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늙은 어부의 사랑 (6)
먼저 공갈 사기를 치려 했던 놈이 그렇게 보다니 너무하네.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오면 내 기분이 나빠지지 않겠나.
“눈 깔아, 파버리기 전에.”
내 친절한 조언에 지부장은 고개를 숙여 내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살려주면 뭘 해줄래?”
“….”
대답이 없자 나는 지부장의 손가락 사이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쾅!
“히익!”
“지금부터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손가락 한 마디씩 날아간다. 처음은 가볍게 새끼손가락이야. 알겠나?”
내가 테이블에 박힌 단검을 뽑아 들자 지부장은 다급하게 외쳤다.
“아, 알겠습니다!”
좋아, 이제야 좀 빠릿빠릿해졌군.
이래서 양아치 새끼들이 좋다니까.
괜한 예절 차리지 않아도 되는 게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다.
“살려준다면 내게 뭘 해줄 수 있지?”
“그, 글쎄요? 뭘 원하시는지….”
내가 단검으로 손가락을 내리찍으려 하자 지부장은 다급하게 외쳤다.
“아악! 카탈로그! 카탈로그가 있습니다!”
“어디에?”
“저기 첫 번째 서랍에 있습니다.”
내 고갯짓에 제이드가 서랍을 열고 검은색 커버의 두꺼운 책자를 꺼냈다.
“이건가요?”
제이드의 물음에 나와 지부장은 동시에 말했다.
“네! 그, 그거 맞습니다!”
“그거 아니야. 잘 찾아보면 하얀색 커버 있을 테니까 그걸로 가져와.”
내 말에 지부장은 당황해서 날 올려다봤다.
“새끼야, 한 번만 더 장난치면 손가락이 아니라 혓바닥이 날아갈 줄 알아라. 어딜 호구로 보고.”
어스름 상회의 카탈로그는 등급에 따라 색이 다르다.
검은색은 일반, 빨간색은 고급, 푸른색은 희귀, 하얀색은 VIP 전용이었다.
서랍을 뒤지던 제이드는 하얀색 커버의 얇은 책자를 찾아 내게 건넸다.
카탈로그를 살피던 나는 혀를 찼다.
“쯧, 세 장이 전부야? 시골 지부라 그런지 품목도 적고 쓸데없이 비싸기만 한 것들밖에 없군.”
그래도 나중에 돈 없을 때 팔아먹기 좋아 보이는 보석 종류로 몇 개를 골랐다.
“제이드, 파란색 커버도 가져와 봐.”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
파란색 커버도 얇았지만 그래도 하얀색보다는 장수가 세 배는 많았다.
그래 봐야 아홉 장이었지만.
어디 보자, 어디 보자…. 오, 그래도 희귀 카탈로그에는 쓸 만한 것들이 조금 있네.
어스름 상회의 카탈로그는 효용성보다 가격으로 분류하기 때문에 그런지 이런 시골 지부에서는 흰색보다 파란색이 더 쓸모가 있었다.
이왕 찾아보는 거 고급도 찾아볼까?
그렇게 가져갈 것을 체크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제 풀어줘.”
내 지시에 프레시아와 길버트는 지부장을 놓아줬다.
몸이 자유로워지자 지부장은 카탈로그를 확인하고 기겁했다.
“켁! 너, 너무하십니다!”
“닥쳐, 새끼야. 800만을 등쳐먹으려 했던 새끼가 고작 100만 어치 가지고 엄살 떨지 마. 싹 털어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
지부장은 울컥해서 내게 항의했다.
“다 가져가면 그림자 상회와 적이 되니까 그런 거잖습니까!”
“그래, 잘 아네. 지부장쯤 되면 100만 듀플 정도는 간단히 메울 수 있잖아. 왜? 싫어? 그냥 다 털어가 줘? 관리 불량으로 상회주 앞에 거꾸로 매달리고 싶냐?”
내 친절한 설명에 그는 눈물을 머금으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지부 하나를 털어먹으면 훔쳐간 놈만 죽는 게 아니다. 도난당한 놈도 죽는다.
그게 어스름 상회다.
“조, 조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한 10만 듀플만….”
“뭐라고? 팔 한 짝 없이 살고 싶다고?”
“끄윽, 내 저금이…!”
지부장은 그 돈을 메꾸려면 당연히 자신의 재산을 토해내야 했다.
“지랄한다. 지부장씩이나 되는 놈이 고작해야 100만 가지고 엄살은. 뒤로 삥땅 친 것만 해도 몇천만은 될 거면서.”
“그건 장사가 잘되는 지부나 그렇고요! 어흐흑! 내 돈.”
그래도 지부장 정도 되는 놈과 원한 관계를 맺는 것보다는 적당히 봐주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아니었으면 진작 이 도시 지부를 깔끔하게 지워버리고 튀었을 거다.
훌쩍이는 지부장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인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 일행에게 공갈 사기를 치려 했던 건 이 정도로 넘어가겠어. 그럼 마침 그림자 상회에 왔으니 구매나 해볼까? 너희 정보도 팔지?”
내 말에 지부장은 어이없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눈깔 바로 떠라, 파버리기 전에. 아니면 정보도 공갈 사기 값으로 셈할까?”
“아이고! 아닙니다요! 무엇이든 물어봐 주십쇼!”
지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비볐다.
잘만 하면 오늘 입은 손해를 어느 정도 갈음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선 거겠지.
“다른 어스름 상회 지부 위치와 접선 방법부터 전부 까봐.”
내가 아는 건 몇몇 대도시에 있는 지부뿐이었다.
어스름 상회의 규모를 생각하면 도시마다 하나쯤 있을 터였다.
내 요구에 지부장은 아공간 마도구에서 지도책을 하나 꺼냈다.
꼴에 지부장이라고 아공간 마도구도 가지고 있네.
“고객 창구 말씀이시죠?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사실 이게 VIP에게만 드리는 건데 특별히 드리겠습니다. 가격은 10만 듀플입니다.”
“사기 치지 마. 그거 1만도 안하는 거잖아.”
“사기라니요! 정말 10만…,"
“계속 장난치면 진짜 손모가지 날아간다?”
내가 단검을 뽑아 들자 지부장은 깨갱하며 움츠러들었다.
“어흠, VIP 대상 가격인 1만 듀플에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년도 대륙 경매가 열리는 날짜와 장소, 접선 방법, 그리고 출품되는 카탈로그도 내놔. 10만 듀플이지?”
대륙 경매는 어스름 상회가 주최하는 대규모 암시장 경매로, 어스름 상회가 대륙 곳곳에서 구한 귀한 것들을 파는 축제였다.
“그것도 VIP 대상… 아닙니다. 드리겠습니다. 카탈로그는 주기적으로 업데이트 되어서 당일에 새로 구매하시는 게 좋습니다.”
“아, 그리고 참가할 수 있는 초대장과 VIP 카드도 내놔. 50만에.”
“그, 그건! 제 마음대로 발급할 수… 있습니다! 있어요! 제길, 호구 잡아 팔면 200만은 받을 수 있는 건데.”
내 시선에 지부장도 이제 체념한 듯 고개를 떨궜다.
눈물을 삼키며 건네는 초대장과 카드를 받는데 카드가 뭔가 이상했다.
“얌마! 이거 임시 카드잖아.”
임시 카드는 또 뭐야? 카드 뒷면에 유효 기간이 올해까지였다.
딱 봐도 이건 우량 고객이 될 수도 있는 사람에게 뿌리는 미끼 상품이었다.
유효 기간 밑에 적혀 있는 혜택도 진짜 VIP 카드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제 권한으로는 임시밖에 못 만듭니다. 그것도 지부장 권한으로는 일 년에 다섯 개밖에 못 만드는 겁니다. 제대로 된 VIP 카드는 5년간 실적이 필요하거든요. 아니면 대간부 셋 이상의 허가 또는 상회주의 허가가 떨어질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도 그거면 올해 대륙 경매는 참여할 수 있습니다.”
“아,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진짜는 나중에 어스름 여왕을 만나면 얻어 보기로 하자.
대륙 경매에는 상회주인 어스름 여왕도 올 테니까.
어스름 여왕은 ‘나라 없는 아홉 왕, 무국구왕(無國九王)’ 중 한 사람으로, 왕과 같은 힘을 지닌 아홉 명 중 하나였다.
어스름 상회면 어지간한 소국보다 강력한 세력이니 그렇게 불릴 만했다.
“마지막으로 이 근방의 인어 전설에 대한 모든 정보, 지난 100년간 소용돌이 군도와 관련된 정보도 내놔. 많이 샀는데 이 정도는 서비스로 해줄 수 있지?”
“…1만 2천 듀플입니다, 고. 객. 님.”
이를 악물며 웃는 지부장의 표정에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치사한 새끼. 1만 듀플에 해줘.”
지부장은 양이 많다고 결국 안 깎아줬다.
* * *
항구 도시 아크라의 어스름 상회 지부장은 자신의 손목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재수 옴팡지게 옴 붙었네.”
간만에 먹음직해 보이는 여행객을 공사 쳐서 골수까지 빨아먹으려다가 역으로 털려버렸다.
먼저 잘못했으니 어디 하소연할 때도 없고, 하소연해서도 안됐다.
어스름 상회는 굶주린 하이에나로 가득한 초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약점을 보인 순간 다른 지부장들에게 잡아먹히고 말 거다.
“소금! 소금 가져와!”
팔이 부러진 부하 중 하나가 위장용 술집에서 소금통을 가져왔다.
지부장은 있는 힘껏 사방에 소금을 뿌려댔다.
“악귀야, 물러가라! 악귀야, 물러가라!”
지부장의 머릿속에 박힌 악귀는 선하고 유약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사람을 속이고 등쳐먹기 딱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뿌려진 소금을 치우는 건 당연히 부하들의 몫이었다.
* * *
늦은 시간,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어스름 상회 지부장에게서 삥뜯…아니, 선물 받은 것들을 살폈다.
감정서가 첨부된 보석 몇 개와 꽤 질이 좋은 약초, 낮은 위계의 마법서 몇 권, 그리고 마도구 몇 개를 받았다.
정보 값으로 갈음한 탓에 그리 많진 않았다.
“자, 받아.”
나는 제이드와 실루아에게 마도구를 건넸다.
두 사람에게는 별 쓸모없는 마도구였지만, 걸려 있는 마법을 분석하거나 개조하는 건 마법사 공통의 취미라고 한다.
나는 그런 취미가 안 생기는 걸 보면 마법사라고 할 수 없는 건가.
마도구를 받고 좋아하던 제이드는 걱정스레 물었다.
“그런데 유안의 말을 들어보면 어스름 상회가 꽤 규모가 큰 상단인 것 같은데, 그렇게 협박해 갈취하고 그냥 나와도 괜찮은 겁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흥미롭게 그를 바라봤다.
호구처럼 사람 좋은 제이드가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안 괜찮으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가서 뭔가 하고 올까? 확실히 나도 그냥 나오려니 뭔가 섭섭하기는 했어.”
그럼 지부장 놈이 아주 좋아 까무러칠 거다.
내가 신이 나서 묻자 제이드는 부담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귀찮게 굴 수 있으니 경고라도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아하하하, 괜찮아. 그놈들이 먼저 공갈치다가 역으로 당한 거잖아. 게다가 나도 적당히 봐줬고. 개개인으로는 복수할 순 있지만 어스름 상회를 동원하지는 못할 거야.”
어스름 상회가 그렇게 의리가 좋았으면 내가 양아치 새끼들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상회의 각 지부장은 서로 경쟁 관계다.
날 어떻게든 죽이고 싶어 다른 지부의 힘을 빌리고 싶으면 그에 상응하는 값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그건 나한테 털린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손해였다.
“그게 봐준 건가요?”
길버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진짜로 안 봐줬으면 죽을 걸 각오하고 덤벼들었을걸?”
고작 저금 깨는 정도로 수습이 가능한 정도니 그도 내가 봐줬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거다.
아니, 뒈지기 싫으면 인지해야 할 거다.
“자, 그럼 늦었으니 다들 자야지. 두 사람도 어서 방으로 가.”
프레시아와 실루아는 인사한 뒤 자신들의 방으로 향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빛의 정령 은하의 불빛에 의지해 밤늦게까지 인어와 소용돌이 군도에 대한 정보를 읽었다.
* * *
“하아암~! 졸리군.”
늦게까지 소용돌이 군도의 정보와 대륙 경매 카탈로그를 읽느라 잠을 못 잤더니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내가 자고 있던 사이 제이드와 실루아는 어제 얻은 마법서를 돌려 읽고 있었다.
그리고 프레시아와 길버트는 근력 운동을 하면서 연공을 하는 미친 짓을 하고 있었다.
길버트도 점점 프레시아처럼 되어가는 모습을 보니 흐뭇하구만.
나중에 실버 블룸 하나 더 챙겨 줘야겠다.
나와 길버트, 프레시아가 하나씩 먹었음에도 아직 블란츠바그 가문의 비전 영약 실버 블룸은 여유가 있었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길버트는 가중력 마법이 걸린 아령을 내려놓고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어제의 경험 탓인지 난쟁이가 만든 팔찌는 손목 밴드로 가려져 있었다.
“그래, 어서 씻고 와. 정보는 충분히 모았으니까 이제 인어 찾으러 가야지.”
“인어가 정말 있는 겁니까?”
“그래, 인어는 실존한다.”
내가 미래를 보고 왔거든.
(다음 편에서 계속)