있었다.

마치 더 이상 흘릴 눈물도 남지 않았다는 듯이.

나는 낚싯대를 드리우며 말했다.

“아마 저곳에는 인어가 아직 남아 있을 겁니다. 지금도 열심히 싸우는 중이겠죠.”

내 말에 아그니는 나를 바라봤다.

“솔직히 자네 말을 믿을 수 없네. 아니, 믿고 싶지 않아.”

“하지만 주어진 정보를 조합해 보면 그럴싸한 결론이지 않습니까?”

그의 젊은 시절 그를 이끈 선장이었던 노련한 어부는 바다 밑에 ‘커다란 것’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인어에게는 물건을 조달해 주는 ‘협력자’가 있었다.

“제이드, 소용돌이는 어때?”

“네, 자연 현상은 아닙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뚫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눈앞의 ‘소용돌이’는 인위적인 현상이다.

“실루아, 네 아버지가 중형 이상의 수륙양용 인형을 잃은 게 무엇 때문이라고 했지?”

“어… 크라켄 때문이요!”

어스름 상회의 정보를 따르면 이곳에 젊었던 시절의 게오르 필립과 제이올린 필립이 체류했던 기록이 있다.

모든 정보를 취합한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저곳에는 인어뿐만 아니라 ‘바다의 부정한 자’, 크라켄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이 인위적인 결계가 유지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어째서 완전히 물리치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건 저 소용돌이 너머에 있는 인어에게 들을 생각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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